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글로리'가 남긴 그림자: 응보적 정의의 함정
때론 영화나 드라마가 관객을 넘어 사회를 바꾸기도 한다. 2011년 개봉한 영화 ‘도가니’는 대한민국 사회에 엄청난 파장을 불러왔고, 결국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일명 도가니법)을 바꾸기에 이른다. 2022년 대한민국 최고 화제 드라마 '더 글로리'도 비슷하다. 이 드라마는 우리 사회로 하여금 학교폭력을 바라보는 시선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드라마 방영 이후 ‘학교폭력’하면 바로 ‘고데기’를 연상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처럼, 대중은 이제 모든 학교 내 갈등을 드라마 속 ‘고데기 폭행’과 같은 극단의 범죄행위로 여긴다. 그래서 학교폭력 가해자는 평생 (피해자보다 더한) 고통을 받으며 살아가야 하고, 그렇게 하는 것이야말로 정의롭고 공정하다 여기기 시작했다. 이른바 ‘응보적 정의’의 강화다. 여기에 더해 응보적 정의를 실현하지 않으면 부조리하고 잘못된 사회라 여긴다. 이 드라마가 교실에 남긴 부작용은 생각보다 깊고 어둡다. 가장 큰 문제는 실제 교실에서, 특히 초등학교 교실에서 벌어지는 절대 다수의 학교폭력 사안에는 ‘고데기’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실제 교육부에서 매년 조사하는 학교폭력 실태조사 결과를 살펴보자. 2025년 전체 학생 중 학교폭력 피해 경험이 있다고 응답한 학생은 전체의 2.5%로 최근 6년 동안 가장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피해 유형은 언어폭력이 39%로 가장 높다. 뒤이어 따돌림(16.4%), 신체폭력(14.6%), 사이버 폭력(7.8%)순이다. 2024년과 비교하여 언어폭력과 신체폭력은 약간 줄어들었고, 따돌림과 사이버 폭력은 약간 늘었다. 2010년부터 4개 학교에서 생활-학폭 업무를 담당하며 많은 사안과 사례를 직접, 간접 경험한 나의 입장에서, 실제 교실에서 벌어지는 사례는 다음과 같다. 욕설 한 마디, 별명 한 번 부른 일도 학교폭력으로 신고하면 사안을 접수하여 처리해야 한다. 계단에서 실수로 부딪힌 일로 학교폭력 신고 접수도 받아봤다. 째려본다는 학폭신고는 매년 들어온다.
초등학생의 말실수나 장난 끝에 벌어진 갈등이나 다툼까지 모두 학교폭력으로 처리하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법적으로, 당사자나 보호자가 신고를 하면 담임교사나 담당교사는 이를 절차대로 처리할 수밖에 없다. 초등학교는 특성상 아이들은 매주 스무 시간 이상을 담임교사와 함께 지낸다. 그런데 현행 학폭 제도는 모든 것을 다 보고 들은 교사보다 아무것도 보지 못한 보호자를 더 신뢰한다.
교실에서 흔히 벌어지는-A가 먼저 B를 놀리면서 시작한 장난에서 B가 A를 먼저 때리고 이후 서로 팔과 등을 서너 차례 때린-사안을 살펴보자. 담임교사의 눈앞에서 모든 일이 다 벌어졌다. 담임교사는 두 아이를 불러 이야기를 듣고, 각자 자기 잘못을 반성하게 하며, 서로 사과하고 화해하게 했다. 두 아이는 그 다음 쉬는 시간이 되자 종이비행기를 날리며 재밌게 놀았다.
A아이의 보호자가 이 사안(?)을 학교폭력으로 신고하면서 문제가 시작된다. 자기 자녀의 말로만 상황을 파악한 보호자의 신고는, 매주 스무 시간 아이들과 함께 지내고 상황을 처음부터 끝까지 직접 목격한 교사의 생활지도에 우선한다. 이제 담임교사는 두 가지 민원에 시달린다. 한쪽에서는 학교폭력 사안을 은폐-축소하여 피해학생의 고통을 외면한 파렴치한 교사라 몰아붙이고, 반대쪽에서는 담임교사가 한쪽 학생 편만 들어 무고한(?) 우리 아이를 가해자 취급하려 한다고 쏘아붙인다. 자신도 억울하게 당하고만 있을 수 없다며 학교폭력으로 신고한다고 한다. 이른바 맞폭이다. 교사는 학교폭력 은폐 축소의 가능성이 있으니 보호자의 말이 우선한다. 문제는 이 사실을 보호자 모두가 알고 있다는 점. 법적 공방으로 들어가면, 어차피 교사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자신의 자녀가 상대방에게 먼저 사과했다는 사실은 본인에게 불리하게 적용할 수 있다. "솔직히 잘못을 인정하고, 먼저 상대방에게 사과하는 용기"는 법적 공방 앞에서 자살골이나 다름없다. 거짓말하라 가르치는 것도 모자라 먼저 사과하는 것도 안 된다고 가르치는 꼴이고, 교사에게 아무런 생활지도를 할 수 없게 만드는 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