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 도시이야기 '나이트 콜'
30년이 다 된 이야기다.
당시 뮌헨에 갔다가 만난 대학 교수에게 과학 기술이라면 세계 최고 수준인 독일의 인터넷 상황이 왜 이렇게 열악하냐고 물었던 적이 있다. (당시 한국은 IT강국으로 부상하며 인터넷 속도와 연결 상태가 지금과 비교는 못하지만 매우 뛰어난 편이었다.)
그 교수는 “독일은 새로운 문명이 나타나면 그 문명이 인간에게 미칠 영향에 대해 깊이 연구를 하고 나서 받아들일지 결정한다. 만약 받아들인다면 어느 정도로 받아들일지에 그 방향과 속도를 정한다”라며 “조금 늦게 받아들여도 문제가 없다면 그 기간 동안 그 문명이 가져올 밝은 면과 어두운 면에 대해 검토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라고 말했다.
교수 개인의 생각인지 실제 독일의 정책 집행이나 학술연구 방향인지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빨리빨리’에 익숙한 한국사람의 입장에서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기억에 남는 말임은 분명했다.
그 뒤로 시간이 흐르면서 세계 곳곳에서 ‘속도’에 저항하는 ‘느림’에 대한 트렌드들이 생겨나는 걸 보면 그 교수의 말이 새삼 와닫는다.
벨기에와 프랑스 합작 영화인 ‘나이트 콜(Night call 원제: La nuit se traîne)’은 열쇠수리공인 매디가 자신의 집인데 열쇠를 놓고 왔다는 클레어라는 여자의 말만 믿고 덜컥 문을 열어주고 여자는 집에 있던 돈을 들고 매디 몰래 사라지면서 벌어지는 운 나쁜 하룻밤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세상 살면서 저렇게나 길고 힘든 하루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돈의 ‘주인’인 조직으로부터 쫓기고 찔리고 총 맞고 체포되는 브뤼셀의 밤 이야기다.
원제 역시 ‘밤이 길어진다’는 뜻이고 영화 초반 클레어를 차에 태우고 듣던 페툴라 클락(Petula Clark)의 노래 제목도 ‘밤은 끝이 없다(La Nuit n'en Finit plus)’이다.
속도에 느림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돌아왔다.
한국은 이제 도심의 웬만한 단독주택도 현관문은 오토도어록이 대부분이지만 세계적으로는 그렇지 않은 나라가 훨씬 많다. 영화에서 보듯 벨기에 역시 마찬가지다.
수도 브뤼셀의 작은 플랫(아파트)의 자물쇠틀은 고색창연하다. 매디는 하나 교체비용이 250유로라고 말한다. 40만 원 정도 되는 고가다. 오토도어록 비용의 3배 이상이다. 열쇠뭉치도 들고 다니기 무겁다.
또 웬만한 문은 한번 돌리는 게 아니라 두 번 이상은 돌려야 문이 열린다. 그런데도 고전적인 방식의 열쇠와 자물쇠가 유럽의 중심이자 유럽연합(EU)의 본부가 있는 벨기에 수도 브뤼셀에서 자연스럽게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는 건 무얼 말하는지 한 번 더 생각하게 한다.
하기야 열쇠뿐이랴. 패스트푸드점의 상징처럼 되어 버린 키오스크는 이제 디지털문해력을 갖추지 못하면 빵을 못 먹는 시대로까지 전환되고 있음을 방증한다.
여러 가지 문화적, 문명적 키워드들이 이합집산되면서 펼쳐지고 있는 현실에서 어떤 것이 맞고 어떤 것이 틀렸는지 알지도 못하고 의미도 없을 수도 있다. 그저 오랜만에 열쇠와 자물쇠뭉치를 영화에서 보니 이런저런 생각들이 떠올랐을 뿐이다.
영화에서 브뤼셀의 도심 건축물이 등장하긴 하지만 흑인 사망 시위로 인한 최루탄가스 등으로 명확한 장소는 드러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인종차별시위, 난민 관련시위 등은 EU 본부 앞에서 진행되지만 밤의 시위이다 보니 브뤼셀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그랑플라스 주변이 아닐까 한다.
그랑플라스에서 1km 정도 떨어진 대관람차(The View)가 영화 배경에 등장하는 데다 대관람차가 법원 옆에 있다는 상징적 의미로 보면 그랑플라스 인근 즉 도심에서 촬영이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이 주변에서 벨기에의 대표적 키워드인 프렌치프라이, 와플, 맥주, 초콜릿, 틴틴, 스머프, 오줌싸개동상 등을 식당이나 기념품가게에서 모두 만나볼 수 있다.
프렌치프라이는 아직까지 프랑스와 벨기에가 서로 원조라고 우기고 있다. 1차 세계대전 때 벨기에에 온 미군이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이들이 감자튀김을 만들어 먹는 걸 보고 그렇게 이름을 붙였다고 하지만 이는 몇 개 가설 중 하나일 뿐이다.
그렇지만 벨기에의 감자튀김에 대한 자부심은 대단하다. 그들은 당연히 프렌치프라이가 아닌 벨기에프라이라고 부르며 8월 1일을 '국제 벨기에프라이날'로 정해놓았을 정도다.
이탈리아 시칠리아 시골에도 벨기에프라이를 파는 곳이 있을 정도니 맛의 차이는 모르겠지만 감자튀김에 대한 애정은 프렌치보다 벨지언들이 큰 것 같기도 하다.
아, 참고로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나오는 브뤼셀북역지역은 치안이 좋지 않기로 악명이 높다. 낮에도 어두운 느낌이니 주의를 기울이는 게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