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이름은

<다시 쓰는 안데르센 세계 명작> 응모작: 인어공주

by 오르트

왕자는 첫눈에 반한 이웃 나라 공주와 성대한 결혼식을 치렀다.

“너는 나를 사랑하니까 너도 내 결혼이 행복하지? ‘길에서 만난 여인’아.”

왕자는 말을 하지 못하는 인어 공주를 ‘길에서 만난 여인’이라고 불렀다. 바닷속으로 가라앉을 때 자신을 구해준 이가 인어 공주임을 왕자는 끝내 알지 못했다. 왕자의 사랑을 얻지 못한 인어 공주는 인간으로서 마지막 밤이 다가왔음을 깨달았다. 뒷모습만 남기고 왕자는 멀어졌다.

절망에 얼어붙은 그녀에게 멀리서 어떤 울림이 번져왔다. 익숙한 소리의 울림이다. 누군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고 있다. 왕자에게서 한 번도 듣지 못한 자신의 이름이다. 소리를 따라간 인어 공주는 물속에 빠진 왕자를 밀어 올려놓았던 그 바닷가에 다다랐다. 하얀 거품을 문 검푸른 바다가 그녀를 쳐다본다. 물고기들의 비늘이 어두운 수면 아래에서 별처럼 반짝인다. 인어 공주는 모든 걸 다 잃어버린 후에 처음 그 자리 바닷가에 섰다.


“목소리를 주면 무엇이 나에게 남나요?”

마녀에게 물었다.

“매혹적인 몸이 남아있지. 하늘거리는 걸음걸이, 사랑스러운 눈빛, 그것만 있으면 인간의 마음을 홀리기에 충분해.”

마녀의 속임수에 말려들어 목소리를 잃어버렸다. 사랑 가득한 바닷속 왕국도 버렸다. 모든 게 마녀 때문이었다. 정말 마녀의 거짓말 때문일까. 그녀는 그 거짓말을 믿고 싶었던 자신 때문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진주로 장식하던 매끈하고 예쁜 꼬리였지만 왕자를 사랑한 다음부터 흉측스럽게 보였다. 꼬리가 두 발이 된 날, 스스로 마녀를 찾아갔던 일이 생각났다. 그날의 두려움과 고통이 떠올라 몸을 부르르 떨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그녀는 바다 깊은 곳을 들여다본다.

왕자의 검은 눈동자에 마음을 빼앗긴 그날이 어제 같다. 바다에 빠진 왕자를 끌어안았을 때 꼭 감긴 눈과 흐느적거리던 몸도 생생하다. 모래밭으로 밀어 올려놓은 후 날마다 왕자 생각에 심장이 타들어 가던 아픔도 여전하다. 발이 바닥에 닿을 때마다 칼날 위를 딛는 것처럼 베인 듯이 아팠지만 참고 견뎠다. 아픔을 참고 차가운 바닷물에 타는 듯 달구어진 발을 식히면서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이 고통이 사랑이라고 생각했었다.

영혼을 바쳐 춤을 추고 애타는 눈빛으로 사랑을 말했지만, 왕자는 알지 못했다. 말을 하지 못해서가 아닐 것이다. 소통의 도구는 언어만 있는 게 아니니까. 당신을 만나기 위해, 내 가장 소중한 목소리를 버리고 가족을 버리고 왕국을 버리고 나의 300년 세상을 버렸다고 그리고 꼬리가 달린 인어라고 진실을 드러냈어야 했는데.


인어 공주는 하늘을 향해 절규한다. 가슴을 찢듯 소리쳐도 들리는 건 파도 소리뿐이다. 새로운 세상, 새로운 사랑을 갈구했고 인간을 사랑했다. 인간처럼 불멸의 영혼으로 신에게 가고 싶었다. 인어에겐 왜 영혼이 없는지 신에게 묻고 싶었다. 이제 인간도 인어도 아닌 거품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만 뼈아프게 다가왔다.

인어는 대자연의 일부라서 영혼이 없다는 할머니 말을 조금은 알 듯했다.

“신이시여, 잘못했어요. 할머니, 아빠, 언니들 미안해요. 해가 뜨면 물거품이 되어 내가 태어난 바다로 돌아가니까 나 때문에 슬퍼하지 마세요.”

인어 공주는 자신의 마음이 바다 깊은 곳 가족들에게 가 닿기를 바랐다.

어둠이 물러가려고 하늘 한쪽이 희뿌예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눈은 어느새 투명해져 있다. 물속으로 걸어 들어가서 암초 위에 올라선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그녀를 휘감는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흐른다. 그녀는 온 힘을 다해 신을 부른다. 눈물이 입술을 적신다. 입속으로 흘러든 눈물이 목구멍을 적시고 심장을 적신 후 노래가 되어 입술로 되돌아 나왔다. 그녀는 자신이 노래를 부르고 있다는 사실조차 의식하지 못했다. 오직 자연으로 돌아가기 위해 기도를 올릴 뿐이었다. 수레국화 꽃잎처럼 푸른 바다엔 물고기들이 지느러미와 꼬리를 흔들며 그녀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인어 공주의 노래는 원래의 목소리보다 더 애절하고 더 아름다웠다. 몇 배나 더 깊이가 있었다. 고통을 초월한 기도가 신에게 가 닿았을까. 신비한 노래는 바닷바람을 타고 멀리멀리 퍼져 나갔다.

새벽녘 왕자는 잠결에 들린 신비스러운 노래에 몸을 일으킨다. 깊은 잠에 빠진 신부를 두고 혼자 밖으로 나선다. 왕자는 노래를 따라 바닷가에 이르렀다. 바다 가운데 암초 위에 한 여인이 서 있었다. ‘길에서 만난 이름 없는 여인’의 파란 바다 빛깔의 눈동자가 거기 있었다. 신비스러운 노래는 그 여인의 입술에서 흘러나왔다. 왕자는 여인의 머리 위에 빛나는 것을 보았다. 난파당할 때 자신이 쓰고 있던 은빛 파티 모자처럼 보였다.

하늘 한쪽의 어둠이 밀려나고 있었다. 어디에서도 들어본 적 없는 아름답고 신비스러운 목소리. 왕자는 너무나 놀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사이 여인은 암초에서 내려와 바다 가운데로 잠겨 들었다. 몸 끝에 달린 은빛 꼬리가 물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달빛을 받으며 모래톱에 누워 있다는 전설 속 인어가 떠올랐다. 몸은 물속에 잠기고 수면 위에는 여인의 머리만 떠서 멀어지고 있었다. 왕자는 여인의 머리가 자신의 은빛 모자로 보였다. 왕자는 여인을 붙잡고 싶었다. 그러나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이름을 몰라 여인을 부를 수도 없었다. 여인의 머리가 물속으로 사라졌다. 은빛 반짝이는 왕자의 파티 모자만 수면 위에 흔들리는 것을 왕자는 보고 있었다. 푸르스름한 빛이 물든 하늘에 새벽 별이 몇 개 깜빡였다.

갑자기 정신이 든 왕자가 ‘길에서 만난 여인아’ 하고 소리쳐 불렀다. 그녀의 이름이라도 알았더라면. 왕자는 안타까워하며 물속으로 첨벙첨벙 들어간다. 바람이 분다. 드넓은 바다, 수레국화 꽃잎만큼이나 파란 바닷물 위에 은빛 모자만 출렁이며 흘러간다. 빛을 내는 바다 거품이 은빛 모자 주변에 공기 방울처럼 떠 오르자 모자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왕자 주변에 바다 거품이 방울방울 맺혔다. 왕자는 그 거품에서 ‘길에서 만난 여인’의 냄새를 맡았다. 이름을 모르는, 말하지 못하는 그 아름다운 여인을 냄새를 맡는다. 불어오는 바닷바람에도 여인의 냄새가 실려 있다. 그녀의 몸에서 나던 신기한 냄새는 바로 바다 냄새였다. 왕자는 주저앉으며 바닷물을 와락 끌어안았다.♣


작가 노트

인어 공주는 사춘기 소녀다. 사랑에 빠져서 듣고 싶은 것만 듣고 하고 싶은 것만 한다. 게다가 인간의 행복과 불멸의 영혼에 대한 환상으로 인어 공주는 자기 비하를 극복하지 못한다. 300년 동안 인간의 착한 모습에서 미소를 지어야 영혼을 얻을 수 있다는 공기 방울 요정의 말은 사뭇 종족 차별적이다.

다른 세상으로 건너가기 위해 가족과 고향과 아름다운 목소리까지 버린 결과는 너무 허무하다. 왕자와 같아지기 위해 다리 대신 혀를 냉큼 잘라 준 인어 공주. 거품이 되기 전 차별은 스스로 만든 굴레라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어떤 헌신적인 사랑이라도 본질을 숨기면 진정한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