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민주주의에서 자유'민주주의'로 나아가길 바라며
내가 이 책을 어떻게든 끝까지 읽게 만든 가장 큰 원동력은 단 하나. 바로 '자유민주주의'라는 말이다. 1972년 유신헌법과 함께 대한민국 헌법에 등장한 이 말은 아직까지도 헌법전문과 4조에 남아 있다. 이 말을 꼭 박정희, 전두환이나 이명박 윤석열 같은 사람들이 즐겨 쓴다. 정작 '자유'와 가장 거리가 먼 사람들, 자유와 평등이 떼려야 뗄 수 없음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 자유민주주의를 부르짖으며 속으로 반공반공만 외는 사람들. 이 말은 어디서 왔으며 왜 대한민국에 떠도는지, 그냥 민주주의와 자유민주주의는 도대체 뭐가 어떻게 다른지 궁금했다.
먼저 이 책의 주인공부터 소개해보자. 영국의 에드먼드 버크와 윌리엄 글래드스턴, 프랑스의 나폴레옹 1세와 3세 그리고 콩스탕, 독일의 비스마르크, 미국의 링컨과 알렉시스 토크빌이 그들이다. 로마의 키케로와 카이사르도 등장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 자유주의라는 용어는 1811년에 처음 등장했는데 이 말은 정치-경제-종교에서 전부 다르게 쓰였다. 이 책은 주로 정치와 종교 영역에서 자유주의를 둘러싼 많은 갈등과 다툼 끝에 생긴 죽음과 비극, 거기서 비롯한 논쟁과 혼란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설명해 준다.
결론부터 말하면, 자유주의는 아직도 바뀌고 변하는 중이다. 종교의 영역에서, 경제분야에서, 페미니즘이나 사회운동을 하는 세력에서 '자유'라는 말이 가진 환상과 이미지를 자신들 이익에 맞게 혹은 반대세력을 공격하기에 알맞은 모양으로 재단하여 써먹는다. 하지만 고대 로마 이래로 아주 오랫동안 자유주의는 공공선, 시민의 의무, 자기희생 등에 바탕을 둔 도덕적 기획이었다. 개인의 자유와 권리가 자유주의의 중심을 차지한 시기는 기껏해야 오륙십 년이다. 그런데 세계는 '자유'민주주의가 자유'민주주의'를 압도하며 공공선, 공동체는 무너지고 (힘센) 개인의 권리와 (평등 빠진) 선택할 자유만 앞세우며 민주주의 본연의 가치를 잃어 간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지금 세상을 둘러보면 8년 전 저자의 통찰과 경고가 얼마나 적확했는지 알 수 있다.) 자유를 부르짖는 대한민국에서 자유주의에도 역사가 있음을 알고 바르게 판단하는 시민이 늘어나야 하는 가장 큰 이유다.
19세기 자유주의자들은 많은 선택을 했다. 프랑스혁명을 거치며 자유주의자들은 민주주의를 의심했다. 독일에서는 비스마르크의 정치를 지지했다. 미국을 두고는 식민지배를 비판하며 미국의 독립을 주장하다가 나중에 남북전쟁이 벌어지자 흑인 노예제를 옹호하는 말도 했다. (물론 반대 의견도 있었고, 링컨은 유럽에서 미국 자유주의의 상징이 되었다.) 가톨릭-교황은 자유주의에 맞서 100여 년 이상을 싸웠다. 이들에게 자유주의는 민중을 타락시키고 사회를 혼란하게 만드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자유주의자들은 사회주의(그리고 사회주의 혁명)를 매우 경계했다. 사회주의 혁명을 막을 수만 있다면 카이사르가 돌아와 독재를 해도 괜찮았다. 이런 수많은 사건들 속에서 1차 세계대전이 터진다.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스스로 진보주의자이며 자유주의자라 칭한다. 1917년이었다. 이후로 미국이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자유주의'의 상징처럼 되었다. 그렇다면 윌슨이 100년 전에 말한 자유주의는 도대체 무슨 뜻이었을까? 1913년 영국 자유당의 라이언 블리즈는 '영국 자유주의의 짧은 역사'를 썼다. 이 글에 등장하는 자유주의가 윌슨 계열의 민주당원이 미국으로 들여온 자유주의다. 그런데 당시 쓰이던 자유주의라는 용어는 100년 전 프랑스 혁명기에 쓰이던 말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프랑스에서 시작한 자유주의는 그 영향이 점차 줄어들었고 독일 사상의 영향력이 유럽을 넘어 영국에까지 퍼지고 있었던 것이다.
후에 1929년 대공황의 먹구름이 미국을 덮치고 세계를 집어삼킬 무렵 허버트 후버 대통령은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정부는 경제에 되도록 최소한으로 관여해야 한다는 자유방임을 지지했다. 이후 1933년부터 1945년까지 미국 대통령을 지낸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등장한다. 취임하자마자 은행을 휴업시키고, 대규모 공공사업을 크게 벌이며 정부가 시장경제에 깊숙이 관여하고 영향을 끼치며 대공황을 극복한, 미국 역사상 무려 4번이나 대통령에 당선된 유일한 인물. 그도 스스로를 자유주의자로 칭했고 그를 대통령 후보로 지지하는 연설에서는 자유주의라는 단어가 15번이나 등장했다. 루스벨트는 자유주의가 높은 도덕적 토대에 기초한다고 주장하며 재직 기간 내내 사람들 사이의 협력을 강조했다. 자유주의를 믿는 일은 공공선과 협력에서 생기는 사회 효과를 믿는 것이었다. 루스벨트가 제창한 자유주의는 결국 민주주의의 토대 위에서만 가능했던 일이고, 그는 이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민주주의의 토대를 파괴하는 자유주의는 성립불가능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추신: 이 책은 결코 쉽지 않다. 머리말과 맺음말까지 모두 10개의 장으로 이루어졌는데 각 장이 모두 논문 수준이다. Freedom과 Liberty의 차이를 분명히 알고, 프랑스혁명 전후 유럽 역사를 대략이나마 알고, 나폴레옹과 비스마르크를 위인이나 영웅으로만 알고 있지 않다면, 최소한의 배경지식을 갖춘 것으로 하자. 지적 욕구가 충만한 용감한 시민에게 이 책을 강력히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