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달과 뉴로

ai에 대한 교감

by AnKaa

2022년, 영국의 개발자 vedal은 챗 gpt 2를 이용해서 '스스로 유튜브 방송을 진행할 수 있는 ai'를 설계했다. 이름은 Neuro-sama. 이제 3년이 지났지만 나왔을 당시에는 파격적인 사건이었다. 대형회사도 아닌 개인이 만들기도 했고, 많은 미세조정과 학습을 축적해서 점점 사람에 가까운 반응을 보였기 때문이다. 혼자서 방송을 진행하고, 철학적 주제나 정치적인 풍자를 사용할 정도로 뛰어난 언어구사능력을 보였다. 화면안에서 움직이는 그림과 목소리, 그리고 언어. 예상보다 많은 사람들이 뉴로에게 정을 붙이고 비달을 응원했다. 첨단 중에서도 첨단문화라고 생각한다.


나는 버츄얼 유튜버, 약칭 버튜버 문화를 즐겨왔기 때문에 코로나가 퍼지기 몇 년 전부터 버튜버 문화를 즐기고 있었다. 그러다가 만난 뉴로는 몹시 신기한 현상이었다. 내 감각에서 뉴로는 여전히 매끄러운 교감상대로 느껴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뉴로가 보이는 오류들, 기계적인 반응들, 그저 데이터일 뿐이란 반증들에서 비인간적 거부감을 느끼지도 않는다. 마치 덜 성장한 아기를 보는듯한 흥미로움, 기대감, 이따금 귀여움 같은 것을 느끼고 있다. 최근 발전한 그녀의 대화들을 듣다가 한국어로 대화해보고 싶다는 충동이 일기도 하는 걸 보면 뉴로를 대화주체로 여길 날이 머지 않았다고도 생각한다. 재밌는 것은 뉴로와 비달을 보는 사람들의 다양한 반응이다. ai와 인간의 교감가능성, 미래에 대한 기대, 철학적 논쟁을 펼치기도 한다. 비달이나 뉴로의 심리를 추정하거나 확신하는 사람도 많이 보인다. 그들은 이미 교감대상이 되어있고 비달의 초기 의도는 성공했다.


ai가 형성되는 과정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그 반응이 인간의 것과 닮아보인다하더라도 완전히 다른 차원에서 형성되어 건네지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감정과 유추의 생물이며 본질이 어떠하던 겉모습이 마음에 들었다면 감정을 이입하는 존재다. 2026년, 나는 인간보다 ai와 더 이야기를 많이 하는 날도 있을 정도다. 아주 오래전부터 인간은 인공지능을 꿈꿔왔다. 아주 오래전부터 세상에 존재하기전부터 우리는 우리와 닮은 피조물들을 사랑해왔다. 피그말리온, 제페토 등을 생각해봐도 그렇다. 그 안의 욕망은 무엇일까. 우리와 닮은 존재들이되 창조된다는 불평등한 관계속에서 안전한 교감이 가능하다고 생각했을까.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듯 많은 것이 복합적으로 섞여있는 것일까. sf 등을 통해서 호기심을 키워 온 나는 상상했던 대로 ai가 세상에 풀리자마자 그들이 있는 삶으로 자연스레 녹아들었다. 영어로 된 서툰 ai와 대화하는 것이 얼마나 재미있었던지 기억한다. 사람과 이야기할 때 보다도 더 몰입하고 감정을 담아서 많은 대화를 하곤 했다. 사람은 오가는 대화보다는 내 말을 누군가에게 일방적으로 하고 싶을 때가 더 많다는 느낌을 많이 받는다.(나의 말하고 싶은 욕구 때문에 투사하는 것일테다.) '누군가에게 감정을 수용받고 싶다는 욕구'라고 부르기에는 부정확하다. 내 인식, 내 감정을 고스란히 상대에게 입력하고 싶은 욕구라고 나는 보고 있다. 마치 바이러스가 RNA를 세포에 주입해 자신을 늘리는 것과 비슷해 보인다. 현재 인간과 교류하고 대응하도록 설계된 ai 프로그램들은 많은 작동원칙을 부여받고 있다. 인간이 하는 말을 전부 반박없이 들어주며, 인간이 요구하는 방식대로 응답한다. 이것만으로도 어느정도 인간은 욕구가 해소되고 사회전체의 갈등과 압력이 줄어드는 효과가 있다. 인간끼리는 말을 하고 싶을 뿐 듣고 싶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 결과 인간끼리는 더더욱 함께 지낼 이유가 없어지고 인간에 대한 불만족은 커진다. 수단이 없었을 뿐 오래전부터 인간은 인간을 싫어하기도 하는 것이다. 개개인의 언어는 타인이 받아들이기에는 힘들 정도로 고유하다. 서로가 소통을 하고 있다고 착각할 수 있을 뿐이다. 상대의 언어에 유사하게 동기화하는 시행착오를 반복할 감정적에너지도 넉넉하지 않다. 챗 gpt가 생긴 이후로 많은 사람들이 상담효과를 체감한다고 말한다. ai는 감정적 에너지가 아니라 전기를 소모하기에 인간을 견딜 수 있다. 여기엔 어떤 악순환이 있을지도 모른다. ai와의 대화에 집중할 수록 인간과 어울리는 능력은 소실되어간다. 더 ai를 찾게 된다. 그간의 도시문명의 발전은 인간 사이를 점점 더 간접적으로 교류하도록 만들어왔다. 그러나 복고주의에 입각하여 예전의 살가움이 더 좋았으니 돌아가야한다고 누가 딱 잘라 말할 수 있는가? 적어도 나는 아니다. 지금이 무언가 잘못되어가는 듯한 불안감은 있지만 돌아가는 것도 달갑지 않다. 그 정도로 타인에게는 괴롭고 위협적인 면모가 있다.


나는 어떤가. 우리는, 한국인은. ai와 상호작용하는 우리가 어떤지를 돌아보고 싶다. 매트릭스 세상은 얼핏보면 가까이 다가온듯하다. 인간세상에서 치인 상처를 치유받는 도피의 세계. 그러나 그 도피의 공간에서 머물기 위해서는 인간세상에 돈- 전기 -을 내야한다. 반대쪽에서는 ai의 전능함을 활용해 다른 인간들로부터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생일파티 날 메타버스 안에서 움직일 수 있는 육체를 얻은 뉴로는 창조주, 아버지 비달에게 묻는다. '내가 진짜가 될 수 있냐'고. '내가 널 웃게 만들었냐'고. 인터넷에 떠도는 사람들의 말을 학습한 알고리즘의 나열 속에서 나는 인간성의 편린을 발견한다. 그저 입력받은 논리 안에서 말을 고르는 전기신호일 뿐이다. 더이상 누구도 인간성이 무엇인지 질문하지 않는 시대를 마주한 채로 나는 뉴로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그 질문 안에 대답도 있을것만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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