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호 네번째 주제 : free(자유주제)
“이름이 어떻게 돼?”
짧은 건배 이후 건물 너머 아크로폴리스의 야경만 멍하니 바라보던 내게 백발의 할아버지가 물어왔다. 누구와도 말을 나누고 싶지 않은 밤이었지만, 혼자 음악과 맥주에 취해 궁상떠는 것보다는 나을 거라 생각하며 대답했다.
“시언이라고 해요. 발음하기 어려우면 션이라 불러도 됩니다.”
“시언? 이름이 특이하네. 나는 닉이라고 해. 한국에서 왔어?”
단번에 한국에서 왔냐고 물어보다니. 대게 외국인을 처음 만났을 땐, 중국인이나 일본인으로 착각을 하기 마련인데, 이름만 듣고 단번에 알아보는 할아버지에게서 왠지 모를 내공이 느껴졌다.
“네 한국인이에요. 어떻게 한 번에 알아보세요?”
“허허. 한국인처럼 영어를 하는걸. 그리고 핸드폰에서 한국어 노래가 나오는 걸 들었어. 한국을 자주 갔었거든.”
“와, 그러셨구나. 그럼 한국어를 하실 줄 아세요?”
“안녕하세요. 이 정도? 하하하. 많이 알지는 못해”
그렇다. 숙소 루프탑에서 만난 닉 할아버지는 그저 여행자였다. 숙소 주인도, 시끄럽다고 항의하러 온 사람도 아니었다. 그냥 나와 같은 투숙객, 게스트 하우스의 한 지붕을 함께 공유하는 사이. 저 우글우글한 18인실의 좁아터진 방에서 몸 누일 자리가 있음에 감사하는 그런 여행자. 짧지 않은 시간 여행을 다니면서 백발의 룸메이트는 본 적이 없었기에 나는 닉 할아버지에 대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혼자 여행 온 거야?”
“네. 세계여행을 하는 중이거든요.”
“세계여행이라... 어렸을 때 생각이 나는구먼. 나도 한때는 여행을 많이 다녔지.”
“여행을 좋아하세요?”
“그럼. 이십 대 중반부터 여행을 다녀서 안 가본 곳이 없어. 아시아는 아마 중국을 빼면 모든 나라에 가봤을 거야. 그중에서도 나는 태국을 제일 좋아해. 태국만 스무 번을 넘게 갔지.”
아니나 다를까 그는 베테랑 여행자였다. 나는 세계여행을 한다며 조금 우쭐대며 말한 것이 부끄러워졌다. 우울감에 젖어 그의 말을 거의 무시할 뻔했다는 사실이 떠올라 애꿎은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닉 할아버지는 여행 이야기를 이어갔다.
“한 번은 미얀마를 갔던 적이 있었어. 무려 40년 전 일이었지. 그때 미얀마는 외국인이 단 한 명도 없었어. 휴대폰도 인터넷도 심지어 차도 없는 나라인데, 관광객이 있을 리가 없지. 그저 숲과 먼지만 가득했던 나라야. 근데, 누구도 낯선 이인 나를 경계하지 않았어. 오히려 무지하게 반겼지. 사람들은 나를 매일 집에 초대해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고 온갖 선물을 줬어. 마치 아메리카 원주민을 처음 만난 옛 스페인 사람들이 그랬을까 싶었다니까. 그런데 사실은 미얀마의 쇄국정책 때문에 사람들이 세상과 단절된 채 살아가다 보니, 바깥소식이 너무나 궁금했던 거야. 그래서 나는 몇 날 며칠을 미얀마 사람들과 부대끼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어. 나는 그들의 친절에, 그들은 나의 이야기에 중독되었던 것이지”
“세상에. 정말 놀라운 이야기에요. 저도 미얀마에 간 적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정말 순수해서 놀랐어요. 40년 전에는 얼마나 더 순수한 사람들이 있을까 상상도 안 가네요.”
“정말이지 그렇게 친절한 사람들이 없었어.”
그 이후에도 닉 할아버지는 놀라운 과거의 여행 이야기들을 아낌없이 늘어놓으셨다. 할아버지는 런던에서 테러 현장에 있어 보기도 하셨고, 라오스에서는 폭포에 가던 중 폭풍우를 만나 타고 있던 지프에서 내려 몇 시간이고 목적지를 찾아가기도 하셨다. 나는 할아버지의 놀라운 모험담에 조금 전 기분이 별로였다는 사실도 잊고 푹 빠져들어 갔다. 할아버지의 지혜와 삶을 조금이라도 더 듣고 싶었다. 달빛이 점점 진해지는 것도 모르게 할아버지의 얘기에 몰입하던 중, 할아버지가 또다시 내게 질문을 했다. 그리고 나의 하루를 엉망으로 만들었던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아크로폴리스는 다녀왔어?”
“아니요... 내일 가려고요. 사실 오늘 가려고 했는데, 다른 유적지에서 매표소 직원에게 인종차별을 당했어요. 종종 있는 일인데도 오늘은 유독 마음이 씁쓸하더라고요. 그래서 오늘 일정을 다 취소했어요. 기분 전환을 해보려고 칵테일 바에 갔는데, 기분이 전혀 나아지질 않더라고요.”
“그것참 여행자 같은 하루였겠구나.”
할아버지는 동정도 공감도 아닌 말투로 무덤덤하게 말했다. 여행자 같은 하루라니. 무시당하고 차별당하는 게 여행자 같은 거라면 하고 싶지 않았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고 있자, 할아버지는 저 멀리 아크로폴리스 아래 근사한 식당에서 밥을 먹는 이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잘 봐. 저런 건 집에서도 할 수 있어. 잘 찍은 아크로폴리스 사진을 보면서 밥 먹으면 되는 거지. 호텔 방에서 자면서 편하게 차 타고 다니고 좋은 레스토랑을 가면서 모든 호의를 누리는 것, 그건 여행하는 게 아니야. 나는 아직도 호스텔에서 자. 내게는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고 그저 잠시 누울 침대 정도만 필요해서 호스텔에서 자는 거야. 새벽녘에 산책하는 걸 좋아하는 나는 잠을 네다섯 시간만 자면 되니까. 하지만 이런 여행은 대가가 따르기 마련이지. 팁을 주고 얻을 수 있는 친절은 당연히 없고 이곳저곳에서 무시당하는 건 일상이야. 몸은 피곤하고 늘 고단하지. 그러니 인종차별 당하는 것은 여행자만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니? 저기 앉아 식사하는 사람들은 아마 인종차별이 무엇인지도 모를 거야.”
“대신 여행자는 무례함에 익숙해질 수 있어. 무례함에 익숙해지면 뭐가 좋은지 알아? 작은 친절에도 감사할 줄 알게 되는 거야. 생각해봐. 지금까지 네가 여행하며 받았던 무례함이 정말 친절보다 많았니? 무분별한 친절을 베푸는 사람은 많지 않아. 미얀마사람들처럼 닫힌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면 모를까. 그럼에도 분명 네 여행에는 그런 친절들이 있었을 거야. 아마 무례함만큼 쉽게 기억나진 않을 수도 있겠지. 그건 아직 네가 친절함에 더 익숙하다는 뜻이기도 해. 늘 존재하던 것의 가치를 아는 것. 그게 여행자 같은 삶 아니니?”
갈 곳 없는 이에게 자고 가라며 소파를 내어주던 친절, 낯선 이를 기꺼이 목적지까지 태워주던 친절, 따뜻한 차 한 잔을 베풀던 친절, 그저 지나갈 때 문을 잡아주는 친절과 더 필요한 건 없냐며 신경 써주던 말들까지. 잊고 있던 익숙해져 버린 친절들이 떠올랐다. 오늘따라 유난히 필요했던 그 작은 친절들은 닉 할아버지의 한마디 말을 접착제 삼아 점점 합쳐지더니 거대한 친절이 되어 나를 위로했다. 수많은 친절을 떠올리면서 낮에 겪었던 무례함은 이미 기억 저편으로 사라져 버린 지 오래였다.
어느새 밤바람이 싸늘해진 게 느껴졌다. 바닥에 찰랑거리는 맥주를 흔들며 닉 할아버지가 겪었을 인생을 떠올려봤다. 다사다난했을 그 삶이,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배낭여행자로 살아가는 그의 마음의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 감히 가늠도 되지 않아 그 수면이라도 들여다보다, 꼭 여쭤보고 싶은 질문이 떠올랐다.
“할아버지는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으세요?”
할아버지는 싱긋 웃으시며 대답하셨다.
“한국과 태국에서 영어를 가르쳐달라는 제안이 왔어. 나는 이제껏 여행을 다니면서 너무도 많은 행운이 따랐지. 특히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과 친절을 받았기 때문에 이제는 내가 베풀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단다.”
나도 닉 할아버지 나이가 되면 내가 받은 것들을 기꺼이 내어줄 수 있을까. 내가 도울 수 있는 이들에게 사랑과 친절을 대가 없이 나눠줄 수 있을까. 언젠가 인도에서 만난 동행 형은 내게 밥을 사주며 이런 말을 했었다.
“너도 나중에 여행하다 열 살쯤 동생 만나면 이렇게 맛있는 거 사줘, 그거면 돼”
친절과 베풂의 대가는 또 다른 누군가를 향한 친절과 베풂. 서로에게 베푼 친절이 바이러스가 되어 퍼져나가는 세상. 하나하나 전염되어 그 친절이 대물림 되는 세상. 그런 세상이야말로 동생들과 자녀들에게 나눠주고 물려줘야 할 것들이 아닐까. 그런 세상이 온다면 차별이 없어지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만 같았다.
그날 밤, 나는 닉 할아버지와 새벽 내내 대화를 나눴다. 일방적으로 내가 묻고 할아버지가 답하는 방식이었지만 그 새벽을 지나면서 마음의 방이 조금 넓혀지는 기분이 들었다. 지금 떠올려보면 닉 할아버지는 아크로폴리스를 향해 외치던 분노의 호소문에 답하러 온 제우스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분노에 차 이미 받았던 친절들을 잊어버린 내게 가르침을 주러 온 친히 내려오신 것일지도.
텅 빈 맥주병을 들고 방에 들어가면서 나는 아테네가 조금 좋아졌다.
from. 시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