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삶 속에서 죽음을 기억하기

나는 누구인가? 나를 키운 고마운 것들

by Small Big Coach

1. 갑작스러운 부고

얼마 전에 친인척이 모여 있는 단톡방에 갑자기 부고가 하나 떴다. 요즘 기준으로는 아직은 한창때인 만 61세의 친척분이 돌아가셨다는 부고였다. 순식간에 단톡방은 충격과 허망함의 탄식으로 채워졌다. 그분은 고향에서 대학 교수로 재직하셨고 친인척들은 대부분 서울에 거주하고 있어서 자주 연락할 기회도 없었다. 갑작스러운 부고의 원인에 대해 궁금함이 생겼고, 페이스북이라도 찾아보아야겠다 생각이 들어 검색해 보았다.


페북에는 건강할 때의 사진들만 포스팅되어 있었다. 한동안 업데이트가 없었던 상태로 보였다. 다행히 지역의 NGO사이트로 연결되어 있어서 클릭해 보니, 고인이 그 단체의 공동 의장으로 활동하셨음과 단체장으로 장례가 치러짐을 알 수 있었다. 심지어 그 단체 사이트에는 친척들은 전혀 몰랐던 최근의 근황을 알려주는 소식들이 포스팅되어 있었다. 24년 5월에 뇌종양 판정받았고, 당시 의사가 "서운하게도 1년도 아닌 6개월 선고”를 했다는 그분의 상황설명과 “가족과 협의하여 그 단체에 후원금을 내놓기로 했다”했다는 결정사항이 포스팅되어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분의 후원금으로 그간 활동에 헌신해 온 두 분을 선정하여 포상한 후 찍은 사진이 있었다. 병색이 완연한 얼굴임에도 미소를 잃지 않는 그분 모습에서 눈시울이 뜨거워짐을 느낄 수 있었다.

죽음을 앞둔 상태에서 고생했던 회원들에게 고마움을 표하는 구체적 방법을 생각해 내는 그분의 마음과 또 그런 가장의 생각에 동의하고 지원하는 가족들의 마음을 생각해 보니 나도 모르게 숙연해졌다. 슬프고 안타까운 죽음이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삶을 정리하는 모습이 나에게도 울림을 주고 그래서 기억되는 삶이었다. 과연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라는 질문이 저절로 떠올랐다. 며칠간 죽음에 대한 상념들이 계속해서 머릿속과 가슴속에 차올랐고 문득 글로 쓰고 싶어졌다. 쓰다 보니 머리도 마음도 진정이 좀 되는 것 같다.


2. 나의 삶 속에서 "죽음"

죽음이라는 것이 긍정적인 느낌을 주지는 않지만, 역설적으로 죽음을 생각하면서 삶을 살면, 매 순간을 충실하게 살게 해 주고 나아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스스로 묻게 해준다고 한다. 이번 부고를 계기로 나 또한 지나온 삶 속에서 죽음은 어떤 역할을 했을까 생각해 보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부모님을 일찍 여읜 탓에 죽음은 일찍부터 내 삶 속에 등장했다. 내가 태어난 지 4개월 만에 아버님은 돌아가셨기에 아버님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다. 오히려 홀로 고생하시는 어머님을 볼 때마다 “살아 계셨으면 좋았을 것을” 하는 아쉬움의 대상이 아버지였다. 그 아쉬움은 “처자식이 필요할 때까지는 곁에 있어야지 ”하는 다짐이 되었고 이런 다짐은 나의 삶에도 하나의 목표로 작용하였다. 지금도 건강검진과 건강관리에 돈과 노력을 아끼지 않는 편이다. 또한 아이들이 원하는 교육기회는 경제적 부담이 되더라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중학교 2학년 때 어머님마저 돌아가셨다. 어머님은 가난한 형편에도 홀로 5형제를 키우면서 자식 교육에 진심이셨다. 몸을 돌보지 않고 불철주야 일하시어 얻은 소득을 자식들 교육비로 아낌없이 쓰셨다. 그러한 어머님의 헌신은 당시 모범 사례로 인정되어 면장, 군수, 도지사까지 “장한 어머니상"을 모두 휩쓸었다. 어머님의 고생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던 중1 때 안타깝게도 어머님은 대장암 진단을 받으셨다. 강한 의지로 투병을 하셨으나 이듬해에 결국 돌아가셨다. 어머님은 자식들에게 성실성과 자식에 대한 헌신을 몸소 보여주셨다. "짐승 게으른 것은 살이라도 쪄서 몸가격이라도 올리지만, 사람 게으른 것은 아무짝에도 쓸데없다"던 어머님의 말씀을 늘 기억하고 게으름을 늘 경계하곤 했다


어머님이 작고하신 이후, 시골에 혼자 남은 중학생 손자를 돌보기 위해 칠순의 할머님이 서울에서 내려오셨다. 칠순의 할아버님, 할머님이 사춘기의 중학생 손자와 한 지붕 아래 같이 사는 상황은 갈등이 있기 마련이었다. 그 갈등이 점입가경으로 커져갈 무렵, 이를 화합으로 급반전을 이룬 하나의 계기가 있었다. 어느 날 무단 외박을 하고 온 손자에게 할아버님은 화를 내는 대신 자신의 학생 시절 이야기를 시작하셨는데 그 이야기가 할아버지의 인생 전체의 이야기로 확대되었다. 그때 이후 할아버님의 인생 스토리를 반복해서 들을 수 있었는데 그렇게 기억된 할아버님의 이야기가 내 삶에서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나에게 큰 힘이 되었다


할아버님은 일제강점기에 고등 교육기관인 고보를 중퇴하셨고, 그 학력으로 말미암아 일제로부터 앞잡이 노릇을 강요받았다. 이를 피하고 집안의 경제적 부흥도 도모하기 위해 할아버님은 결단을 내리셨는데, 그것은 식솔들을 데리고 만주로 이주하여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만주에서 괴뢰 정부의 공무원을 대상으로 하는 식당을 운영하셨는데 다행히 성공적이었다고 한다. 해방이 되자 재산을 급하게 정리해 귀국길에 올랐으나 이미 38선은 감시가 강화되었고 결국 아라사이(러시아) 군에게 발각되어 그간 축적한 재산(주로 금붙이로 전환)을 모두 빼앗기셨다. 그 충격으로 할아버님은 한동안 정신적 쇼크 증세를 겪으셨다고 한다. 다행히 할머니, 고모들이 몸에 숨긴 일부 금붙이, 할머니의 금비녀와 하이힐(당시에 돈이 되었다고 한다) 등은 털리지 않아 이것들을 팔아 서울 청량리 인근에 단칸방 하나를 겨우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할아버님이 점차 정상적인 정신 상태로 돌아오시고 주변이 도움을 받아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셨는데, 그것은 시골(외가와 친척들이 많이 사는 동네)의 농부들의 벼를 수확기에 외상으로 수매하여 정미소에서 가공, 서울까지 기차로 운반하여 판매하고 농부들에게 외상값을 갚는 사업 모델인데 꽤 성공적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사업이 기반을 잡아갈 무렵 이번에는 정미소와 외상으로 수매한 벼를 잔뜩 쌓아둔 창고에서 화제가 발생, 또다시 모든 것을 잃게 되셨다고 한다. 어렵게 성취한 것들이 한 번에 무너지는 비운을 반복적으로 겪으면서도 할아버님은 다시 일어서는 용기를 보여주셨다. 그런데 당신의 큰 아들(나의 아버님)을 잃은 뒤로 다시 일어서는 용기를 갖는 것이 가장 힘든 일이었다고 고백하셨다, 마침 옆에서 듣고 있던 할머니는 그 부분에서 울기 시작했고 결국 우리 모두는 함께 울고 말았다. 이후 손자인 나와 할머니 할아버님은 매우 가까워졌다. 사춘기 손자와 칠순의 조부모는 서로 비어 있는 공통의 자리가 있었던 것이다. 부모의 자리와 자식의 자리를 서로 채우면서 정말 단란한 가정을 이루었다.


나의 삶을 돌이켜 보면 몇 가지 특수성이 있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부모님을 일찍 여의여 그 빈자리를 조부모님과 함께 채우고, 이후 형님들의 보살핌 속에서 부모님의 뜻은 기억이 되어 나는 정상적인 교육을 받을 수 있었고 보통의 가정을 꾸릴 수 있었다. 부모님의 죽음에도 그 죽음의 의미를 기억하게 하고 스스로 올바른 삶을 보여주신 조부모님 그리고 형님들에게 무한한 고마움을 느낀다.

3. 삶 속에서 죽음의 역할

대학원 수업 중에 "톨스토이의 성장을 이야기하다"라는 유튜브 영상을 교수님으로부터 추천받았다. 삶 속에서 늘 죽음을 기억하면서 살았던 톨스토이에 대한 강의 영상(고려대 석영중 교수)이었다. 톨스토이는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을 “성장”으로 보았는데 개인적으로 나는 그의 답이 마음에 쏙 들었다. 그는 성장을 하는 삶을 위해서는 크게 3가지 조건이 필요하다고 했는데 그것은 몰입, 다른 사람과 소통, 그리고 죽음을 기억하는 것이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어떤 일에 몰입하여 성취를 느끼는 기쁨, 다른 사람과 공감하고 그 공감이 순식간에 모두에게 퍼지는 소통을 경험할 때의 기쁨, 죽음을 늘 기억함으로써 매 순간 삶에서 성장을 추구하고 성장에서 기쁨을 찾는 삶이 진정 행복하다는 것이다.


나는 성장을 추구하는 “學生”이다. 제사를 지낼 때 조상의 神位를 모시는 지방에 “學生”이라는 말을 쓴다. 원래 높은 벼슬을 하지 못한 사람들을 통칭하는 의미로 알고 있다. 그렇지만 나는 학생이라는 말 그 자체가 너무 좋다. 성장의 관점에서 나는 학생이고 싶어 하고 그런 삶을 살고 싶기 때문이다. 20대까지 학교에서 배우는 학생을 벗어나 평생 동안 일상이라는 장에서 배우는 학생이라 생각할 때, 공자님의 學而時習之, 不亦說乎는 톨스토이의 성장과 다르지 않다. 나에게 있어서 일상의 삶 속에서 학생은 곧 성장을 의미했다.


친척분이 돌아가신 후, 친구였던 모 정치인이 조문을 할 수 없는 상태인지라 대신 편지를 보냈다. 언론에 공개된 편지에서 “80년대 당시 기피 또는 위험한 학문분야였던 노동법 전공으로 택했던 벗, 다들 서울을 지향할 때 고향으로 내려갔던 벗, 개발신화가 기승을 부릴 때 환경을 택했던 벗, 웅변보다 경청과 설득을 강조했던 벗, 높은 곳보다 낮은 곳에 임했던 벗,… 세상의 소금, 동네의 느티나무 같았던 벗”으로 친척분의 죽음을 기억했다.


환갑이 얼마 남지 않는 나이에, 얼마나 더 오래 살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백세 시대를 대입하니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20대 때의 질문을 다시 소환하는 상황이 재현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죽음을 기억함으로써 성장을 추구했던 톨스토이의 삶이나 안타깝게 갑자기 돌아가신 친척분의 삶은 앞으로 내가 기억하고 추구해야 할 삶의 방식이 아닐까 생각한다. 인류가 죽은 선대의 유산과 그들의 삶을 기억하면서 변화와 성장을 이루었듯이, 나도 누군가의 죽음에서 그들이 추구했던 삶을 기억하고 성장하고 변화하는 삶을 살았으면 한다. 아버님, 어머님, 할머니 할아버님의 죽음을 기억하며 지금까지 성장했듯이 앞으로는 주변의 죽음도 기억하며 더 큰 나로 지속적인 성장을 도모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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