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결여
건너서 대학원의 이야기를 듣곤 한다. 몇 번 주제로 나왔던 학풍의 유행에 대한 이야기였다. 대학원 안에서 유행하는 스타일이 있고 그 스타일에 맞지 않는 연구주제를 추구하면 배제한다고 들었다. 내 영역이 그곳과 겹치지 않는 것은 의외라고 할지 당연하다고 할지 모르겠다.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다는 말이 있다. 대학원이라고 특별히 더 숭고하거나 고상하진 않을 것이며, 지식과 지능이 구조로부터 인간을 자유롭게 만들어주지도 못할 것이다. 올 한 해가 특히 그 사실을 더 확인하게 만들어주기도 했다. 그럼에도 정도가 있을 것이다. 나는 보다 순도 높은 구조 저항성을 대학원에 기대한 것 같다. 당연히 내가 학문에 대해 갖는 판타지일 뿐이며, 구조를 연구하는 곳이니 당연히 더 그럴 거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무엇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내 지능이나 사유가 원활하지는 않다. 현재 내 마음에 더 와닿는 영역, 관심 가는 영역은 결여의 학문이고 무언가를 열심히 만들고 적립해 나가는 것보다는 멈춰 서서 애도하는 것을 선호한다. 늙은 것일까. 지식의 축적도, 사유도, 글쓰기도 하지 않는 동안도 애도만큼은 하게 된다. 애도가 즐겁다고 하면 무언가 이상한 표현이 되긴 하지만 나에게는 보다 즐겁고 쉬운 것 일터다. 청개구리로 살아온 성격상 대학원에 갔다고 한들 나는 적응하지 못했을 것이다. 손에 닿는 대로 물어뜯는 나의 성질을 받아줄 만큼 감정적인 곳이 아니며, 정해진 룰 대로 공부해야 된다는 사실에 대해서 나는 반감만 느끼겠지. 더 이상 멋들어진 의미추구도, 가치도 없이, 무의미에 좌절하지도 않으면서 방황하는 지금 나는 어떤 사람이고 무엇을 해야 하는가. 무슨 욕구를 가지고 있으며 어떻게 충족해야 하는가. 알 수 없다.
그 많은 언어가 권력을 위해 기능한다는 사실은 슬픈 것이다. '아마추어처럼 왜 그러나, 다들 알고 있는 것 아닌가'라고 두리뭉실 넘어가는 핀잔들은. 나의 피해의식을 건드리는 많은 기만이 있다. 교묘하게 무게를 줄인 과자가 그렇고, 외면되는 염전 노예주가 있으며, 위계를 확보하기 위해 마주치자마자 뾰족하게 나오는 말 한마디가 그렇다. 왜 속은 사람이 어리석고 잘못된 것처럼 만들어가는 건가. 왜 우리는 물고 뜯는 걸 장려할 정도로 궁지에 몰려있나. 이미 충분히 지쳤고, 먼저 굴러 떨어져서 죽은 시체가 발에 걸리는데도 왜 반복하게 되는가.
여기서 나 역시 자유롭지 않다. 매일매일 나도 무언가를 외면하고, 무언가를 기만하고, 착취와 이용을 하면서 목숨을 부지한다. 내 성찰은 나에게 위험하지 않은, '말할 수 있는 부분까지만' 기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동안 해온 것들은 무엇이 되는 걸까. 결여를 직시하고 실천윤리를 찾고 애도해 온 시간들은 정면승부로 고지를 점령할 수 없기에 먼 길을 돌아온 권력획득의 합리화에 불과했던 것일까. 그 안에 선의와 호의, 사랑과 빛 같은 것들은 있다면, 어느 정도의 비율로 존재했을까.
위의 고민과 다 통하는 것이다. 나는 실용적인걸 좋아한다. 결론이 나야 하며 무엇을 할 수 있고 해야 하는지 명쾌해지는 게 좋다.(불확실하며 할 수 있는 게 없고 방황해야 한다는 결론도 명쾌한 것이다. 도출이 될 수만 있다면야.) 관념론적 면모를 마냥 부정하고 싶지도 않다. 이유가 없으면 움직이고 싶지 않다. 변해가는 나 자신은 어떤 방향으로 살아가야 될까. 어느 정도면 내 안의 괴리나 분열 없이 잘 통합된 채로 만족스러운 선택을 해나갈 수 있을까. 나는 나를 납득시킬 수 있는 서사를 찾아서 또 떠나야 할 시기가 온 것이다. 또 다른 별이 밤하늘에 떠오를 것이고 별에 이름을 붙일 때까지 이 배는 파도를 따라 헤맬 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