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호] 넷째주, 하랑소년 : 이상한 나라의 고래

겨울호 네번째 주제 : free(자유주제)

by 어느 저자

있지, 나 너에 대한 글을 써도 될까?


나는 그 아이의 볼을 양손에 담은 채 눈을 맞추며 말했다. 그리고는 찬찬히 하나하나 뜯어본다. 왼쪽 눈 안에 살짝 숨어있는 쌍꺼풀, 가느다랗게 흔들리는 속눈썹, 적당히 통통한 애교살, 그리고 그 아래에 누군가 톡 찍은 듯한 작은 점. 선명하고 맑은 까만 눈동자에 내가 비치는 순간, 어떤 동굴인 마냥 호기심을 가지고 들어가게 된다. 그러면 나는 이상한 나라에 도착한다. 내가 아주아주 작아져 그곳의 체셔고양이를 찾아야 한다. 그러다 홱, 한쪽 입꼬리가 올라가 팔(八)자의 큰 골짜기를 만들면 나는 그 곳으로 쏟아질 수 밖에 없어진다. 눈에 가득 담아 집에 가져가 꺼내놓고 싶은데, 다 담기 직전에 번번이 그 아이가 웃어버리고 만다. 언제나 기회를 틈타 내 눈에 담길 시도하면 매번 고꾸라져 내가 그 아이에게 퐁당 빠져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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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의 가을과 겨울 사이에는, 이성은커녕 나 자신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며 소맥 석 잔에 눈물 세 방울을 넣어 마시곤 했다. 알딸딸해진 채로 겉옷에 손을 찔러넣고 땅의 자갈을 차며 걸으며 대상이 없는 탓을 하거나, 속없이 친구들을 불러 헛소리를 하며 소리높여 웃는 게 다였다. 어떤 날은 싱숭생숭해서 도서관 맞은편 밴드동아리 동방에 널브러져 친구들에게 의미없는 말들을 던지고 있었다. 동아리 후배였던 고래는 일어서서 베이스를 잡고 있었고, 나는 장난기가 발동해 그 아이의 통 넓은 바지를 부여잡고 장난을 쳤다. 당황한 고래를 본 나도 당황을 했었는데, 그게 어쩐지 연락의 시작이 되었다.


우리는 이야기를 많이 했다. 나만 아는 가수들을 고래에게 신나서 이야기를 하고, 고래는 그걸 하나하나 적어내려갔다. 내 속에 담긴 이야기를 조심스레 꺼내면, 고래는 사뭇 진지한 표정을 하고는 조금 뒤 신중히 고른 단어들로 따뜻한 대답을 해주었다. 그렇게 서서히 스미는 고래를 보며 가슴이 나풀거렸다. 마냥 상상 속의 시야일까 무서워 날갯짓을 거둘 때까지 기다리며 흐린 눈을 했다. 깜깜한 밤에 뚜렷한 색으로 나에게 손을 내밀었던 그 날까지.


그날은 하루의 시작부터 끝까지 아무것도 예상에 들어맞는 법이 없던 날이었다. 먹으려던 소고기가 돼지갈비가 되었고, 모두가 좋아할 거라 굳게 믿고 내밀었던 밀크티가 고래에겐 맞지 않았고, 고래가 싸이의 DADDY를 혼자서도 열정적으로 부르는 것을 보고 아주 놀랐다. 땀을 흠뻑 흘리며 노래방에서 나와서 맥주를 마시며 나는 이런 밤이 다시 올지 몰라 아쉬운 마음에 고래에게 “내가 나중에 우울할 때 이렇게 또 놀자”라고 했다. 고래는 집에 올라간 나에게 잠깐 나와 달라고 했을 때에도 나는 고래가 과자 하나를 건네줄 것이라는 생각밖에 하지 못했다. 정말이지 다 틀린 날이었고, 그 오답들은 그 하루를 특별하게 만들었다.


나를 좋아한다는 말에 나는 이유를 물었고, 고래는 그 질문이 슬프다고 했다. 나는 이런저런 단점을 가진 사람이라고 했을 때, 고래는 그런 나를 좋아한다고 했다. 아, 정말 오늘 하루 예상치 못하겠다. 단 한번도 그렇게 생각해본 적도 없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본 적이 없었다. 우리는 그 추운 겨울에, 따뜻하게 손을 잡았다.


거울 속의 나는 여기저기 생채기가 난 사람이었는데, 고래는 그 생채기 또한 사랑했다. 고래는 나에게 늘 말했다. 누나 스스로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주세요, 당연하지만 내가 가장 못하는 것을 나에게 속삭였다. 내가 어디가 어떻게 대단한지 꼭 이야기했다. 포기하는 법을 알지만 절대 포기하지 않는 점이 멋있어요. 누가 뭐래도 누나가 저에겐 가장 멋있는 사람이에요. 나도 믿지 않는 허무맹랑한 나의 꿈을 말하면, 고래는 그 꿈을 이미 이룬 듯한 사람처럼 나를 대했다. 정말 그럴 것 같아요. 그 때는 이런 모습일 것 같아요, 그쵸? 그리고 이 모든 말이 단순히 붕 뜬 말이 아님을 알리기 위한 듯 손을 잡고, 자신의 말을 새기려는 듯 또렷한 두 눈동자가 내 눈을 흔들림없이 보며 말했다. 고래는 그런 식이었다. 어둠 속에 웅크려 있던 나를 힘으로 이끌어 주기보다는, 내가 있는 바로 그 자리에 빛을 비추어 내가 나를 보게 했다. 누군가 꽃이라고 불러주니 꽃이 되었다고 한 것처럼, 고래가 나를 부르니 나는 내 자리에서 내가 되었다.


그러니까, 이젠 내가 조금은 예뻤다. 이리저리 구르고 다쳐 생채기가 나고 파인 모습의 나는 다른 누군가가 가질 수 없는 나 나름의 모양과 색감으로 예뻤다. 따뜻하게 손을 잡아주었던 고래의 그 온기가 스스로를 미워하던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 나를 바라보는 고래의 눈빛과 나 스스로를 바라보는 내 눈빛이 닮아갔다. 그 온기가, 그 진지함이, 그 흔들림 없는 눈빛이 사람을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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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고 아름다운 나라에서는 구태여 의미를 찾지 않아도 그 자체로 아름답다. 바삐 다니는 토끼와 모자를 높이 쌓은 모자 장수가 그 자리에 있듯, 나는 그곳의 잔디에 벌렁 누워 나 자신으로 존재한다. 나는 이 길로 가볼래, 나는 이 차를 마셔볼래, 나는 연두색이 좋아, 라고 매력적인 동굴에 외칠 것이다. 히죽 웃으며 감히 영원이라는 단어를 눈을 감고 몰래 재채기에 섞어 무책임하게 내뱉어본다. 나를 데려다 놓은 이 세상의 주인인 고래도 동의하길 바라는 텔레파시를 보내본다. 그럼 고래는 의뭉스러운 표정으로 결국 나를 웃기겠지.


그 세상이 담긴, 그 마음이 담긴, 그 아이의 얼굴을 좋아한다. 착하고 아름답고 든든한, 등에 타면 어디로든 데려다줄 듯 헤엄치는 고래를 좋아한다. 까만 두 눈으로 나를 궁금해하고, 빈틈없이 꽉 안아 여기가 가장 안전한 듯 느끼게 하는 고래를 좋아한다. 내가 나로 존재할 수 있게 하는 고래를 좋아한다. 그래서 난 속절없이 쏟아진다. 고래의 살결에 닿으면, 이제는 그게 전부이고 싶어 그 아이의 색깔로 물들어버린다. 때로는 푸르게 자박자박 살아나 꽃을 피우고, 때로는 붉고 뜨거워 콧등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다. 볼을 잡아도, 손을 잡아도, 내 안에서 감당할 수 없이 커진다. 그리고는 묵직한 팔로 가슴속을 둥-둥- 울린다. 그 입꼬리를 향해 또 쏟아진다. 다시 담아낼 생각 없이 그냥 그렇게.



from.하랑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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