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전반전 리뷰, 선택편
1. 운전 면허증 갱신
최근 10년만에 운전면허증을 갱신하러 면허 시험장에 가게 되었다. 기존 면허증을 제시하니 이내 다음 순서로 신체검사를 받으러 가라고 친절하게 안내한다. 한쪽 눈을 차례로 가리고 시력검사를 했는데, 이것으로 신체검사가 끝났다고 한다. 신체검사가 사실은 시력검사만 하는 것이었다. 더구나 그 시력 검사도 그 목적이 무엇인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안경을 쓰고 시력이 1.0이 되는지를 확인하는 것인데, 그게 안 되는 사람을 찾아내는 것이 현실적인가? 신체검사의 목적은 그것 인가?
그런데 서류 제출을 위해 서류를 작성하다 보니 서류에 자가 점검표가 있었다. 주로 운전하는 데 치명적인 정신질환, 장애 여부 등을 묻는 것이었는데 거기에 내가 민감해하는 적록색약 유무를 묻는 항목이 있었다. 당연히 적록색약이라 마크해서 당당히 서류를 제출하였더니 창구 직원이 이를 발견하고, “적록색약이면 면허증이 나오질 않는데… 실제 운전 시 불편함이 있었는지요?”라고 묻는다. 정확히 말하면 이렇게 하면 운전면허가 안 나오니 내용을 고치라는 의도의 질문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역으로 설명을 해봤다. "(적록색약이지만) 30년간 국내나 해외 운전 시 문제가 없었다.". 그랬더니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는 이내 내가 체크한 적록색약 란을 X 표시하고 거기에 내가 수정했다는 표시로 이니셜(간단한 서명)을 요청했다. 그리고 잠시 기다린 후에 면허증이 나왔다. 내 이니셜 하나로 적록색약이면 못 받는 운전면허증이 갑자기 적록색약 없는 사람으로 변신되어 면허증을 받게 되었다. 국내에서나 해외에서 교통 신호를 보거나 운전하는 데 전혀 문제가 없었기에 운전면허증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면허 갱신 과정에서 경험한 신체검사나 서류 작업은 불편한 마음을 남겼다. 미군들과 군 생활을 했는데 거기서 신체검사는 적색과 녹색의 실제 교통신호를 구분하는 테스트를 했었다. 독일에서 한국 면허증을 독일 면허증으로 교체 시에는 적록색약 검사는 없었다. 대신 컴퓨터 앞에서 화면의 꾸불꾸불한 길을 보면서 그에 맞게 핸들링하게 했다. 일정 구간이상을 길에서 벗어나면 면허 발급을 내어주지 않았다. 두 가지 검사 모두 운전면허 발급이나 갱신 시 필요한 검사라는 생각이 든다.
적록색약이 이렇게 간단하게 처리되는 것을 경험하면서 왜 이런 식의 신체검사가 있는 것일까? 하는 불편한 마음이 생겼다. 왜 서류에 적록색약 유무만을 표시하게 하여 나와 창구 직원 모두가 거짓말을 하게 하는지... 그 불편함에 감정이 더해지기 시작했고 그 감정이 점점 상승하여 결국, 60년을 살아오면서 나에게 원하지 않는 많은 선택을 강요한 적록색약에 대한 기억들을 소환하게 되었다.
2. 누가 만든 장애인가?
Chat Gpt를 검색해 보면 의대, 미대, 화공과 등 색을 정교하게 구분해야 하는 전공은 적록색약이 학업에 장애가 되지만 대부분 자연과학, 공학 등 소위 이과 공부를 하거나 직업을 갖는데 적록색약은 더 이상 장애가 되지 않은 분위기이다. 억울하게도 나에게 적록색약은 하고 싶은 공부나 하고 싶은 일을 못 하게 했고 때로는 차선의 선택도 못 하게 하는 폭력적이고 편협한 사회적 인공물이었다. 선택의 제약이 없었다면 지금 나는 어디에 어떤 사람들과 어울려 살고 있을까?
23년 7월 갑작스러운 비자발적 퇴직을 경험한 뒤에 2년이 흘렀다. 그리고 이제 몇 개월이 지나면 환갑이다. 60살이라는 나이에 대해 "환갑=취업하기엔 늦은 나이"라는 인식이 일반적이었고 이젠 나도 그렇게 믿게 되었다. 축구 전반전을 마치고 게임이 다 끝난 줄 알았는데, 전반전 같은 긴 후반전이 남아 있다는 현실을 알았고, 동시에 취업하기엔 늦은 나이라는 사회적 인식도 알게되었다. 전반전에 3:0 정도의 스코어를 만들어 놓았다면 편하게 수비 위주의 후반전을 보내면 될 것인데…. 그런 후회도 있지만,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 법이다. 전반전의 내 스코어는 1:0이나 2:0 정도로 후반전에 언제나 뒤집힐 수 있는 애매한 점수이다. 더구나 나의 수비력은 아직 불안하다. 유학 간 아들이 2년여간 공부를 더 해야 하는데 환율은 이전보다 더 많이 올라 있고, 30이 다 된 딸은 결혼할 생각보다 독립 세대 구성을 위해 돈이 필요하다고 한다, 아내와 나의 건강도 예측 불허 상태이다. 더구나 퇴직금 관리도 수익률이 좋지 못하다. 트럼프 취임 이후 마이너스 수익률을 기록하고 있다. 여러 가지를 고려할 때 일을 해야 하는데 일자리는 없고, 집사람이나 나 모두 퇴직금을 걸고 사업할 스타일도 못 된다. 그래서 늘 하던 본캐 대신 나이 들어서도 할 수 있는 부캐가 무엇일까를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찾는 과정에서 전반전 게임에서 의외로 선택에 많은 지장을 주었던 것이 적록색약이었음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중학교 이후 지속적으로 나의 꿈을 실현하는 여정에 방해꾼이 적록색약이라는 타고난 유전자였다. 부모님을 일찍 여읜 나에게 병을 고치는 의사는 자연스러운 꿈이었다. 그런데 고1에서 2학년이 될 때 이과로 가지 못함에 따라 그 꿈은 조용히 사망했다. 나는 수학이라는 과목을 꽤 좋아했었다. 그런데 고2 때부터는 싫어하고 멀리하게 되었다. 대신에 국사나 세계사, 고전을 공부하게 된 것이었다. 돌이켜 보면 우리 사회는 실질이나 현실을 중시하기보다는 뭔가를 정해놓고 거기에 맞추어 편을 가르거나 구획을 정리하는 것이 아직도 많다. 이과 문과로 나누는 것도 그런 것 중에 하나라고 생각한다. 다양성을 인정하기 힘든 70년대일지라도 나에게는 "적록색약= 문과"라는 강요된 선택은 억울했다. 지금까지 31년간의 전반전은 적록색약으로 길이 막혔을 때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차선의 길이었다.
3. 제한된 선택
적록색약은 적색과 녹색을 구분하는 것이 약하다는 것인데 선천적으로 어머님께 물려받은 X염색체에 색약 유전자가 있었고 우리 집은 아들만 5명인 독수리 5형제이다 보니 아들 모두가 적록색약이었다. 자식들을 위해 헌신을 다하신 어머님께선 늘 이 부분을 안타까워하셨다. 그 생각만 하면 나는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당시 고교에서 구분하는 기준에 의하면 우리 5형제는 모두가 문과생 운명이었다. 적록색약을 이과에서 받아주는 대학은 딱 하나, 경희대 한의대였다. 고2로 올라갈 때 나는 이과로 가고 싶다고 고집을 부렸었고 결국 그때 당시에 높은 분이신 교감 선생님까지 면담을 했고 현명하신 당시 교감 선생님은 고3 형들이 보는 학력고사 점수별 대학 및 대학의 과를 정리한 표를 보여주셨다. 잘 정리된 그 표에는 이과중에서 적록색약도 갈 수 있는 곳은 경희대 한의대 뿐임이 너무나 명확하게 표시되어 있었다. 그것도 당시 동일 계열 선택 시- 문과 고교생이 법대, 사회대, 인문대 등 문과 전공 선택 시- 20점이 주어지는데 다른 계열을 선택하면 그 20점이 없어졌다. 340점 학력고사 만점에 20점이니 20점 포기는 큰 점수였고 더구나 한의대는 내가 가고 싶은 곳도 아니었다. 당시 적록색약이면 이과 중에서 갈 수 있는 곳이 없었다.
고교 1학년 때 학교에 모 의과 대학에서 적록색약 검사를 무료로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검사를 진행하던 한 분이 내가 적록색약임을 알고 나에게 특수 안경을 쓰고 다시 읽어보라고 했는데 그 안경은 선글라스 색의 띠를 투명 안경에 붙인 단순한 형태였다. 그 안경을 쓰면 숫자가 정상적으로 보였기 때문에 적록색약도 안경 하나면 정상이 될 수 있다는 인식이 각인되었고 두고두고 그 경험은 나에게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사실 나는 중학교부터 수학을 좋아했다. 유독 수학 문제집을 풀기를 좋았다. 문제에 있는 모든 조건을 쓰면 거의 맞는 답이었고, 그래서 문제지 뒤에 있는 정답을 맞혀보는 것이 꽤 재미있었다. 국어나 역사처럼 외우고 또 복습할 필요도 없었다. 대학 시절에도 몰래 바이트(몰래 하는 과외)로 돈벌이할 때도 수학이 가장 효율성이 높았고 선호했다. 수학 정석의 문제집 정도만 풀 줄 알면 별도로 과외 준비를 할 필요가 없었다.
군복부후 복학하여 다큐멘터리 PD로 취업 목표를 정하고 당시 대학가에 유행이던 “방송 언론 고시”를 공부하였는데 그때 적록색약이 조제해 준 쓴맛을 다시 맛보게 되었다.
당시 막 생긴 방송사(SBS)에서 공채를 모집한다고 하여 지원했고, 영어 듣기가 있어서 1차 필시 시험을 Pass 하고 7명을 뽑는 최종 면접에 갔는데, 면접 직전에 신체검사를 하는 것이었다. 색약 검사에서 당연히 적록색약으로 판명되었고 적록색약은 뽑지 않는다는 그만 돌아가라고 한다. 피가 끓는 대학생인지라 일단 면접은 보아야 하겠다는 심정으로 싸웠다. 사전 고지도 없었고 라디오 PD 하면 될 것 아니냐고… 결국 면접은 볼 수 있었는데 결과는 탈락이었다. 나중에 지인을 통해 알아보니 성적은 괜챦았는데 PD는 순환하기에 적록색약은 안 뽑는다고 한다. 이후 KBS에서 PD를 모집할 때는 꼼꼼히 지원 자격을 읽어봤고 적록색약은 라디오나 TV 모두 안 뽑는다는 내용을 확인하고 진로를 근본부터 다시 생각해 보았다 내가 원하는 다큐멘터리 PD를 정말 포기해야 한 것인지…
4. 차선의 선택
그렇게 고민하면서 속절없이 마지막 학기 늦가을을 보내고 있는데 지금은 모 신문사의 논설위원을 하는 한 후배가 제일기획이라는 광고회사에서 다큐멘터리 전문 케이블 TV를 한다고 거기에 지원하자고 했다. 그래서 엉겁결에 후배가 시키는 대로 서류 작성해서 제출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주도적으로 알아보고 원서도 가져다주는 사람과 거기에 빌붙어 얼떨결에 지원한 사람의 최종 결과는 기대와 정반대인 경우가 많다. 결과적으로 그 후배는 나중에 자신이 원하는 진보적 언론사에 가게 되었고 나는 얼떨결에 광고회사에 입사하게 되었다. 광고회사에서는 적록색약을 전혀 문제 삼지 않았다. 그렇게 발을 들인 광고업계에서 31년 정도를 일하다 보니 이제는 내가 정말 광고에 맞는지 안 맞는지는 중요하지가 않았다. 이미 자연스럽게 그 업에 맞추어 살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삶의 전반전을 적록색약이 작용하여 선택한 광고산업에서 의미 있게 보냈다. 나의 후반전은 무엇이 작용할까?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