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 도시이야기 '데미지드'
도시는 날씨에 따라 색깔이 달라진다.
태양이 환히 빛나는 날엔 밝음 그 자체가 도시의 모든 색을 뒤덮는다면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부는 날엔 콘크리트나 아스팔트에 반사되는 회갈색이 도시를 약간은 우울하게 뒤덮는다.
우리들 역시 그날그날 기분에 따라 도시를 보는 색깔이 다르고 그로 인해 매일 일상을 누리는 도시의 느낌도 다를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무채색의 대표성을 띈 회색, 그것도 짙은 잿빛을 ‘아름답다’는 단어와 바로 연결시키기는 쉽지 않다.
거기에다 수시로 비가 내려 질척한 느낌까지 있는 도시와의 연결은 더더욱 상상이 가지 않는다.
하지만 모든 것엔 예외가 있는 법. 그중 대표적 도시를 하나만 꼽으라면 단연 영국 스코틀랜드의 수도 에든버러라고 하겠다.
세계기상정보서비스(WWIS)에 따르면 에든버러의 월평균 강우일수는 10일이 넘는다. 한 달에 열흘 이상 최소 1㎜가 넘는 비가 온다는 말이다.
거기에 ‘올드 스모키(Old Smoky)’란 별명답게 회색빛 건물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잿빛이 도시의 아이덴티티가 돼버렸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같은 영국이라도 런던의 건물들과 달리 에든버러의 많은 건축물이 사암으로 지어졌다는 것이 회색도시가 된 가장 큰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중세시대 때 스코틀랜드 왕궁이 있던 에든버러는 도시 자체가 크지 않았다.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공장과 기관차에서 발생하는 시커먼 연기를 사암건물이 다 흡수하다 보니 지금의 색깔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근대에 들어와서 잿빛 건물을 원래의 사암색으로 바꾸고자 하는 시도도 있었지만 도시의 정체성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지금의 모습으로 남게 됐다.
잔혹한 연쇄살인을 다루는 2024년 영화 ‘데미지드(Damaged)’가 음습한 배경으로 에든버러를 택한 건 날씨와 도시의 색깔이 한몫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영화는 흥행에 실패했고 더불어 본의 아니게 에든버러 회색의 부정적 시각을 남기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영화 속에서다.
영화에서도 간간이 나오지만 올드타운의 대표적 번화가인 로열마일만 봐도 잿빛이 주는 우울함은 찾아보기 힘들다.
에든버러성에서 홀리루드궁까지 스코틀랜드 마일(1.81㎞)만큼의 거리라고 붙여진 로열마일은 중세에는 서민들이 다니지도 못했던 거리다.
지금은 스트리트숍에다 전통이 깊은 호텔들이 즐비한 이곳은 에든버러의 머스트고 장소다. 캐시미어가 유명하다 보니 관련 상품을 판매하는 곳이 많다.
조금 걷다 보면 왕관모양의 꼭대기가 인상적인 세인트자일스대성당, 뉴타운으로 가는 프린스가에 위치한 첨탑 모양의 빅토리아풍의 월터 스콧기념비 등이 있다.
스콧기념비를 따라 올라가면 에든버러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신고전주의 양식 기념비가 있는 칼튼힐이 있다.
언제라도 로열마일은 회색빛 도시에서 ‘빛나는’ 곳이지만 특히 여름이면 더욱 화려하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축제를 모아놓은 것 같은 에든버러페스티벌이 8월이면 거의 매일 펼쳐지기 때문이다.
연극, 재즈 & 블루스 공연, 아트페스티벌, 군악대 행진인 밀리터리 태투 등 그야말로 없는 것 빼고 다 있다.
축제의 헤드쿼터 역할을 하는 더허브(The Hub)를 비롯해 음악공연장인 어셔홀(Usher hall) 등 대부분 공연이 로열마일 근처에서 펼쳐진다.
볼거리, 들을 거리가 무궁무진하지만 숙소가 비싼 건 물론 예약 역시 하늘의 별따기인 건 참고해야 한다.
그렇지만 인근 1~2시간 거리에 방을 잡더라도 에든버러의 8월에 동참했다는 것만으로 잊지 못할 추억이 될 것은 분명하다.
골프마니아라면 에든버러의 또 다른 추억을 만들 수 있다.
1764년 세계 최초로 18홀 골프장을 정착시킨 세인트앤드루스가 1시간 거리에 있다.
세인트앤드루스는 전통을 존중해 PGA 메이저대회인 ‘디오픈(The Open)’을 5년마다 한 번씩 개최하는 곳이기도 하다.
경기가 열리는 올드코스는 갑작스러운 예약이 어려울 수 있지만 세인트앤드루스에는 올드코스만 있는 게 아니다.
뉴코스, 캐슬코스, 에덴코스 등 올드코스 말고도 5개 코스가 더 있다.
충분히 링스코스의 즐거움과 도전정신을 키울 수 있다. 굳이 세인트앤드루스가 아니더라도 디오픈대회가 열린 링스코스가 주변에 많이 있다.
숙소를 세인트앤드루스 인근 B&B로 잡는다면 심심찮게 여우를 볼 수도 있는 건 덤.
에든버러에 즐거움이 가득한 기억을 만드는 것만큼 정치 상황을 알고 가는 것도 현재의 스코틀랜드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영국은 4개의 국가(Nation·자치권 지방정부)로 나눠져 있다.
물론 대외적으로는 하나의 나라(United Kingdom)이긴 하지만 월드컵에는 아직도 4개 국가가 개별적으로 출전하는 걸 보면 연합(United)이란 말이 쉽게 이해된다.
에든버러를 중심으로 한 스코틀랜드는 북아일랜드와 결은 좀 다르지만 오랫동안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꿈꾸고 있는 곳이다.
1998년부터 영국 중앙정부에서 반독립 한 자치권 지방정부로 변신했다. 북아일랜드가 개신교와 가톨릭 주민 유혈대립을 평화협정으로 종식시킨 뒤 납세, 교육 등의 자치권이 매우 강화된 지방정부로 바뀐 것을 본떠 이를 뒤따른 것이다. 2014년에는 찬성이 45%에 그치긴 했지만 독립 주민투표까지 실시했다.
이처럼 스코틀랜드 독립을 기치로 내건 스코틀랜드 국민당(SNP)의 약진은 지속돼 왔다.
하지만 스코틀랜드 정당 가운데 최대 의석을 확보하고 있던 SNP가 2024년 열린 영국 총선에서 노동당에 완패하며 입지가 위축되고 반대로 영국 노동당의 영향력은 커질 것으로 보여 독립 역시 먼 나라 이야기가 될 가능성이 더욱 높아졌다.
이래저래 스코틀랜드는 무채색이 대표색이 될 수밖에 없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