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이 세상과 사람에 대한 따뜻한 마음을 잃을 때가 있다. 누구에게나 늘 온유한 마음으로 대하고 싶지만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렇게 어둠이 밀려오면, 성경과 기독교 서적들을 읽으며 마음을 새롭게 하려고 노력하지만 나의 생각이나 의지대로 되지 않을 때가 많다.
모든 일에는 과정이 필요하지만, 그 과정 없이 그 자리로 당장 가고자 하는 마음이 들게 되면 내면의 고통은 더욱 커지게 된다.
그런 고통의 바람이 몰아치면 지난날의 나와 현재의 내 모습을 마주해 본다. 지금도 형편없지만 과거에 비해 여러 면에서 성장하고 변화한 모습을 발견하게 되면, 그나마 위로가 되고 다시 앞으로 걸어갈 힘이 생긴다.
기독교에 있어 고통과 시련은 축복이라고 말한다. 기독교 신자가 된 이후에 이전에 고민하지 않았던 부분들이 문제로 다가오고, 변화를 위한 몸부림이 시작된 것을 보면, 그 말이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나에게 있어 수년간 이런 내면의 고통과 갈등이 지속되고 있다. 바람이 불어오다 멈추기를 반복하듯이 나의 내면에서도 동일한 현상이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다.
신기한 일은 이러한 과정 속에서 성경의 말씀이 진리라는 것이 하나씩 깨달아지고, 그에 따라 믿음이 깊어지는 것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예전의 내가 품을 수 없었던 생각을 하게 되고, 할 수 없었던 일들을 하게 되면서 전에 느껴보지 못한 느낌이나 감정이 올라올 때가 있다. 이런 현상들 때문에 소망을 잃지 않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고 따르게 되는 것 같다.
요즘은 평등이나 공정 그리고 정의 등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당연히 평등, 공정, 정의 등이 이 세상의 기반이 되어야 하지만, 나이가 먹을수록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온유란, 이런 모든 이상적인 개념들이 실현되지 못하여 니타나는 불평등, 불공정, 불의를 포용할 수 있는 수준을 의미하는 것 같다.
내가 도저히 갈 수 없을 것만 같은 그 자리에 모든 과정을 건너뛰어 단숨에 닿고 싶다.
그러나 그것은 절대로 허락되지 않을 것이다. C.S. 루이스가 말한, 장난감 병정을 사람으로 만드는 것, 기존의 집을 완전히 부수고 새로운 집을 짓는 것, 그런 과정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다행스러운 것은 하나님은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신다고 한다. 실제로 하나의 허들을 넘은 듯하면 또 다른 허들이 눈앞에 놓이는 상황이 반복되는 것을 보면, 그 말이 사실로 받아들여진다.
그리고 황량하고 어두워졌던 내 마음에 해가 들고 풀이 조금씩 자라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을 보면,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며 인도하고 계심이 느껴진다.
나의 생명이 다할 때까지 하나님이 준비하신 그 허들을 모두 넘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내 마음밭이 아름다운 정원으로 가꾸어질 수 있음을 소망할 수 있는 것은 이렇게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믿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