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호 마지막 주제 : '편지'
은희님께,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시는지요?
이번 여름은 유독 구름이 낮게 깔려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게 되던 날이 많았어요. 한국도 이제는 동남아성 기후가 되어버린 탓이겠죠. 습하고 갑작스럽게 내리는 비가 종종 내리는 탓에 자주 기분이 왔다 갔다 하곤 했답니다. 높게 쌓인 뭉게구름을 보자면 초록빛으로 물든 거리 곳곳과 풍경들에 마음이 편안해지기도, 세차게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잡생각을 비워내기도 했어요. 은희님에게 이번 여름은 어땠을까요.
얼마 전, 비가 너무도 세차게 내리던 날을 기억하실까요?
너무도 비가 많이 오는 탓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저는 그만 은희님의 글을 떠올리고 말았어요. 어쩔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애써 비를 맞지 않으려 노력하는 저를 내려놓아 보기로 했죠. 우산을 접고, 물줄기 속으로 몸을 던졌어요. 은희님이 그러셨던 것처럼요. 그 순간, 저는 신비로운 경험을 했어요. 너무나 짜증 나고 매섭기만 했던 비가 반가운 존재가 되어버리더군요. 뒷일은 생각하지 않은 채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길거리를 걷는 순간들이 너무도 즐겁게 느껴졌어요. 제가 바꾸지 못 하는 일을 받아드리면서 색다른 풍경을 접하게 된 것이죠. 그때 저는 미세하지만, 행복하다고 느꼈던 것 같아요.
아아, 분명 그런 것이겠죠. 나약한 우리의 존재란 어쩔 수 없는 순간들에 불행하고, 불편하다고 생각할 거예요. 그걸 바꾸지 못 하는 자신을 탓하기도 하겠죠. 하지만, 내가 그럴 수 없음을 인정하는 순간 그건 행복으로 바뀔 수도 있다는 걸 경험했어요. ‘행복’하다는 것은, 나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일과 같기도 하니까요. 쏟아지는 빗속에서 은희님도 조금의 행복함을 느꼈을까요? 그것이 해방감이든 무엇이든, 저는 분명 그 순간 은희님의 글에 맞닿아 있었어요.
은희님은 아실까요? 은희님의 글을 읽다 보면 스스로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는 사실을요. 은희님의 글에는 짙은 공감의 향기가 묻어있어요. 글 곳곳에서 나도 이러지 않았을까 하고 떠올리게 되거든요. 특히나, 기분 좋은 소음을 내는 사람들을 발견하게 되는 순간들이나, 취향이 조금씩 짙어지는 저를 보며 그리고 그 취향을 존중해줄 힘을 가진 나를 보며 ‘어른이 됐다고’느끼는 순간들이 그러했어요. 이번 여름, 저는 꽤 많은 ‘기분 좋은 소음’을 가진 사람을 만난 것 같거든요. 은희님은 어떠실까요? 은희님의 공간이 조금 더 포근해졌을까 하고 기대해보는 마음입니다.
최근 타인과의 관계에 관해 다룬 책을 읽은 적이 있어요. 책에서 그러더라고요, 누군가와 건강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선 나 자신과 건강한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고. 대화는 건강한 관계의 필수요건이지만, 그중에서 제일 중요한 건 나 자신과 대화를 끊임없이 나눠야 한다는 말을 하더군요. 은희님의 글과 말들은 그래요. 스스로와 정말 많은 대화를 나누는 사람이구나, 마음속 깊이 들여다보고 떠올리고 표현해내는 사람이구나 하고 느끼게 해요. 그래서인지 계속해서 은희님의 단편들을 표현해내는 글들이 정말 좋아요. 점점 단단해지고 깊어지는 은희님이 화면 너머로 그려지거든요.
은희님, 은희님은 요즘 들어 관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저는 어려움이 정말 많아요. 오랫동안 잘 알았다고 생각했던 관계가 사실은 일방적이었다는 걸 받아드리기 어렵더라고요. 누군가에게 의존하지 않고 사랑받지 않아도 스스로 건강하게 살아가기란 어려운 일이라고 매번 느껴요. 외로움을 많이 타는 저인지라, 또다시 누군가에게 의존하게 될까 봐 겁나기도 하고요. 은희님은 이럴 때 어떤 방법으로 견뎌 내실까요? 좋은 방법이 있다면 부디 알려주세요.
올여름은 바다가 정말 아름다웠어요. 앞서 말씀드린 낮게 깔린 구름 때문인지, 바다와 하늘의 경계가 모호해져 아름다운 장관을 보여줬던 순간들이 많았거든요. 그래서 더 필사적으로 바다들을 찾아 나섰어요. 바다에 도착해 물속으로 들어갈 때면, 잡생각이 사라지니까요. 저도 관계를 이겨내기 위해서 저를 스스로 바닷속으로 던져버렸던 것이었죠. 저만의 노력이기도 했어요. 은희님이 깊은 바다를 무서워하는 것처럼 저도 혼자가 되는 것에 두려움을 느꼈지만, 파도에 이리저리 쓸려 다니는 나약한 나를 인정하는 건 나쁜 일만은 아니었어요. 앞서 거센 비를 아무렇지 않게 맞는 것처럼 파도에 몸을 싣는 거도 비슷한 일이었으니까요. 울렁거리는 파도를 온몸으로 맞으며 ‘그럴 수도 있겠구나’라고 생각하는 법을 배웠던 것 같아요. 제각각 깨져버리는 파도는 항상 친절하지 않으니까요. 그냥 그대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법을 배웠던 것 같아요. 좋은 파도는 좋은 데로, 나쁜 파도는 그대로 깨져버리게. 뒤집어지더라도 깊이 빠지더라도 다시 수면으로 나오면 되는 일이니까요.
은희님, 신기하게 이렇게 인정해버리니까 저는 파도가 더 이상 무섭지 않더라고요. 혼자 망망대해에 떠도는 일이 나쁜 일만은 아니더라고요.
유난히도 더웠던 여름이 끝나고 선선한 바람이 조금씩 불어오게 되었네요. 생기가 가득한 세상이 조금씩 짙은 빛으로 물들 생각을 하니 아쉬운 마음도 들지만, 이제는 그럴 수도 있다는 걸 알고 있으니 끝을 보내는 게 무척 슬프지는 않은 것 같아요. 정말이지 뜨겁고, 뜨거웠던 여름이었어요. 풀벌레 소리가, 쨍한 햇살이, 짧은 밤이, 가득 찬 모든 것들이 그리울 것만 같아요. 특히나, 은희님의 서늘하고 달콤한 글들이 무척 그리울 것 같아요. 다음 계절에도 계속 읽을 수 있길 기대하고 있을게요.
그럼 이만.
부디, 이 뜨거움이 오래 지속되기를 바라면서.
누구보다 은희님을 응원하는,
from.어느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