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편
그렇게 5년의 결혼생활이 지나고, P는 A에게 어떤 서류를 내밀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해가지 않았지만, A가 알아볼 수 있는 확실한 단어가 있었습니다. Divorce. 이혼이었습니다. 그렇게 A는 P의 집을 나오게 되었습니다. 아이들도 데려올 수 없었습니다. 직업도 갈 곳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간신히 살 곳을 렌트하기는 하였으나 재산분할도 받지 못했기 때문에 한 달 벌어 한 달 먹고 살기도 쉽지 않았습니다.
P가 변호사를 고용해 써온 서류의 대부분을 A는 알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변호사 사무실에 끌려가 알지도 못하는 말에 억지로 고개를 주억거렸습니다. 그래야 아이들을 볼 수 있다는 P의 말 때문이었습니다. P 하나 믿고 이역만리 먼 땅까지 와서, 행복한 생활은 해보지도 못하고 이혼 당하는 것이 억울했지만 자기 편 하나 없는 이 곳에서는 방도가 없었습니다.
A는 법원에서 여러 번 문서가 왔지만 내용을 알아볼 수 있는 방법도 없었습니다. 우체부에게 고개를 무조건 주억거렸습니다. 어떤 절차가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자신이 나가서 바보같이 앉아 있는 것이 오히려 좋지 못할 것이라고 느껴졌습니다. 그렇게 A는 이혼하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을 보여주겠다는 P의 말은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P가 보여주지 않으면 아이들을 볼 방도가 없었습니다. P는 A와 아예 연락을 끊었고, 이사를 하였는지 간 곳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아이들을 그리워하는 중에도 A는 먹고 살아야 했고, 조금씩 영어를 배워나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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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주지를 옮기면서 한인커뮤니티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었습니다. A가 예전에 한국에서 미국을 꿈꿨던 것처럼, A는 다시 한국을 꿈꾸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돌아가는 것은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그렇게 A는 미국에 정착하여 비로소 홀로서기를 하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다시 사랑도 하게 되었고, 재혼도 하였습니다. 첫 결혼의 실패에 겁이 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지만 어찌저찌 둘이 함께 버텨나가며 가정을 꾸려나갔습니다. 아이도 생겼고, 경제적으로 안정되었습니다.
P와는 이혼 후에 연락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없는 사람인 양 묻고 살았습니다. 아이들이 보고 싶기는 했지만 찾을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35년이 흘러 한국으로 돌아와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한국에서는 A의 남편이 아직도 P로 기재되어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사실 A와 P는 대사관을 통해 한국에도 이혼신고를 하여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 사실을 A는 미처 몰랐고, P는 다시는 한국에 갈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이미 수십 년 전 끝을 맺은 혼인관계가 아직도 한국에서는 끝이 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A는 오래 전에 파탄이 난 혼인관계를 지금 다시 자기 손으로 끝내기 위해 변호사를 찾았습니다. 현재로는 판결을 통해 이혼을 하는 방법 밖에 없었습니다. P와는 끝내 연락이 되지 않아 공시송달로 진행된 이혼 소송은 7개월이 걸려서야 끝났습니다. A는 P와의 관계에서 비로소 자유로워졌습니다. 이혼 시에 감정적, 금전적인 부분을 정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절차적인 것을 잘 마무리 짓는 것도 중요하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