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이야기들

한 번쯤 꺼내보고 싶은 이야기들

by 무상행


오늘 아침, 첫 매미 소리를 들었다.

반갑다. 잊지 않고 찾아왔구나. 이 여름, 같이 잘 지내보자.



세월은 머물기도 한다


깔닥고개 산길을 오르던 할머니가 쉬어가려고 길가 바위에 앉을 때,

어느 마을 가는지 말을 건네며 곁에 앉는다. 바람소리 같은 이야기를 나누다가, 할머니에게 손금 보기를 해드린다고 손을 펴서 보여달라고 요청했다. 할머니는 어색해하다가 조심스레 손을 편다.

밭이랑 같이 갈라진 손금에는 들풀이 자라고 있다.

그 밭이랑 사이로 砂金이 반짝이는 내가 흐르고 있다.

바람이 손금 등고선을 따라 내려와 머무르고 있다.

언덕 비탈길의 나무는 묻어있는 세월의 흔적을 털고 있다.

눈을 감고서 손 안 깊은 밤을 들여다본다.

손만 담그면 한 움큼 건져낼 수 있는 별이 손바닥 안 밤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다.

몽달귀신, 짚신귀신 몇이 당산나무 밑을 떠돌고 있다.

화석 같은 지문에는 소죽 끓이는 아궁이 냄새가 난다.

집안 잘되고, 손주들 다 잘커겠다고 말하니 좋아하신다.

다시 같이 일어나 고개를 오른다.

산길 가에서는 칡덩굴이 나아갈 방향을 찾아 덩굴 끝을 쳐들고 있다. 사마귀 한 마리가 칡덩굴이 산길을 가로 넘어오지 못하게 당랑권 자세로 당당하게 막고 서 있다.


하루에 네 번 마을을 오가는 버스가 저 멀리서 먼지를 일으키며 고개를 오른다.

버스를 타고 가자고 할머니에게 말하니

작은 고개 하나 넘으면 집인데 괜찮다고 하신다.

버스가 근처에 오니 할머니는 길가로 물러서서 가만히 길을 열어준다.

나도 덩달아 물러섰다.

버스가 저 만치서 섰다.

기사 아저씨가 할머니를 버스에 태운다. 나도 덩달아 올랐다.


안과 밖이 없는 세월은 이렇게 머물기도 한다.

이곳에서는 서쪽으로 가다 보면 동쪽을 만날 수도 있다.



시골 학교 운동장 한여름 풍경

모네 '포플러' 그리고 포플러 나무 (출처: 네이버 이미지)


더위로 미루다가 결국 떠났다. 딱히 목적지를 정하지 않았으니 빨리 갈 필요가 없어 지방도로를 이용하였다. 시골길은 어릴 때 포플러 나무가 길 양쪽 옆으로 열 지어 서 있는 신작로의 흔적이 아직 남아 있었다. 쉬어가기 위해, 어릴 때는 국민학교였지만, 초등학교에 들렀다. 입구는 알록달록 색으로 잘 단장되어 있었고, 한여름 오후라 운동장에는 아무도 없었다.

텅 빈 운동장의 가장자리로 나무 그늘을 따라 걸었다. 어릴 때는 운동장이 참 넓게 느껴졌는데, 지금은 한눈에 다 들어온다.


나비가 그네에 앉아 무더운 바람만 이는 날개를 추스르고 다시 날아가고, 철봉에는 따가운 여름 햇살이 가지런히 매달려 반질거린다. 늑목에는 층 사이로 바람만 오르락내리락하고, 미끄럼틀에는 느티나무그림자가 미끄러져 내려온다. 아이들이 땅바닥에 그려놓은 낙서는 말라서 개미의 바쁜 발걸음에 지워지고, 망 없는 농구 골대는 지나가는 구름의 수를 센다.

연단 옆에 앉아 있는 세종대왕상은 수십 년 동안 같은 쪽의 훈민정음을 펼쳐 놓고 있고, 심심한 바람이 국기봉에 들러 태극기를 한번 들었다가 놓고 가버린다. 2학년 1반 화단에는 떨어진 봉숭아꽃이 채송화 발톱을 빨갛게 물들여 주고 있다. 운동장 구석에 서 있는 은사시나무들은 하얀 몸을 드러내고 일광욕을 즐기고 있고, 곁에 쭉 늘어선 측백나무들은 오후 내내 자세하나 흐트러지지 않는다.

멀리 교문 옆 느티나무가 여름 햇살에 바짝 마른 그늘을 넓게 펼칠 때쯤 돌아 나왔다. 예쁘게 색칠된 낮은 담을 따라 걷는다. 심심하던 날벌레 몇 마리가 가는 곳을 묻지도 않고 따라온다. 손을 내저어도 끝까지 따라온다. 그래 가보자, 너희가 원하는 곳으로.



봉숭아 꽃물 들이기

꽃마리

며칠, 단발머리 소녀의 젖꼭지가 간지럽더니 고마리 꽃봉오리같이 뾰족이 돋아난다. 재잘거리기보다는 생각이 많아지기 시작할 때이다.

봉숭아꽃 물들였다. 손톱 아래 하얀 반달이 연분홍 밤하늘로 올라온다. 옆에서 졸라대던 여동생은 손톱에 매어 놓은 명주실이 풀어져 이불에 꽃물 드는지도 모르고 잠들었다.

봉숭아 씨방이 동글동글 익으면, 소녀는 새까만 꽃씨를 모아 한지에 곱게 싸서 책상 서랍 깊은 곳, 일기장 밑에 넣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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