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산堂山나무의 사계四季

해월리 당산나무, 그가 四季를 이야기한다.

by 무상행

예전에는 마을을 수호하는 서낭신을 모셔 놓은 신당(神堂)인 서낭당(성황당)을 마을을 드나들 때면 흔히 볼 수 있었는데, 지금의 젊은, 어린 세대는 성황당(서낭당), 당산나무를 검색을 통해야 알 수 있다. 당산나무는 마을 지킴이로서 신이 깃들어 있다고 여겨 모셔지는 신격화된 나무를 말한다.

이때 꼭 등장하는 것이 귀신이다. 그중 도깨비는 전래동화나 이야기에 많이 등장하여 익숙하다. 귀신도 처녀귀신, 몽달귀신(총각귀신), 달걀귀신... 같이 이름과 역할이 다양하다고 한다. 개인적으로는 빗자루, 짚신, 부지깽이, 장롱 등에 사는 귀신들을 좋아한다. 언젠가는 이들의 정다운 이야기를 쓰고 싶다.


이제 오늘의 이야기로 돌아오자. 당산나무에는 나무귀신이 자리하고 있고, 온갖 마을일이나 귀신들 일에 끼어들기를 좋아하는 몽달귀신이 자유롭게 드나든다. 그리고 귀신들은 여름에 활동이 가장 많다.


해월리 당산나무, 그가 四季를 이야기한다.


봄.

며칠 발가락이 간지럽더니 주위에 새싹들이 쏙 올라온다. 물오른 가지에는 새가 앉기만 해도 발자국이 남는다. 봄꽃 지천으로 필 때부터 뾰족하고 간지럽더니 결국 당산나무 온몸에서도 연두색 종기 터진다. 딱딱한 뿌리 주위에도 풀들이 자리 잡고 풀꽃을 피운다. 당산나무는 마을 풍년 굿을 한다고 상을 차려놓아도 한술 뜰 시간 없이 제 몸과 주변을 돌보느라 바쁘다. 이때는 몽달귀신도 봄바람 같이 산자락, 빈집, 시냇가로 봄꽃 보러 싸돌아 다니느라 얼굴 보기 힘들다. 당산나무에 꽃이 부지런히 피나 사람들은 당산나무 꽃에는 관심이 없다. 당산나무는 내리는 봄비에 취하여 연녹색 팔을 넓게 벌린다. 마을을, 세상을 품듯이.

여름.

여름에는 사람도 나비도 바람도 당산나무 그늘에서 쉬어간다. 낮더위에 지쳐 혀를 길게 내민 늙은 개, 마을 다산왕 복실이도 당산나무 그늘 아래에 엎드려 졸고 있다. 가끔 풍뎅이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당산나무로 돌진하여 튕겨 나가기도 하니 심심하지 않은 여름 낮이다. 마을을 지나는 뜨겁게 데워진 신작로를 지나온 지친 바람은 나무 그늘에 앉아 몸을 식히면서 해가 서산에 걸릴 때까지 게으름을 피운다. 가지에 앉은 매미 소리가 잎에 붙은 따가운 햇볕을 털어낸다. 당산나무 근처에 사는 몽달귀신도 잠에서 깨어나 하루 일과를 준비한다.

어두워지고 달이 수리봉에 오른다. 나뭇가지 사이에는 별들이 촘촘히 채워질 때, 당산나무 아래에서는 마을 사람들이 모여들어 자연스레 이야기판이 벌어진다. 이가 빠져 항상 입을 오물거리는 김노인 주위에 모여 앉은 아이들은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귀신 이야기에 흠뻑 빠져있다. 몽달귀신도 당산나무 가지에 걸터앉아 그 이야기를 듣는다. 오늘 귀신 이야기는 무서워서 등줄기가 오싹하다. 시끄럽던 매미 소리가 뚝 끊겼다. 김노인은 귀신 이야기를 하루에 한 개만 한다. 아이들도 몽달귀신도 아쉬워한다.

아이들은 다시 밤늦도록 신나게 뛰어논다. 몽달귀신은 아이들 놀리는 재미에 푹 빠져서 있다. 몽달귀신이 기어코 아이를 울린다. 미안한 마음에 자리를 뜬다. 갈 곳 없어하다가 갑자기 허기가지니 감나무집 부지깽이 귀신을 찾아 나선다.

모두가 떠나간 당산나무 아래에는 달그림자가 깊게 드리워져 있다.

당산나무는 달을 어깨에 올려놓고 잠든 지 오래다.

가을.

추분이 지나니 여름내 지친 잎이 황달기가 비치듯 노랗게 변해간다. 가지 끝에 앉은 잠자리가 바람결 따라 나뭇가지를 흔든다. 당산나무는 끝내하지 못할 사랑의 열병으로 붉게 타는 건너편 어린 단풍나무를 밤새 다독이다. 날이 갈수록 나무 아래로 떠나는 것만 보이다. 사람도 풀씨도 떨어진 잎들도...

귀신들 사이에 십리밖 은행골에 처녀귀신이 나타났다는 소문이 돌았다. 가만히 있을 리 없는 몽달귀신은 그날 처녀귀신 만나러 먼 길 떠났다. 몽달귀신은 힘 없이 돌아왔고, 살고 있는 빈집에서 며칠 째 나오지 않았다.

대륙성 고기압이 찬바람 몰고 아래로 조금씩 밀려올 때쯤, 당산나무는 매일 가지에 붙은 쓸쓸함을 털어내듯 잎을 떨군다.

겨울.

찬바람 분다. 당산나무는 그냥 서 있다. 오가는 사람도 뜸하다. 빈 들판을 우우 달려온 겨울바람만 신났다. 당산나무는 그냥 서 있다. 겨울바람이 건너편 산자락 아래, 텅 빈 학교 운동장에서 국기봉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으며 그냥 서 있다. 몽달귀신도 심심해서 당산나무 꼭대기에 올라 종일 그 소리를 세고 있다. 마을을 따라 흐르던 시냇물은 얼어붙었고, 그 위로 돌 구르는 소리가 텅 빈 당산나무속에서도 울린다. 건조한 겨울을 나는 애벌레는 가려운 등을 나이테에 비벼댄다. 가끔 눈이 내리나, 나뭇가지마다 가벼운 무게를 더할 뿐이다.

찬바람이 불 때면 당산나무는 튼 손 같은 마른 가지로 한가한 겨울 하늘에 글을 써본다.

심심하다.

하루가 참 심심하다.




예전에는 성황당(서낭당), 당산나무가 마을마다 있으니 자연스럽게 알 수 있었다. 수백 년이 지난 것도 아닌데, 이제는 만남과 쉬어가는 곳에서 지워졌다. 그리고 항상 가까이에 있던 수많은 도깨비와 귀신들도 아이들의 이야기 속에서 사라 젔다. 추억과 기억을 이렇게 쉽게 지울 수 있다는 게 안타깝다. 그리고 끝까지 성황당과 당산나무를 지키고자 했던 이들도 점점 세상에서 지워지고 있다. 세상의 변화에 따른 무관심도 한몫했겠지만, 어쨌든 세상에서 사라진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그러나 그리워하는 이는 그리워하면 된다.


당산나무는 지금 아래를 지나는 사람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통 알 수가 없다. 옛날에는 마을 사람의 집안 일도 자연스럽게 알 수 있었는데... 삼신할매가 앵두나무집에 들렀다거나, 심지어 복실이가 이번에 새끼를 몇 마리 낳았는지도 당산나무 아래 모여서 이야기하니 듣고서 알았다. 오늘은 막순이네 할머니가 빈 유모차 끌고 마을회관 가는 길에 잠시 쉬어갔다.


산자락 언덕바지에 있는 성황당에는 바람만 드나들고, 낡은 문은 삐걱거리며 드나드는 바람의 수만 세고 있다.


부지깽이 귀신, 빗자루 귀신, 당산나무귀신, 짚신 귀신, 망태기 귀신, 사발 귀신은 다 어디로 갔나? 이제는 함께하던 물건이 없어 저서 사라졌나? 밤하늘 별을 보고 걸으면 가끔 이들이 보고 싶을 때가 있다.

이름만 들어도 보고 싶다. 본 적 없어도 보고 싶다. 이제는 볼 수 없으니 더 보고 싶다. 사랑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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