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정아빠에게도 찾아온 암통사고

교통사고처럼 갑자기 암이 온다는 암통사고란다.

by ogi

남편이 투병 중 일 때 이야기다.


친정아빠가 참기 어려운 고통, 통증이 와서 119를 부르느냐, 응급실을 가야 하나 했다는 것이다.

우리 집 식구들은 통증을 잘 참는 편이고, 아프다는 말도, 안 좋은 소식도 전하지 않는 편이다. 그런 아빠가 저 정도였다는 것은 정말 심한 고통이었다는 것이다.


친정식구들은 남편이 아픈 것을 몰랐고. 내 아이가 아직 어렸고 내가 바쁘다고 생각했기에 친정에서도 아빠의 암 진단이 거의 확정일 때, 그것도 이모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


이모는 아빠가 전립선 암인 것 같다며, 요즘 병원 예약 잡기가 쉽지 않으니 미리 전립선 암 치료로 유명한 병원을 예약하라고 하셨다.


나는 이모의 말씀대로 대형병원을 예약했고, 아빠는 전립선 암이 맞았다. 골반, 척추뼈, 갈비, 어깨뼈까지 뼈 전이가 많이 진행된 상태라 중입자 치료에는 해당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래도 포기하기에는 이르다며 호르몬 치료로 시작해 보자고 하여, 2번 정도는 호르몬 주사 치료를 받았다.


병원의 진료 스케줄은 교수님의 진료일과 시간을 맞춰야 하기에 우리가 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남편과 아빠의 진료일이 겹치기도 했다. 나는 아침 일찍 남편의 진료를 보고, 항암주사를 맞는 남편을 보고 강남에서 신촌으로 넘어가서 아빠의 진료를 같이 보고 다시 남편의 병원으로 돌아온 적도 있었다.


아빠는 남편의 투병을 몰랐지만, 아빠의 암 진단을 같이 살고 있는 남편에게 숨기기는 어려웠다.


남편은 아빠의 암이 상당 부분 진행되었음을 듣고 친정아빠와 나의 앞날에 대해 많이 낙담했다. 그는 그 상황에서도 나에 대해 걱정했다.


자신도 힘든 시간과 아픔을 알기에 더 슬퍼했다. 아빠의 소식을 전하는 나도 슬펐고 그가 힘들어했기에 미안했지만 어느 쪽에서도 슬픈 내색은 하기 어려웠고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일들만을 찾아서 할 뿐이었다.



나는 처음 아빠의 암이 많이 진행된 것을 알고, 무슨 마법적 생각이었는지, 아빠는 죽고 남편은 살겠구나 싶었다.


아빠의 상태가 더 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암은 종류와 나이에 따라서도 달랐다.


비뇨기 암 센터는 종양내과보다는 더 연령대가 높았다. 암도 노화에 따라 진행이 더디 진행되기도 하고 어르신들은 뇌전이나 뼈 전이상태에서도 오래 지내시는 분들도 있다고 했다.


결과적으로 아빠는 아직도 암은 있지만, 그럭저럭 잘 지내고 계신다. 운전도 하시고 적절히 생산적인 일도 하시며. 진통도 그렇게 심하지는 않으신 상태로, 정말 다행이고 감사한 일이다.


남편의 뇌전이를 계기로 아빠에게도 남편의 투병을 알렸고, 남편의 그간의 힘든 시간을 듣고, 보고는 아빠는 항암치료는 하지 않으셨다.


정확히는 호르몬치료 2번 만에 이제는 효과가 없다며 항암치료를 해야 한다고 해서 얼떨결에 1번은 항암치료를 받으셨다. 그러나 그 한 번을 받고서의 아빠의 느낌은 사는 것도 죽은 것도 아니라고 하셨다. 죽을 때 죽더라도 이렇게 지내는 것은 산다고 보기에는 힘든 것 같다며 더 이상은 원하지 않는다고 하셨다.


남편은 힘들어도 수술과 항암치료가 잘 되면 기대여명이 3,40년은 더 얻을 수 있는 젊은 나이였기에 힘들어도 그것을 했다지만, 친정아빠는 내가 이것을 해서 얻는 수명이 얼마나 될 것이며, 그렇게 얻은 수명과 시간이 이런 상태라면 얻고 싶지 않다고 하셨다.



나도 남편의 그간의 과정을 보지 않았더라면, 아빠에게 무조건 항암치료를 하자고 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남편의 힘든 여정을 봐왔기에, 나조차도 내 마지막은 어디까지 할 것 인지에 대한 생각이 들었기에 아빠의 선택을 말리지 못했다.


친정엄마는 아빠의 암진단을 듣고, 치료를 다니다가 어느 날 다 같이 가족사진을 찍고 싶다고 했다.


부연설명은 안 했지만 아빠가 있을 때 다 같이 남기고 싶다는 뜻 같았다.


남편은 투병 이후에는 카메라에 자신을 잘 담지는 않았지만, 착한 그는 친정엄마의 바람을 모른 척할 수는 없었던 것 같다.


그렇게 우리는 가족사진을 찍었고, 남편은 삼각대를 들고 공원을 찾아 우리의 모습을 담았고, 다시는 같은 구성원이 찍을 수없는 가족사진을 남겼다.


그 당시에도 남편이 먼저 떠날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고, 다들 속마음은 어떠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사진 속 우리는 모두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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