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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서 소중한 것

2025년 02월 12일 수요일

by 손영호

아들이 소파에서 핸드폰을 보고 있다. 불현듯 뾰루지가 심한 아들의 두피를 확인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머리카락을 이리저리 들추어 보니, 이전보다 상태가 심해져 있었다. 사실 아들이 얼굴 여드름 치료를 위해 병원에 주기적으로 다니고 있었기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었다. 다음 병원 방문일을 확인해 보니, 일주일이나 남아 있었다. 더 심해지기 전에 약국에서 연고를 사다가 발라주는 것이 좋겠다 싶었다.


목도리를 두르고 있자니, 아들이 어디를 가느냐고 묻는다. 아들은 이미 눈치를 챈 상태였기에 그저 확인 차 묻는 것이었다. 연고를 사러 간다고 말하니, 재빠르게 일어나 잠옷 바지에 외투를 걸치고 같이 가자며 따라나선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아파트 출입문을 나서자 나보다 키가 큰 아들이 갑작스레 팔짱을 낀다. 왠지 어색해서 '징그럽게 왜 그러느냐'라고 말은 했지만, 실은 너무나 기분이 좋았다. 이 세상에 중학생 아들과 팔짱을 끼고 다닐 수 있는 아버지가 얼마나 될까 생각하며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약국으로 가는 길은 도보로 약 5분 정도 소요가 되는데, 아들과 나는 그 시간 동안 사소한 대화를 나누며 걸었다. 새벽에 프리미어리그 경기를 볼 예정이며, 배가 고플 수 있으니 햄버거를 사야 된다는 그런 일상적이고 가벼운 대화였다.


어느새 약국이 있는 건물에 도착했고, 건물에 들어서자 로비에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한 남성이 눈에 들어왔다. 오래지 않아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고, 아들과 나 그리고 내 또래 정도로 보이는 그 남성 셋이서 안으로 들어섰다. 아주 어색한 기운이 감도는 가운데 그 남성은 나와 아들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본다. 가끔 그런 사람들이 있기에 눈을 마주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약국으로 걸어가는 길에, 아들이 그 사람 좀 이상하다며 기분 나쁘다고 말한다. 나는 아들이 잘생기고 멋있어서 그랬을 거라고 말해주었고, 아들도 아마도 그랬을 것이라며 농을 치며 받아넘긴다.


약국 옆에는 ‘24시**병원’이 있는데, 24시간은 아니고 자정까지 운영하는 병원이다. 약국을 가기 위해서는 이 병원을 지나쳐야 하는데 나는 이 병원을 지날 때마다 유리창 너머로 사람이 얼마나 있는지 확인하게 된다. 내가 왜 그것을 확인하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늘 같은 행동을 반복한다. 늘 붐비던 병원이 오늘은 너무도 한산했다. 아마도 최근 유행하던 독감이 잠잠해져서 그렇지 않을까 생각했고, 약국에도 사람이 별로 없겠거니 생각했다.


예상대로 약국도 한산했고, 젊은 부부와 아이가 보였다. 아마도 아이가 감기에 걸려 저녁 늦게 병원에 다녀가는 것 같았다. 불현듯 아이들이 어렸을 때 수도 없이 대학병원 응급실에 다녔던 기억들이 떠올랐다. 다른 기억들은 몰라도 아이들을 데리고 응급실에 갔던 기억들은 지금도 생생하다. 그런 생각을 하며 표정에 피곤함이 역력히 드러나는 약사의 움직임을 체크하며, 차례를 기다렸다. 우리 차례가 되어 필요한 연고를 구매하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내가 계산을 마치자, 아들은 약을 외투 주머니에 집어넣으며 햄버거 가게로 가자며 길잡이가 되어 나선다. 가끔 가는 그 햄버거 가게에는 늦은 시간임에도 사람들이 많았다. 학생들, 젊은 직장인들, 그리고 나이가 지긋하신 분들, 정말 다양한 연령층의 사람들이 그 시간에 햄버거를 먹고 있었다. 테이블은 거의 차 있었지만 키오스크에서 주문하는 사람은 없었다. 아들은 빠른 속도로 터치스크린을 두드리며 햄버거를 주문했다. 막내가 햄버거를 먹겠다고 해서 세트 두 개를 주문 했고, 오래지 않아 버거 세트가 포장되어 나왔다.


종이봉투에 햄버거와 감자칩 등이 들어 있고, 음료가 전용 비닐봉지에 담겨있었다. 아들에게 하나씩 들고 가자고 했더니, 자신이 다 들고 가겠다며 한사코 나의 제안을 거절한다. 그렇게 여러 번 말을 주고받다가 아들은 나에게 ‘그냥 가자고, 이 사람아’라고 말한다. 말 자체가 무례하게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오히려 어떤 애정이나 친밀감 같은 그런 느낌을 들게 하는 말투와 표현이다.


그렇게 아들에게 모든 짐을 맡기고 돌아오는 길에, 새로 오픈하기 위해 공사 중인 한 가게에 눈길이 끌렸다. 아들과 가까이 가보니 브런치 가게였다. 음식점이라고 해야 하는지 아니면 카페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그 가게의 이름이 Canadian으로 시작되었다. 아들은 나에게 캐나다에 가봤냐고 물었다. 나는 캐나다는 갈 기회가 없었다고 말했다.


아들은 호주에 가보고 싶다고 말하며, 가족여행으로 가면 안 되겠냐고 묻는다. 왜 가고 싶냐고 물었더니, 호주에 있는 오페라 하우스에서 공연을 보고 싶다고 말한다. 뜻밖의 답변이었다. 아들의 소망을 들어주고 싶지만, 큰 아이가 고등학생이기도 하고 아이 셋에게 엄청난 돈이 들어가고 있는 상황이라서 나중에 여건이 되면 가자고 말했다.


그렇게 아들에게 말을 건네고 나서, 한동안 나의 발걸음을 바라보며 언제쯤 호주에 갈 수 있을지 생각해 보았다. 큰 아이가 대학에 가면 아들이 고 2가 되고, 막내가 중 3이 된다. 그래서 2년 뒤 겨울이 여러모로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생각을 마치고, 몇 년 안에 꼭 호주에 데리고 가겠다고 아들에게 약속을 했다. 아들이 고등학생이 되어 생각이 바뀔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럴 것 같지는 않다. 나 또한 아들의 생각이 바뀌지 않기를 바란다.


집에 돌아온 뒤에도 아들과의 짧은 산책이 여운으로 남는다. 그 여운은 나에게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인지 질문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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