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는 비상사태에 빠지고
"본부장님, 저 회사 그만두어야 할 것 같습니다."
어느새 연말이 되었지만 우리들은 연말 분위기를 즐길 수 없었습니다.
새로 온 경영진들이 막상 회사의 관리에는 관심이 없고, 회사의 돈에만 관심을 갖고 대외적으로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는 것을 내외부에서는 불안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상황에서, 그 해 겨울 U부장은 마침내 한계가 왔는지 저에게 자신이 회사를 그만두어야겠다고 말하였습니다.
바로 옆에서 지켜보는데, O대표이사가 대표 인감을 남용하고 있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요? 그럼 대표인감을 받아 기지고 있다가 달라고 해도 주지 않으면 되잖아요?
그리고 대표인감을 찍을 때는 대표인감 사용리스트도 작성하는 것이 룰이라고 하고..."
"예 그러면 뭐 합니까? 대표이사는 인감을 다시 따로 파고 법인 인감이라고 다시 신고하면 되는걸요.
실제적으로 대표이사가 마음만 먹으면 당장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없어요."
그러던 어느 날 O대표이사가 급기야는 회사의 자사주를 건드린 것 같아서, O대표이사에게 회사의 자사주를 자신에게 직접 보여달라고 하였더니, 계속 보여주겠다고 말하고는 차일피일 시간을 끌고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연말까지 자사주를 돌려놓지 않으면, 횡령죄로 고발하겠다고 엄포를 놨지만, 사실 대표이사를 고발할 권리가 종업원인 자기에게 있지 않아서 마냥 지켜봐야 하는 것이 괴롭다며 저에게 호소하곤 했습니다.
그렇다고 뚜렷한 증거도 없이 형사 고발할 수도 없는 듯하고, 그래서 안절부절못하다가, 더 이상 회사를 다닐 수 없어 결국 회사를 떠나기로 결심한 모양이었습니다.
"그리고 C팀장이 정말 이상한 것을 발견했어요."
O대표이사와 관련된 의문은 끝이 없는 듯했습니다.
"아시다시피 내년에 정기주주총회를 개최하기 위해서는 올해 말 기준으로 주주명단을 fix 하여 주주총회 공지를 내보내야 합니다.
어느 정도 지분이 되는 사람들한테는 소집 통지서를 날려야 하고요. 그래서 C팀장이 주주명단을 받았는데, 글쎄 그 명단에는 O대표이사 일행의 주권이 없어요."
"예? 그건 무슨 말이죠?"
"예 그들이 더 이상 우리 회사의 주주들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자기가 소유한 주식을 다 팔아버린 것 같아요."
'이건 또 무슨 마른하늘에 날벼락같은 일이지'
그러나 저는 U부장을 한사코 잡았습니다.
“U부장님은 내가 떠나기 전에는 결코 떠나서는 안 됩니다. 아마 나도 이 조직을 포기하고 떠나야 할 때가 올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때까지 U부장님은 남아야 합니다. 제가 떠나게 되면 U부장님이 떠나시든 말든 그것은 더 이상 상관 안 합니다.
지금 떠나면 이 사람들은 이 모든 책임을 당신에게 지울 것입니다.
아무튼 안 됩니다. 제가 떠나기 전엔 떠나지 마세요”
저는 앞서도 말했지만 이 회사를 떠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회사의 내막을 자세히 알고 있는 U부장이 회사를 떠나면 O대표이사 일행들의 만행을 감시할 유일한 사람을 잃는 것 같아 단호하게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연말에 인사발표가 났는데 U부장이 이사로 진급되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아마도 U부장이 회사를 퇴사한다고 하니까 이사로 승진시켜 마음을 달래고, 다른 한편으로는 협조를 잘하라는 뜻으로 이해되었습니다.
그리고 U부장, L이사 보다 나이가 서너 살 많고 어느새 기존 관리직 직원들 중에 가장 나이가 많은 처지가 된 저도 그냥 두기 뭐 했는지 이사로 진급되었습니다.
말 그대로 별을 달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사라고 월급이 올라간 것도 아니고 업무도 달라진 것도 없고, 처우가 달라진 것도 없고, 동료의 축하나 경영진들의 별다른 지사도 없는 김 빠진 맥주 같은 승진이었습니다.
그리고 약 한 달 뒤 새해가 되고 얼마 후 저는 비상대책위원장을 맡게 되었는데, 이때 아마도 그때를 대비해서 진급을 시키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얼핏 들었습니다.
(만약 부장에 머물렀다면, 아마도 유일한 임원인 L이사가 비상대책위원장이 되었거나, 비상대책위원장을 혹 제가 맡는다 하더라도 결국 임원인 L이사의 지시에 따라야 해서 명분만 남은 자리가 될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복집에서 회동 한 날 저는 비상대책위원장을 맡는 것에 대하여 동의를 하였고 오후에 회사를 퇴근하여 개인적인 일들을 마쳤습니다.
그리고 생전 처음으로 회사의 공시라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 혹시나 하여 회사 홈페이지를 열어보았습니다.
거기에는 일련의 충격적인 공시가 줄줄이 나있었습니다.
그 주된 내용은 저희 회사가 그동안 공시를 해야 할 예닐곱 가지의 사건들에 대하여 공시를 하지 않았고 이번에 몰아서 공시를 한다는 것이 골자였습니다.
이러한 불성실한 공시의 결과로 벌점들이 쌓여서 결국 거래소에서는 저의 회사의 주식을 거래정지를 시키는 것에 대하여 검토하기로 결정하였다는 소식까지 있었습니다.
이러한 공시가 뜨자, 지정한 거래 정지기간 이전 며칠 동안 저희 회사 주식은 급격하게 폭락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저희 주식은 거래 정지가 되고, 회사는 상장폐지 여부를 심사하는 단계까지 이르게 됩니다.
이러한 공시 내용 중에는 회장님과 O대표이사 간에 이루어진 매각 거래에 관한 것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보통 회사의 대주주의 주식을 매매하는 과정에서, 매수자는 매각하는 자에게 계약금을 지불하여 계약이 성사됩니다.
그러나 통상적으로 잔금을 치르는 기간이 있기 때문에 그 기간 동안은 매각인이 다른 사람에게 증권을 매매하지 못하도록 그 증권을 제삼자 에스크로에 맡기게 됩니다.
일종의 공탁제도입니다.
그리고 매수자가 잔금을 치르게 되면, 매수자는 그것을 맡고 있는 기관에서 그 증권을 받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의 매매과정에서 잔금이 지불되기 전에 회장님께서 에스크로에 맡긴 주식을 찾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양자의 합의하에 에스크로에 맡긴 주식을 회장님께서 찾으셨다는 것으로 매수자인 O대표이사가 이것에 동의하였다는 것을 의미하였습니다.
이 공시 내용을 보면서 작년 계약이 성립될 때, 재무의 IR을 맡았던 F팀장이 저에게 애기한 내용이 떠올랐습니다.
"본부장님, 제가 몇 번을 회장님께 말씀드렸어요.
회장님 이번 계약 건 위험합니다. 그들은 돈도 제대로 마련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재무팀의 F차장은 회사에 입사한 지 6개월도 안되었지만 머리가 스마트해 회장님의 개인 계좌도 관리할 만큼 신임을 받았습니다.
저는 신입사원 교육을 맡아 그를 공장을 견학시켜 주면서 아무래도 IR (investor relation) 업무를 맡을 사람이라 우리 회사의 경쟁력에 대해서 저 나름의 견해를 피력하였고, 이를 통하여 그의 신뢰를 얻은 듯합니다.
저로서도 개인적인 투자 자문도 받을 수 있어서 가까이했던 친구였습니다.
그 친구도 회사 관련하여 고민이 있으면 우리의 아지트인 옥상에서 저를 불러내었습니다.
"그렇게 계약금을 받았는데 잔금을 받기로 한 날이 되도록 잔금을 주지 않는 겁니다.
그리고 잔금을 주기로 한 날을 계속 연기하고... 송금도 일억 씩 찔끔찔끔 쏘고."
그때 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어 그냥 수긍한다는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말씀드려도 회장님은 그건 자네가 걱정할 부분이 아니야라고 하시면서..."
이제야 이 계약을 둘러싼 정황이 이해가 되었습니다.
아마도 O대표이사가 초기에 약속하였던 거액의 매매대금을 확보할 여력이 되지 않자, 회장님에게 이야기하였고, 회장님은 공탁을 걸어둔 주식을 찾아서 O대표이사에게 넘기고, O대표이사는 이 주식을 담보로 하던가, 혹은 이 주식을 매각하여 자금을 확보한 모양입니다.
그리고 그 돈으로 잔금을 치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당사자들이 합의를 하였으니 이것이 무슨 문제가 되는가 생각하실 수 있으나, 이것은 경영권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행위라 모든 이해관계자들이 알 수 있도록 공시를 했어야 하는데, 공시를 하지 않은 것이 큰 문제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상황들이다 보니 이 M&A 계약이 발표된 시점 이후 시장에서는 매수자의 정체가 불투명하여 우리 회사의 미래에 대하여 비관적으로 반응하였기에 주식의 가격이 계속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거기에다가 아마도 회장님의 주식들도 이 과정에서 시장에 매물로 나왔거나, 담보로 잡혔다 하더라도 담보를 받은 사람이 떨어지는 주식을 가지고 있을 리 만무하여 결국 불안한 마음에 시장에 팔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그럼 주식은 또 떨어지고, 그럼 주식을 담보로 자금을 융통하기 더욱 어려워지고...
그렇게 O대표이사 뒤에서 실제로 자금을 관리하고 있던 K회장과 그 무리들은 막대한 손해를 보게 되었고, 그 손실을 메우기 위하여 회사의 주식까지도 불법으로 시장에 매각해 채권자들의 부채들을 갚게 되는 악순환이 반복된 모양입니다.
결국 이 공시는 우리 회사에 현재 소유권을 가진 오너가 없으니, 사실 우리 회사는 무주공산이 되었다는 것을 모두에게 공표를 한 셈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먼저 먹는 사람이 임자다'라고 회사의 소유권에 탐을 내고 있었던 세력들에게 활짝 대문이 열렸습니다.
(여기서 적대적 M&A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회사를 경영하기 위해서 인수하는 것이 아니라 회사의 사업부나, 자산(부동산이나 지적재산권)을 쪼개어 매각하고 회사를 청산하는 것을 목표로 회사를 인수하는 것을 말합니다.
만약 우리 회사의 건물 가격만 250억이 넘는 것으로 추정한다면 100억을 투자해서 인수하면 부동산만 매각해도 두 배의 수익을 얻게 됩니다.
결국 회사는 문을 닫고 기존의 소액 주주들의 주식은 휴지조각이 되어 모든 주주들이 깡통을 차게 되고, 종업원들은 실직상태가 됩니다.
그때 우리 회사의 최대 주주가 전체 주식의 4%도 채 되지 않는 주식을 가지고 있는 개인이었다는 것을 전제로 하면, 결국 우리 회사는 이 4%가 넘는 소액만으로도 회사를 살 수 있게 되어 적대적 M&A의 가장 쉬운 먹잇감이 된 셈이었습니다.)
"자 여러분들은 어제 공시를 보셨습니다. 지금 O대표 일행은 회사 주식이 없습니다.
더 이상 오너가 아닙니다. 그리고 그들은 회사 주식을 횡령하여 고소를 당했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경영권을 잃어버린 것은 아닙니다. 법적 판결이 날 동안 법적으로는 회사의 대표입니다.
그동안 무슨 짓을 할 줄 모릅니다.
따라서 우리 종업원들은 똘똘 뭉쳐 O대표 일당으로부터 회사를 지켜야 합니다. 회사의 주인이 나타날 때까지요."
공시가 발표된 다음날 팀장 이상 사람들이 모두 대회의실에 모였습니다.
다들 처음 겪는 경험이라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데 C팀장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모두를 집결시켰습니다.
C팀장은 현재의 상황을 설명한 후 여기에 모인 팀장 이상급의 멤버를 회의체로 하는 비상대책위원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하며 오늘 비상대책위원장을 뽑아야 하니 후보를 추천해 달라고 말을 하였습니다.
"저는 R본부장님을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추천합니다."
C팀장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연구소의 한 팀장이 일어나 저를 추천하였습니다.
"제청합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관리본부의 한 팀장이 곧 일어나 말을 받았습니다.
"혹시 다른 사람 추천하실 분 없습니까?"
C팀장은 이 말을 한 후 의례적인 질문이 아니라는 것을 모두가 인식할 정도로 약간의 뜸을 들인 후 말을 이어갔습니다.
"그럼 다른 후보가 없으니 비성대책위원장은 단독 출마로 R이사님이 확정되신 갓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모두의 시선이 저에게 쏠리는 것을 느꼈습니다.
순간 회의실에는 정적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이사님 저는 이사님이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지 않겠다고 하실까 봐 내심 얼마나 쫄았는지 모릅니다."
그 정적이 U이사에게는 한없이 길었나 봅니다.
"사실 어제 연구소 팀장에게 너는 R본부장님을 추천하라, 관리본부 팀장에게 너는 바로 제청하라, 미리 시나리오를 짜 두었거든요."
회의가 끝난 후 U이사가 쪼르르 달려와 안도의 한숨을 쉬며 말했습니다.
제가 아무 말 않고 침묵하고 있었던 이유는 그때까지도 이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확신이 서지 않아서 계속 하나님의 뜻을 묻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선뜻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은 혹여 이런 일들에 항상 그렇듯이 저에 대하여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 고스톱을 짜고 친다는 비판을 할 수 있는 빌미를 주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생각할 시간을 주어 이것 외에 별다른 대안이 없다는 것을 모두에게 인식시켜야 했습니다.
이윽고 저는 천천히 일어났습니다.
“예, 모두가 동의한다면, 비상대책위원장을 제가 맡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러한 사태에 대한 경험이 없습니다.
따라서 비상대책위원장을 무엇인가를 독자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자리로 생각하지 않고, 비상대책위원회원이신 여러분들의 의견을 듣고, 그 의견을 대표하는 자리로 생각하고 행동하겠습니다.
모든 일은 이 비상대책위원회에 상의하고, 그 상의 결과들을 전달해 주는 자리로 알고 이를 받아들이겠습니다. “
그러나 저는 이 비상대책위원장이 급하게 결정되는 분위기에서 분명히 못 박아야 할 것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여기에는 저 말고, 두 분의 이사님이 계십니다. 그분들의 의견도 들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R이사님이 비상대책위원장을 맡는 것에 동의하고 전적으로 지지합니다."
U이사는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반응을 보였습니다.
이제 모두의 시선은 중앙의 자리에 버티고 앉아 있는 회사의 터줏대감이자 실질적으로 가장 선임인 L이사에게로 향했습니다.
"모두의 뜻이 그렇다는데... 저도 어쩔 수 없지요"
L이사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마지못해 회사의 종업원을 대표하는 자리에 제가 앉는 것을 동의하였습니다.
그러나 비상대책위원장의 자리가 종업원으로서 얼마나 위태로운 자리인지 결국 누가 회사의 주인이 되더라도 자신은 회사를 떠나야 하는 처지에 몰리게 된다는 것을 이때는 미처 인지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외부에서는 이 회사의 소유권(아니 이를 통해서 사욕을 챙길 수 있는 기회)에 탐을 내고 있었던 세력들이 다시 수면 위로 머리를 들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가장 빨리 움직인 사람이 앞에서 말한 바 우리 회사가 첫 매각협상에 실패하자 두 번째 매각 협상을 주도하고 있다가 한밤중에 홍두깨 꼴로 뒤통수를 맞아 맥없이 물러나야 했던 H감사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