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ok란 Jul 02. 2024

일 년에 한 번

       


  오늘은 친정어머니 생각이 많이 난다. 어머니의 친구를 만나는 날이기 때문일까?

어릴 적 옆집에 살던 명자 어머니는 내 어머니의 친구다.

하늘나라로 가신 어머니를 만날 수 없지만 그 후로 친구 어머니의 안부를 가끔 묻다가 셋이 만나게 되었고, 명자 어머니를 만나면 옛날 생각을 하게 된다.      

 오늘은 세 번째 만남이다. 나는 약속장소에 일찍 도착해서 기다렸다. 친구 뒤로 명자 어머니가 꼿꼿한 자세로 걸어 오신다. 내 어머니를 만난 거처럼 반가워 뛰어가서 두 손을 꼭 잡았다. 94세인 명자어머니는 전철을 갈아타고 방화역에서 대치역까지 딸네 집도 잘 다니신다 한다.

 “아줌마? 120세까지 건강하게 사셔요! 오래오래 볼 수 있게!”라고 나는 말했다.

나의 진심 어린 말은 명자 어머니의 건강한 모습을 오래도록 뵙고 싶어서 나온 말이다. 명자 어머니는 빙그레 웃는다.

 “동네에서 친하게 지냈던 다섯 명의 멤버 중 나 혼자 남았어!”라고 명자 어머니는 힘없이 말하며 옛 추억을 떠올리는 표정을 짓는다. 당신도 언젠가는 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처럼…….

 옛날 긴긴 겨울에는 내 어머니와 동네 아주머니 다섯 명이 모여 십 원짜리 내기 민화투를 치셨다. 명자어머니는 이 세상에서 함께 놀다 소풍을 끝낸 친구들과의 생각에 잠기는 듯하다.      

 명자어머니는 나를 보며 내 어머니를 더욱 보고 싶다고 한다. 부지런하고 일만 하며 살았던 두 분은 닮은 점이 많았다. 고향 이야기는 해도 해도 끝이 없지만, 지나간 추억이 되었다.


 명자 어머니와 담소를 나누며 내 어머니를 회상해 본다.

 나는 방학이 되면 시골에 있는 외할머니 댁에 갔던 생각이 난다. 넓은 들판에 빨간 흙이 보이고 논과 밭에서 할머니 할아버지의 일하는 모습이 생생하다. 그곳이 내 어머니의 고향이다.

 맏며느리로 시집와 시부모님을 모시고 칠 남매를 키우며 살았다. 우리 집은 네 개의 방이 있어 저녁마다 짚으로 아궁이에 불을 지펴야 온돌방에서 잠을 잘 수 있다.

어쩌다 내가 한 적도 있지만 모든 것을 어머니가 했다. 아궁이의 재를 삼태기에 담아 헛간에 버리러 밖으로 나갈 때 재가 바람에 날려 얼굴에 묻기도 한다.

동네 사람들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이웃집 숟가락까지도 알 만큼 정겨운 마을이다.


 여름에 모내기철이 되면 밥세끼와 새참 준비에 바쁜 하루였다. 앞밭에는 오이, 가지, 참외, 토마토, 고추, 상추밭이 있었다. 연하고 작은 오이를 따서 먹으면 아작아작 씹히는 맛이 시장에서 파는 오이 맛과 다르다. 지금은 어디에서도 맛볼 수 없다. 싱싱한 채소들은 어머니의 손길이 있었기에 맛볼 수 있었다.

특히 들깨 밭은 길고 넓어 끝이 안 보인다. 여름 내내 잎이 자라면 한 잎한 잎 사료푸대로 꽉 차게 따서 마루에 산처럼 쌓아둔다. 온 가족이 둘러앉아 열 장씩 실로 묶어 놓으면 장에 갔다 파는 일은 아버지가 하신다.

들깻잎은 왜 이리도 잘 자라는지 금방 딸 때가 돌아온다. 우리 집뿐 아니라 온 동네가 깻잎이 돈을 만들어준 셈이다.

 가을 수확 이후 목화솜을 타는 일은 딸들을 시집보내기 위해 어머니는 쉬지 않는다. 이불을 손수 만들어 주기 위한 어머니의 따뜻한 손길이다. 유일하게 우리 집만 딸이 많아서일까? 우리 집만 겨울에도 일이 많았던 거 같다.

 김장철이 되면 앞마당에 가득 쌓아둔 배추를 손수 절여서 김장을 했다. 그렇게 딸들을 시집보내고 김장까지 매년 해주었다. 우리 집 김장이 끝나면 어머니는 바로 다른 집으로 김장을 하러 갔다. 시골사람들의 품앗이는 서로 돕는 문화이다.


 나의 어머니는 작은 체구에 부지런하고 하는 일이 엄청 많았던 걸로 기억된다. 왜소한 몸으로 여러 가지 일하면서도 앓아누워있던 적도 없었다.

어떻게 해내셨을까??

 우리 집 동산 옆에 큰길을 건너면 교회가 있다. 크리스마스에는 새벽 송을 도는 행사가 매년 있었다. 교인들 밥은 우리 집에서 했다. 물론 내 어머니 외에 교인들과 명자어머니도 함께 했다. 그래서 나는 어머니가 원더우먼이 아니었나 생각이 든다.

 내가 지금도 후회가 되는 건 내 어머니와 여행을 한 번도 가지 못한 점이다.

나의 어머니의 부지런하게 움직이는 모습과 환하게 웃는 모습이 떠오른다.     

 

 우리는 돼지갈비를 구워 맛있게 먹고 아쉬운 작별을 했다.

내년 이맘때를 기약하며…….

 이렇게 일 년에 한 번 내 어머니를 뵙는 마음으로, 만남이 오래오래 지속되었으면 좋겠다.

작가의 이전글 첫사랑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