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당에 다니기 시작한 지 40년이 넘었다. 한 번의 냉담 없이 아직까지 발걸음을 멈춘 적은 없다. 열심히 다닐 때는 한 번의 빠짐없이 새벽미사를 1년이 넘게 다닌 적도 있다. 새벽에 일어나 성당 갔다 와서 식구들 밥 해 먹이고 출근했던 일은 나에게 뿌듯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전국 성지순례를 매주 다니며 기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요즘은 체력이 따라주질 못한다. 몇 달 동안 새벽미사를 다녔더니 몸이 탈이 나서 어쩔 수 없이 멈출 수밖에 없었다. 직장에 다닌다는 핑게로 봉사도 못하니 열심히 새벽미사라도 다녀야겠다는 의지도 어쩔수 없었다.
얼마 전 저녁시간에 성경 통독을 한다는 공지가 떴다. 일주일에 한 번, 화요일 저녁 8시에 참석하여 1시간 반 동안 통독과 묵상의 시간을 갖는다고 해서 얼른 가입 신청을 했다. 신약성서를 6개월에 통독하고 성경 전체는 3년이 걸린다고 한다. 3년 동안 잘 버터 내길 기도한다. 처음에 같이 시작한 분 중 잘 안 맞는다고 빠지고 몇 분이 들어오시더니 10명이 고정되었다. 다들 자매님들 밖에 없다.
나만 그런지 모르지만 가톨릭 신자들은 교회 다니는 사람들에 비해 성경 공부를 안 한다고 한다. 개신교 신자들은 성경 구절을 줄줄 외워 선교 활동을 하는 것을 보지만 그것에 비하면 가톨릭 신자들은 기도도 못하고 성경 말씀에도 약하다는 걸 자인하고 있다. 모든 것은 성경 말씀으로 통한다고 하면서도 너무 소홀하지 않나 싶기도 한다. 모든 신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성당에서도 성경 공부하는 모임이 많이 있기는 하다. 이래저래 타임을 맞추기가 쉽지 않았다.
이번 주 마태오복음 마지막 통독 후 묵상시간이었다. 다들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거나 반성하는 말들을 많이 하셨다. 묵상은 보통 나를 돌아보는 시간이지 않을까 한다. 맨 마지막 순서였던 나는 배신자 유다에 관한 말씀이 나와서 유다 이스카리옷에 대해 묵상을 했다.
마태오 26장 14 절부터와 27장 3절에 나오는 유다 얘기였다
성경의 말씀이 이루어지기 위해 누군가가 예수님을 배신해야 했는데 그 사람이 하필 유다였다. 성경 말씀처럼 태어나지 말아야 했던 존재로 비난받고, 후대까지 가장 비난을 많이 받으며 마지막 목을 매달아 죽어야 했던 사람이 유다였다. 사형 선고 받은 것을 보고 뉘우치고서는 몸값으로 받았던 은전 서른 잎을 성전 안에 던지고 죽었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은전은 옹기장이의 밭을 사서 이방인의 묘지로 쓰였다. 모든 것이 예레미야 예언자를 통해 하신 말씀을 이룬 건데 유다가 비난을 이처럼 받는 건 너무 억울해할 것 같다. 난 유다가 비난을 받아야겠지만 한편으론 유다를 불쌍하게 생각하고 싶다는 요지였다. 유다가 자유의지로 배신을 안했다면 다른 누군가가 그 역할을 해야했을거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셨듯 유다도 자신의 몫을 했으니 긴 세월 동안 비난만 받는건 너무 불쌍하게 생각한다는 묵상이었다.
내가 또라이 기가 있었는지 묵상을 하고 나자 모두가 날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봉사자님도 마찬지였다. 묵상에 대한 반론은 못하게 되어있기 때문에 아무 말도 안 하고 고개만 갸웃했지만 모두가 날 또라이가 아닌가 하는 눈빛이었다. 어떤 분이 혼잣말로 '유다를 불쌍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구나' 하는 작은 목소리도 들렸다.
내가 전체 성경말씀을 이해 못 해서 유다를 불쌍하게 생각할 수도 있을 거다. 집에 와서도 계속 머리가 찜찜하지만 아직 내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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