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그렇게 어려울 일인가
나는 어디가 잘 난 자식은 아니었다. 공부를 잘한 것도 아니고, 부모의 속도 좀 썩힌 딸이었다.
우리 가족이 20년 전쯤 미국으로 이민을 갔는데, 나만 돌아왔었다. 그래서 그것으로도 부모마음을 졸이게 만든 딸이었다.
이름을 알만한 대학을 간 것도 아니지만, 엄마는 자식을 대학에 보내고 싶었던 것 같다. 나는 전공도 뭘 정해야 할지 모를 정도였는데 엄마는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언제나 유망직종이라는 사회복지로 전공도 정해주었다.
그러나 대학교를 입학한 뒤, 다 같이 떠난 이민길에서 나만 싫다며 돌아왔고, 그 덕분에 7년 만에 졸업했다. 성적도 좋지 않았고 취업도 쉽지는 않았으나 전공 탓인지, 크게 눈을 높게 가지지 않은 탓인지 졸업 후, 그 해 가을쯤에는 취업도 했었다.
그래도 엄마가 정해준 전공이 잘 맞았고, 그 덕분에 취업도 한 거라 생각됐다.
그저 대학만 가면 되듯이, 취업만 하면 되는 것이라 나는 부모의 최저의 기대를 충족했다. 취업을 했더니, 결혼을 하기를 바랐고 그런 나이였기에 결혼을 하기 위해 노력을 했다.
나는 효녀는 아니었으나 평범에 속한 사람으로서 부모의 기대를 저버릴 수는 없었던 것 같다.
나는 항상 세상이 정해놓은 골, 목표에 맞게 살도록 세팅이 되어있었다.
미리 노력하지는 못했지만, 임박해서는 목전에서 벼락치기하듯 나름 노력을 하고, 목표는 이루었다.
그래서인지 큰 불만도 없었고, 처해진 상황이나 이뤄낸 것들에 대해 잘 순응하며 지냈다.
그러나 결혼을 위한 만남은 쉽지 않았고, 만나는 사람들은 그 나름의 나에 대한 기대치가 있었는데
나는 그것들이 실제 내 모습은 아닌 것 같았다.
얘는 이래서 이상하고, 쟤는 저래서 이상하고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다 서로 맞지 않았다.
그런데 동호회에서 만난 남편은 다른 남자들과 다르게 크게 거슬리는 부분이 없었고, 자상했고, 다정했다. 그런 점이 끌려 나는 그에게 먼저 고백을 했고 만나게 되었다.
그러다 어느 날 그 당시 남자친구였던 남편이
우리가 2년 뒤에도 만나고 있다면.. 이라며 말을 꺼냈는데,
나는 서로 아니면 헤어졌을 테고, 괜찮다면 결혼을 했겠지, 2년 뒤까지 연애를 하고 있는 일은 없을 거라는 말에 우리의 결혼은 급 진전이 되어 그해 12월에 결혼을 했다.
결혼을 했더니, 미리 예상되는 바처럼 이번에는 출산을 바랐고, 우리는 머리를 모았다.
그때까지는 피임을 했었다. 남편은 나를 만나기 이전부터도 아이는 낳지 않을 것이라 했었지만, 모두들 알다시피 부모들의 마음은 그러하지 않았다. 결혼한 지 2년이 넘어가자 시부모님의 바람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그러니까, 우리 일단 시도는 해보자. 딱 3달만, 그리고 자연적으로 임신이 안되면 그때는 거기서 그만하기로 했고, 누가 원인인지를 알아낸다던지 자연임신 외에 노력으로 아이를 가지는 행동은 하지 않기로 합의했다.
그리고 각자 집에는 당신들의 자식이 "하자"라고 말해서 더 이상은 욕심내지 못하도록 입을 막고, 서로를 보호해 주고 둘이 살기로 꽤 세세하게 합의를 했다.
그러나, 시도를 하자마자 아이가 생긴 것이다. 이런 걸 기대한 건 아니었는데, 단박에 생기자 이때껏 그렇게 구상을 한 것이 무색해졌다.
그렇게 아이는 세상에 태어났고, 남편은 시댁에 한 명 더 낳으라고 하는 순간, 도망을 가서 숨어버릴 거라고 시부모님의 입을 막았다.
그렇게 나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이게 효도인가 라는 생각을 했었다.
양가 모두 우리가 아이를 낳고 잘 살아가는 모습에, 모두 행복해했었다.
대단하게 잘난 것 없는 인생이 결혼과 출산만으로 너무나 행복해하는 그들의 모습에 내가 한 최고의 효도 같았다.
이로써 내 인생도 순탄히 평범의 길로 들어선 것 같아, 안정감도 느꼈다.
그래서인지 장례식장에서 너무 슬프게 우는 친정가족들의 모습에 그냥 나는 절로 미안하다는 말만 나왔다.
내가 미안하다고 이렇게 슬프게 만들어 미안하다고.
그저 평범하게 무탈히 사는 것이 제일 어렵다는 걸 나이가 들수록 알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