기후현을 아시나요

영화 속 도시이야기 '세키가하라 대전투'

by 신천옹

사람의 발길이 잘 닿지 않거나 찾는 이들이 있더라도 왁자지껄하지 않은 그런 감춰진 곳과의 조우는 여행이 주는 또 다른 깜짝 선물이기도 하다.


특히 일본을 여행하다 보면 ‘여기에 이런 곳이’하는 느낌을 갖는 풍경들이 많다.


알려지지 않았다는 점이 의외이기도 하지만 고즈넉해서 좋다.

IMG_2105.jpg 기후현 미노시의 한적한 버스정류소

2025년 5월 중순. 나가사키현 오무라시 한 스낵바의 중년 여자 알바분이 일본에서 가장 기억에 남은 곳이 어디였냐고 물었다.


그때 무심코 툭 튀어나온 곳이 ‘기후’였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옛 친구가 떠오르듯 기후의 고즈넉함이 스낵바의 시끄러운 분위기에서 떠오른 이유까지는 지금도 알 수 없다.


그분의 놀라는 표정이 재미있었다. 기대를 단 '1'도 안 했는데 더도 덜도 아닌 5만 원 정도 복권에 당첨된 듯한 어정쩡한 표정이었다. 의외라는 느낌으로 말끝을 흐리며 내게 되물었다.


“일본 사람들도 잘 알지 못하는 곳 중에 하나인데 어떻게…”.


이유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기는 갑자기 왜 떠올랐는지에 대한 이유를 생각해 내는 것보다 더 어려웠다.


곳곳에 물이 있고 강이 이어져 있어서 좋았다고 했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IMG_2101.jpg 나가라 강의 보행전용 현수교

정말이지 그냥 지나가다가 ‘아, 여기 좋다’고 느낀 곳이 기후였다.


일본의 47개 도도부현 중 4~5개 정도 현을 제외하면 현도를 중심으로 나름 알려진 곳을 다녀봤지만 바다도 없고 옆에 붙은 나고야와 가나자와, 도야마에 치여(?) 감춰진 기후는 분명 색다른 곳이었다.


상쾌한 느낌이 제일 먼저 머리에 떠오르는 것도 우연이 아니었다. 숲이 많아 기후 전체 면적에서 나무가 차지하는 비중이 80%나 된다.

IMG_2103.jpg 연어낚시 강태공들의 주 무대 나가라 강

현도인 기후시를 흐르는 나가라 강을 비롯해 중부의 기소강, 히다강 등 점처럼 흩어진 낚시꾼들과 강옆을 따라 띄엄띄엄 지어진 집들은 그 자체만으로 하나의 엽서가 된다.


나가라 강은 1,300년 전부터 내려오는 가마우지낚시로 유명하다. 우카이라는 관련 축제도 있다. 가마우지를 길들여 강에 살고 있는 은어를 낚는 것으로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 체험 상품도 있다.

나가라 강 전경

잔인해 보이는 부분도 없지 않지만 일단 가마우지의 배를 든든히 채우고 낚시를 시키는 거니 상부상조에 더 가깝다고 할까.


기후현의 또 다른 명소는 실제로 가보면 별로 볼 게 없는(?) 세키가하라다.


세키가하라는 1600년 10월 21일. 긴 혼란을 거듭한 전국 시대에 종지부를 찍고 그 후의 일본 통치자를 결정지을 대전투가 열린 곳이다.


결과는 다 알다시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문이 몰락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천하를 통일한다.

pLanh1rxh_l2aNUr4UxKUA.jpg 영화 '세키가하라 대전투' 장면(출처; 왓차피디아)

야쿠쇼 코지, 오카다 준이치, 아리무라 카스미 등이 출연한 영화 ‘세키가하라 대전투’는 에도막부 개막의 시발점이 된 이 전투를 다룬다.


기후의 또 다른 자랑거리는 미노 와시(화지) 즉 종이다. 매년 10월에 종이축제가 열릴 정도다. 개인적으로 종이로 만든 전등갓을 사 와 지금도 잘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기후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곳은 시라카와고 고카야마마을의 갓쇼즈쿠리(合掌造り)다.

애니메이션 ‘쓰르라미 울적에’의 배경이기도 하고 일본 드라마 ‘최애’에서 주인공 요시타카 유리코의 극 중 고향으로 나와 더 많이 알려진 마을이다.

IMG_2115.jpg '쓰르라미 울적에' 후루테신사 모델인 하치만신사

갓쇼즈쿠리는 억새를 재료로 경사가 심한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갓쇼라고 이름 지어진 건 지붕의 형태가 합장할 때 손의 형태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갓쇼는 일본어 합장(合掌)을 뜻한다.


눈 쌓인 지붕이 인상적이어서 겨울이 붐비지만 사시사철 관광버스가 줄을 잇는 곳이다.

IMG_2124.jpg 고카야마마을 전경

마을의 해발고도는 500m 정도로 하쿠산(2702m) 같은 고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눈으로 유명한 시라카와고는 연강설량 평균이 972cm, 적설량은 2006년 2.97m 기록한 적이 있다.


그러다 보니 눈 피해를 줄이기 위한 독특한 지붕구조가 시라카와고의 트레이드마크가 됐고 마을 전체가 199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아이슬란드나 덴마크 페로제도 집들의 지붕처럼 지어진 이유나 모양은 유사하지만 그곳은 고카야마 역사마을처럼 114채의 집들이 모여있는 곳은 없다. 뿐만 아니라 갓쇼즈쿠리 자체의 바닥 면적이나 길이도 고카야마마을이 2배는 됐다.

IMG_0921.JPG 페로제도 이스터로이 섬의 산잔디로 덮인 지붕

고카야마마을의 넓고 긴 지붕은 눈이 잘 떨어져 내리게 하는 이유도 있지만 2층에 공간을 많이 주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 공간의 정체는 바로 누에의 집.


예부터 시라카와고는 양잠이 유명해 집 2층에 누에를 키웠기 때문에 넓은 바닥 면적과 높은 천장이 필요했다.

main.jpg 갓쇼즈쿠리 설경(출처:ANA)

한편 숙박시설이나 주차장은 멀리 떨어져 있어서 마을 구경을 하려면 여유를 갖고 산책을 하는 게 좋다.

문제는 시라카와고의 대표적 볼거리인 독특한 지붕을 보려면 마을 위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겨울엔 미끄럽고 여름엔 더운 데다 아주 가까운 거리도 아니라서 약간의 불편함은 감수해야 한다.


하지만 불편함의 몇 배만큼 볼거리를 제공하기에 다리 아픈 건 금세 잊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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