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고향은 작은 시골마을, 우리 집은 넓은 동산을 품고 있다. 그곳은 어릴 적 추억이 깃든 놀이터이다. 친구와 숨바꼭질도 하고 다리도 닿지 않는 아버지의 자전거를 끌고 가서 넘어지고 또 넘어지며 배우려고 애썼던 장소다. 그리고 날이 어두워질 때면 사춘기 언니 오빠들 데이트 장소이기도 했다. 오래된 밤나무와 자두나무가 자태를 뽐내고 있다. 가을이 되면 수십 그루의 밤나무에서 입을 떡 벌린 밤송이들과 크고 작은 밤알들이 수두룩하게 떨어져 있었다. 뒷마당에는 앵두나무와 포도나무가 있어 주렁주렁 열매를 맺고 있던 생각이 난다.
우리 집은 동네사람들이 딸 부잣집으로 불렀고 나는 칠 남매 중 다섯째 딸이다. 내가 태어나던 해에는 아이들이 두세 명 밖에 없다. 그래서 남자아이와 주로 소꿉친구로 친하게 지냈다.
우리 동네에 교회보다 더 큰 대궐 같은 한옥집이 있었다. 그 집은 고아원으로 기억하는데, 내가 5학년 어느 날, 그 집이 이사를 가고 가정집이 이사를 왔다. 그 집엔 나와 동갑인 잘생긴 남자아이가 있었다. 그런데 그 아이가 신선함과 설렘으로 내 안으로 들어왔다. 만나보고 싶고 친하게 지내고 싶었다. 그 아이는 먼저 다니던 학교와 교회로다녔다. 그래서 만나야 할 공통점이 없으니 부딪힐 일이 별로 없다. 내가 그 집에 찾아가서 같이 놀자고 하기엔 나에겐 숙기가 없었다.
그저 우리 집 앞마당에서 멀리 보이는 그 집 대문 옆 툇마루에 앉아 노는 모습만 힐끔힐끔 훔쳐볼 뿐이었다. 그 아이는 서울에서 이사 온 왕자님이라면 나는 시골 촌아이라 할까? 뭔가 주눅이 들어 있었나 보다.
나와 친하게 놀던 소꿉친구는 우리 집에도 놀러 오고 그 친구 집에 가서 놀기도 했다. 그러나 이사 온 아이는 도무지 나와 함께 할 기회가 생기지 않았다.
그 아이는 남자아이들끼리만 노는 거 같았다. 나는 그 집 쪽을 자주 바라보며 그 아이가 마당에 나오기만을 기다릴 때가 많았다.
어린 마음에 혼자만 간직한 채 초등학교를 지나 중학생이 되었다. 중학생이 된 그 아이의 교복 입은 모습이 멋있어 보였다.
그 아이의 아버지는 우리 집에 자주 왔다. 우리 아버지와 나누는 이야기를 귀동냥으로 들었다. 그 아이의 엄마는 제주도 사람이고 왠지 우리 집과 색다른 가정으로 여겨졌다.
제주도 할머니들의 강인한 면이 있어 보인다고나 할까? 큰딸은 유치원 운영을 하고 있고 연세대 다니는 형이 있다고 한다. 그 가정사를 알게 된 후 그 아이와 거리감이 느껴졌다.
나는 마음속에 꽃 피우지 못한 첫사랑을 짝사랑으로 묻어둔채 간직하기로 했다.
소꿉친구와 그 아이는 주로 교회나 동네에서도 자주 만나 놀았다. 그래서 가끔씩 신선한 꽃향기로 다가왔던 첫사랑의 소식을 들을 뿐이었다.
중학교 여름방학이 되면 타교회에 가서 성경공부를 했다. 소꿉친구와 동생 두 명과 함께 간 적이 있다. 그저 신나고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지만 집을 떠나 친구와 함께 새로운 일탈이 즐거웠다.
그런데 어느 날 밤 가로등도 없는 논둑길을 소꿉친구와 걷고 있었다. 그 친구가 하는 말
“나 무슨 병에 걸려 얼마 못 산다! 그래서 사진들을 다 태우고 정리하는 중이야"
”얘가 무슨 장난을 치고 있냐!" 하며 나는 그 아이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그러나 그 후로 소꿉친구는 아프지도 않고 병에 걸리지도 않았다. 어쩌면 이 친구도 나를 좋아한다는 표현을 그렇게 했던 거 같다. 그 후에 그런 말을 왜 했는지 물어본 적은 없다.
이렇게 처음으로 느끼는 마음은 서툴고 어찌해야 좋을지 몰랐던 거 같다. 이제 중년이 되어 옛 추억을 떠올려보니 풋풋했던 감정이 새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