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5.0 ㅣ 복수는 차가울 때가 가장 맛있다.
이 작품이 빛을 본 지도 13년이 되어가는 시점에 굳이 또 찾아서 봤다. 사실 오랜만에 <엑시트>를 다시 봤는데, 제작에 류승완 감독이 이름을 올린 것을 이제서야 발견하고 생각하다 보니 대표작 중 하나인 베를린을 보지 않았다는 걸 깨닫고서 찾아 본 것이었다.
첩보 액션이라는 장르에서 보여줄 수 있는 스펙터클함을 모조리 쏟아 부은 것 같은 <베를린>은 장점과 단점이 명확히 보이는 영화라고 할 수 있겠다. 우선, 반전을 거듭하면서 관객의 예상을 배신하고 모든 등장인물을 의심하게 만드는 점에서 첩보라는 장르를 잘 이해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등장인물들이 화기류를 사용할 때도 맨손으로 격투할 때도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장면들로 자칫 지루할 수 있는 서스펜스에 적절히 활력을 불어넣어주는 것도 장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런 장점들이 있는 반면, 부족한 대사 전달력이나 소모적인 캐릭터의 사용 등은 그런 장점들을 갉아먹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 부분에 크게 신경쓰지 않는 관객도 많다는 점을 고려하면, 흔히 내러티브의 완성도가 낮은 영화에 쓰이는 '머리 비우고 보기 좋은 영화'라는 말은 <베를린>에 더 어울리는 말인 것 같다.
*아래는 스포일러가 가득한 리뷰입니다. 저의 부족한 글솜씨로 스포일러 당하기에는 아쉬운 영화이니 아직 시청하지 않으셨다면 먼저 시청하시고 읽으시기 바랍니다!*
이 영화의 최대 단점을 뽑자면, 그 무엇보다도 먼저 대사 전달부터 뽑겠다. 영화 초반, 모든 사건의 발단이 되는 아랍 테러 조직과의 거래라던가 주인공이 아내를 스파이로 의심하게 되는 지점 모두 잘 들리지 않아서 내가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게 맞는지 의심하게 된다. 주인공부터 주변 인물들이 전부 북한 공작원들인 상황에 사투리를 쓴다는 사실 자체를 꼬집고 싶지는 않지만, 비교하자면 마치 옛날 웃찾사 코너 '모란봉 홈쇼핑'을 연상케 하는 케케묵은 북한 사투리 자체가 문제라고 할 수는 있겠다. 극중 국정원 요원 역의 한석규 배우가 구사하는 영어가 귀에 더 잘 들어올 지경이다. 그래도 영어랑 다르게 북한 사투리는 우리말과 통하는 부분이 있는데... 이는 사실상 연기자와 연출자의 역량 부족이라고 밖에 표현하지 못할 것 같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북한 사투리를 쓰는 것으로 등장하는 모든 배우의 사투리 연기가 상당히 어색하다. 차라리 한국어를 아예 모르는 외국인의 입장에서 자막을 통해 본다면 더 몰입이 쉬웠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사투리를 차치하고서 스토리를 보자면... 아내를 첩자로 의심하게 된 주인공은 아내를 추궁하다가 임신 사실을 알게 된다. 이전까지 대화도 없고 서로 사이가 너무 안 좋아서 둘이 진짜 부부는 맞는지 의심했는데, 첫째는 젖도 못 물려보고 죽었다는 부분에서 왜 부부 사이가 거의 파탄에 이르렀는지 조금 이해가 되는 부분이었다. 그런데도 어쨌든 둘째를 가지게 된 둘은 그 사실을 알게 되기가 무섭게 큰 위기에 봉착하는데, 초반에 등장했던 아랍 테러 조직에서 자동화기를 들고 보복을 하러 오지 않나, 같은 편이 누명을 씌워 배신자가 될 처지에 놓인다.
나는 솔직히 주인공이 아내와 도망칠 때 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여자는 이쯤에서 죽겠는데...?'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두 가지였는데, 첫째는 아내가 임신한 사실을 주인공이 알자마자 사건이 터졌다는 맥락 때문이고, 둘째는 이 여자가 뭔가 능동적으로 할 수 있는 행동이 아예 없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모든 스토리의 주인공에게는 행동할 동기가 필요하다. 보통 이런 첩보 액션물의 작법을 따랐다면 그 동기는 보통 복수심이 되기 마련이다. 자신이나 주변인이 다치거나 죽거나 누명을 써서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 행동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베를린>의 주인공 역시 아내와 뱃속에 있던 자식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행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그 예상은 보기좋게 빗나갔다. 주인공의 동기가 자신과 가족의 생존이 된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좋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주인공의 능력치가 상상 이상으로 대단하기 때문이다. 거의 제이슨 본이 연상될 정도로 주변 사물을 이용하는 능력도 뛰어나고 상황 판단력, 체력, 생존력 모두 거의 괴물에 가까운데, 이런 설정의 주인공이라면 혼자의 몸으로는 생존이나 탈출이 너무나도 용의한 상황이 되어버린다. 그런데 이런 주인공에게 현장직과는 아주 거리가 멀고 심지어 임산부인 아내를 데리고 다녀야 하는 미션을 줘버리면 이제 그나마 밸런스가 맞는 것이다.
그렇다고 악역의 능력치가 떨어지느냐? 그렇지는 않다. 주인공에 비하자면 단연히 모자르지만, 일반인의 수준과 비교하자면 가히 대단한 지능을 가졌다. 친절히 설명되지는 않았으나 주인공과 사제지간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는 만큼 악역은 주인공의 전략과 행동 패턴을 무섭게 잘 파악하고 있어서 주인공에게 덫을 놓는 것도 약점을 공략하는 것도 수준급이다.
좋은 내러티브가 만들어졌지만 아내가 가지고 있는 사망 플래그는 여전히 존재한다. 주인공에게 달고 다닐 모래 주머니의 역할을 간신히 획득했지만 이제 정말 주인공의 발목을 잡는 것 이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마저도 주인공이 아내를 버리지 않은 덕이지, 피도 눈물도 없는 진정한 공작원이었다면 바로 죽을 운명이다. 그때부터 나는 아내가 언제 죽을까, 그것만 기대하고 있게 된 것이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뒷부분에 따로 하겠다.
아내는 어찌 보면 당연하게도 악당의 손에 납치되어 붙들리게 되고, 주인공은 그를 찾으러 국정원 요원과 동행해서 구출하러 가게 된다. 이 장면의 액션이 상당히 괜찮은데, 오두막 안에 있는 주인공과 바깥에 있는 국정원 요원의 손발이 딱딱 맞아떨어지는 쾌감이 좋았다. 옥의 티는 폭발하는 장면의 CG가 매우 엉성하다는 것이다. 이건 사실 제작비 부족 이슈가 있다고밖에 볼 수 없다.
그렇게 사람 키만한 갈대밭으로 도망친 주인공과 아내, 그를 쫓는 악당, 그리고 그 악당을 쫓는 국정원 요원의 삼각 구도가 만들어진다. 야외 촬영이 얼마나 힘든 건지 아는 입장으로 이 갈대밭 씬이 가장 공들여 찍은 액션이라고 생각되는 부분이었다. 자동소총으로 연사를 갈겼다가 권총으로 바꿔 들었다가 총알이 떨어지니까 권총을 둔기로 썼다가 결국엔 맨손으로 격투하는 장면을 보고 있으니 이걸 며칠에 걸쳐 찍었을지 감도 오지 않을 지경이었다. 스턴트를 사용하는 방식이 특히 좋았는데, 싸우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을 역광으로 촬영해서 얼굴이 카메라에 비춰지지만 실루엣만 나오게 하는 방식의 촬영법에서 액션신에 대한 고민이 엿보였다.
그렇게 악당은 주인공의 손에 최후를 맞이하고, 임산부인 주인공의 아내도 하필이면 배에 총을 맞고 사망한다. 주인공은 그런 아내를 어떻게든 업고 가보려고 하지만, 이미 죽은 채 축 늘어진 아내를 끌고 가려는 모습은 그의 미련함을 보여주는 듯 안타깝게 비춰진다. 핏기가 가신 전지현 배우의 얼굴을 보고 있자면 처연한 마음마저 들게 하는 것이 배우가 가지고 있는 특성을 아주 잘 활용한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감독의 의도대로 잘 찍혀진 장면이다.
이 장면 자체의 완성도가 높은 것은 맞지만, 아내의 캐릭터 활용법을 보자면 아쉬운 부분이 여실히 존재한다는 것이 내 의견이다. 사실상 이 캐릭터가 보여주고 있는 것은 주인공이 얼마나 인간적인 사람이고 처절한지가 전부이다. 애초에 영화 자체가 아내 역할에게 기대하고 있는 것이 없다. 총탄이 날아오고 당장 자동소총으로 무장한 병력이 하나도 아니고 둘이나 쫓아오는데, 화이트 칼라 직업에 가까운 통역가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겠나? 이 캐릭터를 잘 활용할 마음이 있었다면, 악역의 설정이 지금보다는 협상의 여지가 있는 인간으로 설정해야 했다. 그랬다면 류승범 배우가 이다지도 과장된 연기법을 사용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고 전지현 배우는 공포에 떨고 무기력해보이는 얼굴 이외에도 지을 수 있는 표정이 더 생겼을 것이다.
액션신에도 아주 사소한 아쉬운 점이 있다. 아마 한국에서 이보다 더 나은 액션신을 대보라면 더 없을 정도로 훌륭한 액션이지만, 액션에 각자의 특색이 부족하다는 것이 내가 받은 인상이다. 악역이 머리를 치렁치렁 기르지 않았다면 사실 누가 누군지 잘 모를 정도로 주인공과 악당이 비슷한 체술을 사용하고 있다. 북한에서 같은 훈련을 받았다고 한다면 할 말은 없다. 그런데 그런 설명이 영화 내적으로 있었으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특색이 국정원 요원 역의 한석규 배우에게는 주어진 것을 떠올리면 조금 더 아쉬운 부분이다. 실전으로 맞붙는 싸움보다는 후방의 지원사격을 더 선호하는 저격수에 가까운 액션이 차분하고 전략적인 캐릭터의 성격과 특징을 잘 살려주고 있다.
총평으로 마무리하겠다. 앞서 언급했듯, 장점과 단점이 명확히 있는 영화다. 망설이지 않고 시원하게 진행되는 스토리와 액션은 감히 한국 영화계의 상위에 드는 영화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액션신을 보면서 내 몸이 다 아픈 것 같은 현장감을 느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굳이 언급하지 않았지만 대한민국, 북한, 미국, 이란 등 각국의 정치적 상황과 관계를 표현하는 것은 재치있게 느껴졌으나 인상적일 정도는 아니었다는 감상이다. 이러나 저러나 고생하면서 찍은 연기자와 제작진의 수고가 화면 밖으로까지 느껴지는 완성도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덧붙여
모델 출신 박정남 배우의 활용법이 아주 뛰어났다고 생각한다. 희대의 괴작 <미스터 주>를 본 입장에서 박정남 씨가 등장하는 순간부터 속으로 '제발 대사는 하지 마셨으면'하고 빌던 내 마음을 알아챘는지, 영화에서 박정남 씨는 대사가 아무것도 없다. 모델 출신임이 여실히 보이는 외모로 그냥 서있기만 하셔도 이미 비주얼적으로 카리스마가 충분하다. 류승완 감독의 통찰력이 돋보이는 지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