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고초려라며?
"그쪽 사장님이 저의 고등학교 친구인데, 아무튼 삼고초려를 해서라도 모셔 오라고 하십니다."
그렇게 세 번째 직장을 무작정 뛰쳐나오고 나서 직장을 구하는 데, 한 헤드헌터로부터 직원이 300명 정도 되는 중소기업에서 저의 이력서를 보고 면접을 한번 보고 싶어 한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삼고초려란 큰 세력을 세운 조조나 손권에 비해 야망은 그들 못지않게 컸으나 여전히 초라한 변방에 머물러 있었던 유비가 이름 없는 선비였던 제갈량을 찾아갔으나 두 번이나 퇴짜를 맞고 세 번째 찾아가서라도 모셔와야 했던 절박한 형편에서 나온 말입니다.)
저는 여전히 외국계회사에 대한 미련이 있었고, 다시 한국회사로 간다고 할지라도 작은 곳에서 큰 곳으로의 이직은 어렵기에 좀 규모가 있는 중견기업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중소기업의 이 면접 제안이 내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어느덧 제가 실직자가 된 지도 어연 3개월이 지나가고 있었기에 내심 초조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내심 원했고 어렵게 구한 외국계회사에서 2주를 버티지 못하고 나오는 바람에 그동안 3번이나 전화를 한 이 헤드헌터에게서 이렇게까지 이야기를 들으니 더 이상 외면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듣는데 어느 정도 훈련이 되어 있었기에 여기에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물었지만 어쩐지 마음에 확신이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일단 부딪혀 보기로 하고 면접 일정을 잡았습니다.
" M소장님, 이번에 제조본부장으로 입사하게 된 R본부장입니다. 인사하시고 시간을 내어서 공장 견학 좀 시켜 주세요."
면접을 하러 회사에 갔는데 생각보다는 건물도 크고 꽤 규모가 있는 회사였고, 현관 입구에서 만난 C 인사팀장을 따라 회사 건물을 들어가는 동안 낯선 곳에서의 의례껏 느끼는 어색함은 사라지고 마치 한동안 이 회사를 다닌 것처럼 마음이 편했습니다.
(이곳에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구나!)
그리고 면접을 하려 간 자리에서 CEO이셨던 K사장님은 제가 무안해할 정도로 저를 반기시며, 제대로 된 면접을 하지도 않고 마치 제가 입사가 확정된 사람인 것 마냥 저를 이끌고 M연구소장을 비롯한 다른 임원들에게 소개하고 다니셨습니다.
" 외국계 회사에서 엔지니어링을 배우셨다고요?"
K사장님은 그렇게 저를 M연구소장 방에 남겨두고는 나가버리셨고, M소장 또한 저를 이미 동료가 된 듯이 환대를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왜 그렇게까지 저를 환영하는지를 설명해 주셨습니다.
"잘 오셨습니다. 제 생각에 여기 제품은 제조의 엔지니어링 수준이 어느 정도인가 하는 것이 제품의 레벨을 결정한다고 생각합니다."
알고 보니 M소장님도 외국회사 연구소에서 오랫동안 이 제품을 연구하다가 막 한국회사로 옮긴 상태로, 여기에 온 지는 채 2년이 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저를 공장으로 데리고 가 라인을 견학시켜 주셨습니다.
엄격하고 여러 단계를 거치는 까다로운 채용절차를 가지고 있는 외국계기업의 채용과정에 익숙하여 있던 저로서는 상당히 당황스러운 장면이었습니다.
이렇게 무난하게 입사가 결정되는 듯하였는데, 문제는 일주일 후 창업 회장님과 최종 면접을 하는 과정에서 발생하였습니다.
“아니 대학교 학점이 왜 이 모양이야? 대학 다닐 때 놀았구먼!”
이력서를 넣는데 성적증명서를 제출하라는 연락을 받고 그동안 잊고 있었던 악몽이 다시 떠올랐습니다.
그동안 외국계회사를 두 번 다녔고, 계속 외국계회사에 이력서를 내었기 때문에 굳이 저의 아킬레스건이었던 학점을 쓸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한국회사에 지원하니 경력직 지원자에게도 최종학교의 학점이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화기애애했던 사장님과의 1차 면접 분위기는 최종결정권자인 창업회장님과의 2차 면접에서 역전되었습니다.
"아니? 이 사람은 누구야?"
사장님의 인도로 회장님 방에 들어서자 회장님께서는 저 앞에서 대뜸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회장님, 제가 전에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제조본부장 후보라고..."
사장님은 회장님의 이런 시큰둥한 반응을 예상하셨다는 듯이 태연하게 웃으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제조본부장? 아니 그럼 L이사는 어떻게 하고?"
"L이사는 늘 입버릇처럼 말했잖아요? 자신은 좋은 아이템을 가지고 독립하고 싶다고... 신사업본부장으로 보직이동 시키면 됩니다."
그제야 저도 상황이 파악이 되었습니다.
회장님과 사장님 사이에는 제조본부장을 새로 채용하느냐에 관해서 의견 차이가 있었던 것입니다.
"아니 내가 아직 승인하지도 않았는데..."
회장님이 이 말씀을 하셨지만 제가 어쩔 줄 몰라 옆에서 뻘쭘해하고 있는 것을 보시고는, 이것은 아니다라고 생각하셨던 모양입니다.
" 알았어요. K사장은 나가봐요. 뭐 일단 사람이 왔으니 면접이라도 해야지..."
이러니 면접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습니다.
" 아니 왜 굳이 이 회사에 오려고 합니까?"
어색한 질문들이 오가고 나서 회장님은 마지막으로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다.
"예 외국계 회사에서 제조를 하면서 시스템적으로 많이 배운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제조는 연구소에서 시키는 그대로 해야 하니 기술적으로는 재미가 없어서요.
이 회사는 그래도 선진적인 기술을 가지고 있으니 제가 배운 외국회사의 공정능력을 다루는 스킬과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그동안 좀 아쉬웠던 기술적인 부분들에 대하여 저도 배울 수도 있고, 저에겐 나름대로 도전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마도 이 말이 기술자 출신이셨던 회장님의 마음을 움직였는지 모르겠습니다
다행히 그 해가 넘어가기 전에 저는 합격통보를 받았습니다.
"어이 L이사, 이번에 입사한 R부장이야. 면접 때는 자리를 자리에 없어서 인사를 못했지?"
사장님은 제가 출근한 첫날 회사를 직접 돌면서 임원들에게 공식적으로 인사를 시키셨습니다.
"예? 저 사람은 자리가 어딘데요?"
L이사는 뜨악한 표정으로 저를 아래위로 훑어보며 말했습니다.
"아 L이사는 사업부를 차고 독립해야지? 그동안 R부장을 잘 가르쳐 줘. 후임자를 키워놔야 그래야 자네도 독립할 수 있을 거 아냐?"
"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저에게는 미리 언질도 하지 않고 이렇게 뽑으시면 어떡합니까?"
L이사의 툴툴거리는 어투에 사장님께서 답을 못하시고 우물쭈물하시자 L이사는 주위의 직원들이 들으라는 듯이 더욱 큰 소리를 내었습니다.
" 보세요? 앉을자리도 없잖아요? 그럼 아예 당장 제 방을 내어줄까요?"
그러자 사장님께서는 마침 인사와 총무 팀장의 역할을 맡고 있던 C를 돌아보며 말씀하셨습니다.
" 자리? 야 C팀장, 내 생각에는 저 팀장들 자리 좀 한 칸씩 물리고 창가로 한 자리 마련하면 될 것 같은데... 그래도 수석 부장의 지위인데,,, 별도 칸막이도 만들어 주면 될 것 같고..."
" 아 예 사장님, 그렇게 하면 되겠습니다."
C팀장은 일부러 인 듯 L이사 앞을 가로지르며 창가로 가서 제조부 팀장들로 보이는 사람들에게 바로 지시를 하고 있었습니다.
" L이사, R부장 하고 잘해봐."
사장님은 이제 임원들과의 인사가 끝났고 자신의 소임은 다했다고 생각하셨는지 저를 C팀장에게 맡기고 제조본부가 있는 3층을 나가셨습니다.
" R부장님, 이제 저와 함께 가시죠. "
저는 제 자리가 마련되고, 전화, 등이 설치되기까지 꼬박 1주일을 소회의실에서 출퇴근하였습니다.
나중에야 알게 되었지만 L이사는 회장님을 창업시절부터 모셨던 창업멤버였고 말 그대로 생사고락을 같이 한 전우였습니다.
사장님은 기술자 출신이신 회장님께서 회사의 상장을 앞두고 영입한 전문경영인 출신이었고요.
그리고 회사가 어느 정도 성장하자 사장이 되셨고, 마침내 CEO가 되셨지만 회사는 여전히 팔팔하신 회장님 중심으로 돌아갔고, 회장님과 함께 창업을 한 공신들이 회사의 주도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 공신들 중 L이사는 기술분야에서 핵심멤버였는데, 보다 경력이 화려한 M상무가 연구소장으로 새로 입사하면서 L이사는 제조본부장으로 좌천되고 이때부터 회장님 라인의 중심축이 흔들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사장님께서 M소장을 늘 지척에 가까이 두고자 했고, 이어서 사장님의 전 직장 후배인 Q본부장도 품질본부장으로 들여 앉혔습니다.
말 그대로 기존멤버들과 신규멤버들의 줄 서기가 시작되었고, 어느 조직이나 그렇듯이 여기도 세력들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저 또한 본의 아니게 새로운 멤버로서 결국 회장님의 오른팔인 L이사를 견제하고 대체하기 위하여 사장님이 데려오신 멤버라는 소문이 돌았나 봅니다.
삼고초려는 개뿔,
저를 데려오시고자 그렇게 애쓰셨던 것은 사장님의 이러한 속셈을 충족시키는 가장 적절한 배경을 제가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사정도 제가 입사한 지 2년이 지날 즈음 본격적인 회사 매각이 이루어지면서, 회장님과 사장님의 라인들이 거의 모두 제거되는 과정에서 나중에 깨달은 것입니다.
저는 이 글에 이런 고리타분한 정치적 이야기를 이야기하고 싶은 생각이 없으니 이것은 이렇게 간략하게 매듭짓도록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이야기들은 드라마 등에서 하도 많이 우려먹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러한 집안싸움은 외부의 적대세력에 의하여 산산이 부서져 버려 더 이상 전개되지 못하고 사장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 대신 입사 후 2년의 기간 동안 있었던 회사의 성과를 내는 두세 개의 에피소드들을 언급하는 것이 우리들에겐 더 유익할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