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서로에게 좋다.
나는 한 아이의 엄마로, 한 남자의 아내로, 또 며느리로, 딸로 살아가고 있다. 그 외에도 수많은 역할을 수행하며 살고 있다. 모든 역할을 제대로 소화해내며 잘하고 싶지만, 때로는 마음의 컨트롤이 잘 되지 않을 때가 있다. 무수히 많은 역할 중 딸로서의 역할이 가장 힘든 것 같다. 나는 그렇다.
몇 년 전 아빠가 돌아가시고 혼자가 된 엄마를 보면 늘 안타깝고 걱정되는 마음에, 오히려 내가 엄마의 엄마가 된 것처럼 엄마를 챙긴다. 그래서 엄마가 무심코 내뱉은 한마디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이거 괜찮다더라~"
"여기 되게 좋대~"
엄마는 무심코 던진 말일 수도 있는데, 나는 그 얘기를 들으면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어떻게든 엄마를 모시고 좋은 곳에 가려고 하고, 엄마와 시간을 보내려고 하고, 좋은 물건이 있으면 사드리려 한다. 엄마가 보험 청구가 어렵다고 하면 그 길로 달려가 엄마 일을 도와드린다. 물론 남들이 들으면 자식으로서 으레 할 수 있는 일들이 아닌가 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어릴 때부터 엄마는 가족들 사이에서 무슨 일이 있으면 꼭 나에게 전화를 하곤 했다.
"○○야~ ○○가 엄마 말을 안 듣는다. 어떻게 좀 해봐"
"니네 아빠가 이렇게 한다. 못 살겠다. 죽겠다"
"할머니한테 가서 안부 인사를 드려라"
"회사에서 돈 지급을 안 해준다"
나는 늘 이 문제들을 해결해왔다. 짜증 나고 힘들고 진짜 소리를 확 지르고 싶은 적도 많았지만, 늘 엄마를 위해 해결해왔다. 무시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지 못했던 이유는, 엄마를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커서 늘 엄마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한 게 크지 않았나 싶다. 사실 소리를 확 질렀던 적도 있긴 있다.
엄마는 의지할 곳이 없다. 자식이라는 내가 있어도 온전히 마음을 열지 않는다. 솔직하지도 않다. 비단 부모란 자식에게 의지할 수 없는 존재인가 싶다가도, 무슨 일만 생기면 바로 나에게 전화를 거신다. 전화를 해도 된다. 그렇지만 서로 의지하며 오순도순 지낼 수 있는 사이라면 더더욱 좋겠다는 거다.
당신은 내가 이렇게 하길 바라면서, 반대로 내가 "엄마가 이렇게 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하면 엄청난 힘듦을 짊어지신 표정으로 한숨을 크게 내쉬고 한없이 어깨와 몸이 작아지는 엄마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 모습을 보면 '아.. 괜히 말했다' 싶은 생각이 든다. 오히려 말 안 하고 엄마가 요구하는 것만 해드리면 표면적으로 보이는 관계에선 나쁘지 않으니까. 오히려 엄마의 기분을 만족시켜드릴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렇지만 나도 사람인지라 감정적으로 너무 힘들 때가 많다.
얼마 전에 보험 청구를 대리점 가서 한다는 엄마의 말에 그냥 우리 집 오시라고 했다. 힘들게 대리점까지 가야 되고, 눈도 안 좋으신데 괜히 걱정도 됐다. 같이 식사한 지도 오래된 것 같아 저녁도 함께 할 생각에 오시라고 했다. 같이 식사를 한 후 엄마의 보험 청구를 도와드렸다. 요즘엔 앱으로 쉽게 할 수 있으니 시간이 오래 걸리진 않는다. 그 외에도 엄마의 일을 도와드리고 나니 어느새 시간이 9시가 됐다.
나도 아이가 있으니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야 할 시간도 필요하고, 아이만의 루틴을 함께 해야 하는 시간도 필요하기에 엄마보고 주무시고 가라고 했다. 모셔다 드리면 그만큼 시간이 40분 넘게 날아가게 된다. 워킹맘으로서 평일의 저녁 시간은 너무나도 부족하고 한없이 빠르게 간다.
눈이 안 좋으신 엄마가 밤에 버스를 타고 가시는 것도 마음에 걸리고 이래저래 걱정이 됐던 차에 주무시고 가라고 했고, 엄마랑 한 방에서 같이 잤다. 엄마는 잠귀도 밝고 예민해서 작은 발자국에도 깬다. 그런데 이상하게 엄마와 같이 자는 날에는 잠이 많은 나도 깊게 잠들 수가 없다. 자면서 머리를 박박 긁는 소리도 예민하게 들리고, 그 가루가 어떻게 어디로 떨어지나 괜히 짜증도 나며 왜 엄마를 주무시고 가라고 했을까 후회도 밀려온다. 꼭 새벽에는 한 번씩 깨서 화장실을 가는 엄마의 모습도 싫다. 푹 잠을 자야 눈에도 좋고 피로도 풀릴 텐데, 무엇 때문인지 엄마는 늘 새벽에 한 번 이상은 꼭 깨서 화장실을 가신다. 한편으론 걱정도 되지만 한편으론 잠 좀 푹 자라고 괜히 성질을 내게 된다.
그렇게 새벽 4시 30분에 잠을 깬 나는 거실에서 자겠다며 소파에 드러누웠지만 잠이 쉽게 오지 않았다. 잠을 청하려고 노력했지만 잠을 오지 않았던 나는, 깬 김에 내 도시락을 싸고 아이의 밥을 차리고 엄마의 밥을 차렸다. 그런 다음 출근 준비를 위해 씻고 화장을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일찍 준비했는데도 시간은 늘 부족하다. 그래도 출근 전 설거지까지 마쳤다. 엄마도 힘들어하는 날 보면서 "내가 도움이 늘 안 되네.. 미안하다.."라고 하시는데, 그 말도 듣기가 싫다.
내가 주무시고 가라고 안 했다면? 아니, 주무시고 가라고 했으면 나도 마음을 열고 자식으로서 기대하지 말고 그냥 해드리면 어땠을까? 늘 해놓고 후회하게 되는 순간들이다.
후회하게 될 것 같으면, 이런 일이 반복적으로 일어나고 있다면, 한 번 더 생각을 해봐야 한다.
나는 왜 엄마에게 무언가를 기대하는 걸까. 엄마도 나에게 의지하고 싶지만 온전히 마음을 열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왜 엄마가 달라지길 바라는 걸까. 그리고 그 기대가 채워지지 않을 때마다 왜 나는 이렇게 상처받고 지치는 걸까.
어쩌면 나는 엄마와의 관계에서 '완벽한 딸'이 되려고 애쓰는 동시에, '완벽한 엄마'를 기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완벽한 사람은 없다. 엄마도, 나도.
이제는 알아야 할 것 같다.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엄마에게 바랄 수 있는 것과 바랄 수 없는 것을. 그리고 무엇보다, 나 자신을 돌보는 것이 이기심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필수라는 것을.
엄마를 사랑한다. 그렇지만 나도 사랑받아야 할 사람이다. 이 두 가지가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을, 천천히 찾아가야겠다. 비록 지금은 답을 모르지만, 이렇게 나의 감정을 마주하는 것이 그 시작일 거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