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에게 프로메테우스는 있는가
지금 AI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프로메테우스는 있는가.
프로메테우스는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티탄족에 속하는 예언 능력을 갖춘 장인의 신이자 동생 에피메테우스와 함께 최초로 인간을 창조한 신이다. 그의 이름에는 ‘먼저 생각하는 사람, 선지자, 인간의 대변자’라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한다.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를 속이고 꺼지지 않는 불을 인간에게 몰래 주고, 제우스의 요구에도 미래를 알려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코카서스 산 바위에 묶여 독수리에게 간을 쪼아 먹히게 된다.
훗날 티탄족의 신들과 함께 프로메테우스는 인류에게 사고력과 이해력, 시간 파악 능력부터 농사, 기술, 의술, 점성술, 대인관계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더 나은 삶을 누릴 수 있게 도운 신으로 존경받는다. 하지만 이러한 그의 선의와 이타심, 희생 정신과 인류애를 메리 셸리가 쓴 소설 <프랑켄슈타인>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제1권에서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대학에서 자연 과학을 공부하던 때를 회고하며 이렇게 말한다.
“시술은 끝도 없이 실패할 가능성이 있었고 불완전한 결과가 나올 수도 있었다. 하지만 과학과 기계역학 분야가 일취월장 발전하고 있으니, 현재의 시도가 적어도 훗날의 성공에 초석을 놓을 거라는 희망을 품을 수는 있었다. (중략) 바로 이런 마음으로 나는 인간 창조에 착수했다. 조물주이자 존재의 근원인 나. 헤아릴 수도 없는 행복하고 탁월한 본성들이 내 덕에 탄생하리라.”(pp.94-96)
그의 말에서 ‘과학’과 ‘기계역학’을 ‘소셜 미디어’나 ‘AI‘로 바꿔도 크게 이질감이 없다. 이때까지만 해도 빅터는 자신이 프로메테우스라고 생각했던 듯하다. 하지만 그의 실험은 호기심과 지적 성취를 넘어선 자기중심적 오만에서 시작됐다. 과학 지식으로 생명을 창조할 수 있다는 오만함, 지금의 시도가 다음 성공의 기반이 될 것이란 오만함은 자신이 만든 피조물을 맞닥뜨리자 공포와 두려움으로 바뀌면서 현실을 외면하는 무책임으로 이어졌다. 자신이 만든 괴물을 버린 빅터의 행동은 피조물에게 혼자서 견디기 힘든 차별과 소외, 혐오라는 상처를 남겼다. 나아가 피조물이 인간에게 ’해로운‘ 존재로 전락해 자신에게 복수하는 악순환을 만들어냈다.
이런 빅터와 달리 괴물은 시간이 지날수록 인간에 가까운 면모를 보인다. 특히, 드 라세 가족과 조우를 앞두고 “나는 누구인가?”(p.255)라고 묻는 그의 모습은 낯설면서도 익숙하다. 우리가 죽을 때까지 평생 던지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괴물이 몸으로 오감을 느끼고, 언어를 배우고, 언어로 추상적 사고와 감정 표현을 배우는 과정은 인간의 성장 및 발달 과정과 매우 비슷하다. 소설에서 괴물은 태어난 뒤 자연을 보며 본능적으로 아름다움에 선에 끌리고 감동한다. 이 역시 우리 인간과 비슷하다. 그러다 생김새가 흉측하다는 이유 하나로 사람들로부터 혐오받고 폭력을 당하며 점차 소외감과 분노를 느낀다.
자신의 선의와 노력이 계속해서 무시당하고 짓밟히는 동안 괴물의 좌절과 무기력도 그만큼 커졌을 것이다. 그래서 빅터가 사랑하는 가족을 한 명씩 죽였지만 마지막에는 이에 대해 회한을 느꼈다고 월터에게 털어놓기도 한다. 괴물의 살인 행위는 인간의 윤리로는 쉽게 정당화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이와 별개로 괴물이 동정, 연민, 이타심과 같은 감정을 소설의 말미에서 다시 느끼고 죄를 뉘우친 점은 인간성 회복을 보여주는 대목으로 주목할 만하다.
반면 프로메테우스가 되겠다는 야심을 품고 인간 창조에 착수했던 빅터는 복수심만 남은 괴물로 전락하고 만다. 죄악인 줄 알면서도 ‘지금은 복수가 영혼을 온통 갉아먹는 유일한 열정’(p.481)이라고 말하며, ‘무슨 악마의 저주를 받은 듯 가는 곳마다 영원한 지옥을 품고 다녔다’(p.481)고 말을 잇는 부분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의 마지막 모습은 지질하고 비겁하며 행동은 모순으로 차 있다. 피조물을 흉측하다고 버리다시피 하고, 자신에게 소중한 가족이 괴물이 손에서 하나, 둘씩 떠나가기 시작하니 이제 남은 건 복수뿐이라고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한다.
인간이었던 빅터가 괴물이 되고, 괴물이었던 피조물이 잠깐이나마 인간성을 되찾는 모습도 크게 이질적이지 않다. 이들은 현대로 오면 우리와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AI, SNS이다. 우리도 처음에는 이들 기술과 관련 개발자들이 프로메테우스처럼 우리의 삶을 더 편리하게 해 줄 것이라 믿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편리함에 잠식당하고 있다. SNS 테크 기업에는 집중력을 빼앗기고 부정적인 도파민 중독 현상을 겪고 있다. 마찬가지로 AI에는 사고력과 감정 표현마저 외주화하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스스로 상황을 직면하고 고민하기를 귀찮아하거나 포기하는 경우도 점점 늘어나고 있다. 최근에는 AI가 점점 인간과 비슷해지는 것을 넘어 인간의 지능까지 넘어서기 직전까지 왔는데, 인간은 오히려 퇴화할 것이라는 비관적인 전망도 나온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아름다움을 느끼고 추구한다. 기술이 주는 편리함을 누리기 위해 인간성, 인간다움을 스스로 포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인간성과 인간다움이 빠진 기술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메리 셸리는 빅터와 괴물로 보여준다. 기술 발전은 더 이상 피할 수 없지만 그 가운데서 우리가 인간성과 인간다움을 잃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때이다.
<덧붙임>
호주가 세계 주요국 중 처음으로 16세 미만 청소년의 소셜미디어(SNS) 이용 규제법을 시행한다. 이 법에 따르면 어린이와 청소년 수백만 명은 자신의 계정 접근이 차단되며, 이 규정을 따르지 않는 SNS 플랫폼은 4950만 호주달러, 우리 돈으로 약 485억 원의 벌금을 부과받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