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부자들
"어 R본부장 고생이 많지?"
그러고 보니 사장님께서 저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거신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내가 오랫동안 알았던 회장님이 회사를 인수하시기로 하셨어.
아주 훌륭하신 분이고 상당한 재력가이신데 결국 회사에 투자하시겠다고 하셨으니 R본부장이 비상대책위원장으로서 협조해 주도록 해요"
마치 자신이 모든 것을 결정했으니 저는 따라야 한다는 지시를 내리시는 것처럼 들렸습니다.
다음날 J회장님은 자사 소속의 경영진들과 한국최고의 Law form 소속의 변호사를 데리고 왔습니다.
서로에 대한 상견례 자리에 O대표이사가 홀로 참석했고, 기존의 임원진들인 L이사, U이사 그리고 비상대책위원장인 제가 참석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제삼자 배정 유상증자를 실현하기 위한 실사를 위한 MOU계약이 맺어졌습니다.
그런데 이 자리에는 양쪽에 소속되어 있지 않으면서도 이 모임의 중개인 역할을 자처하는 사람이 있어서 자신이 이 자리의 주인공인양 유난을 떨고 있었습니다.
'어디서 봤을까?'
한참을 기억을 더듬다 보니 1년여 전 회장님 이하 임원들이 가진 한 회식자리를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그날은 회장님과 사장님 등 임원진들이 회식을 하고 2차로 맥주를 마시고 있을 때였습니다.
누가 불렀는지 갑자기 전혀 모르는 사람이 우리들의 모임에 참석하였는데, 모두들 다 한 가족처럼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것입니다.
저는 한국말이 어눌하면서 헤어스타일 등이 짧게 날 서있어서, 우리가 최근 중국에 투자하여 법인을 세웠는데, 아마 중국 법인장으로 세운 중국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중국에 좀 경험이 있다 보니 조선족은 한국말을 잘하니, 말을 떠듬거리는 것으로 보아 한족인가 보다 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평소에 술을 잘 드시지 않던 사장님에게 술을 강권하면서 결국 맥주잔을 원샷하도록 하는 모습을 보면서 친근함을 넘어 좀 무례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알고 보니 미국에서 자란 재미동포였는데 요즘 한국에서는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은 그 권리를 존중하여 강권하지 않는 것이 관례가 되었고, 이 회식 자리도 회사의 경영진들이라 서로에 대한 예의로 술을 강권하지 않으며 편안하게 담소를 나누고 있는데, 어디서 배웠는지 이것이 여전히 한국사회의 관습인 마냥 그것도 회사의 대표이사에게 남들 앞에서 강권하는 모습에서 소위 '웬 오버야' 하면서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리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저는 이 회사에 오면서 술을 안 마시는 사람으로 선언하였기 때문에 술고래이신 회장님조차도 저에겐 술을 권하시진 않습니다.
그란데 술이 거나하게 취한 채 옆에서 콜라를 마시고 있는 저에게도 맥주잔을 주면서 원샷하라고 강권하는 것입니다.
제가 술을 옷마시니 죄송하다고 말씀드리자 '이게 뭔 경우야' 하는 표정으로 이해할 수 없다며 저에게 재차 강권하는 것입니다.
저를 애지중지하시며 술을 마시지 않는 것에 대하여도 존중해주셨던 사장님께서 이 장면을 보다 못해 그럼 당신이 대신 원샷하겠다고 나서시는 바람에 이것은 도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제가 단숨에 500ml 잔을 비워버리자 '그것 봐라' 하면서 웃어젖히는 것입니다.
그것이 F에 대한 저의 첫인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F가 이 계약의 뚜쟁이로서 회사에 갑자기 등장한 것입니다.
J회장님은 그래도 공식적으로 정문을 통하여 들어오셨고, 코스닥에 등록된 상장회사를 거느리고 계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리고 투자도 그룹의 한 계열사인 이 상장회사의 이름으로 들어왔으니 제 판단으로는 상장사의 주가를 위해서라도 다른 개인들처럼 회사를 함부로 쪼개어 팔 위험이 적다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상견례 이후 이루어진 실사단 회의도 인수 여부를 결정하기 위한 조사가 아니라 경영을 시작하기 위한 미팅이고 투자금을 조달하기 위해서는 얼마간의 기간이 필요하니 좀 기다려달라는 분위기로 인수가 확정된 듯이 모든 일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요즘 같은 정보화 시대에서 J회장님의 이런 파격적인 접근에 사실 그 진위에 대해서 의심부터 들어야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F는 미국에 우리 제품을 판매하는 중간상이었지만 모든 제품이 그렇듯 우리 제품도 미국시장이 가장 크고 우리 제품이 세계적으로 인정받기 위해 반드시 진출해야 하는 시장인 만큼 미국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F는 회사의 매각 전에 미국시장에 낯설고 영어울럼증이 있는 보통의 한국인이신 창업회장님이나 사장님에게는 지척에 두고 싶어 하는 부류의 인물이었습니다.
더구나 사장님과는 동년배라 서로 친구 하기로 하고 막역하게 지냈고 이번 O대표의 인수가 문제를 일으키자 F가 사장님 대신 나서서 거의 3개월 동안 매일같이 J회장님을 만나 뵙고 설득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본부장님 그럼 회사는 상장폐지가 되지 않을까요?"
회사의 주인이 누가 되는가 하는 것은 비단 주주들 뿐만 아니라 종업원들에게도 초미의 관심사였습니다.
J회장님과의 MOU는 아직까지는 법적인 구속력이 없다 하더라도 이전과는 다른 진정성이 있는 느낌이 있었기에 저는 최소한 저의 밑에 있는 직원들을 소집하여 이 소식을 전하고 개략적인 설명을 하였습니다.
종업원들 중에는 회사 주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서 역시 상장 폐지의 문제가 가장 큰 걱정거리였나 봅니다.
"예 조심스럽지만 제 생각으로는 상장폐지의 요건 중 가장 큰 장애물은 넘은 듯합니다."
상장폐지 결정을 하게끔 하는 가장 큰 리스크, 오너의 부재 문제는 이제 거의 해결되었다고 판단하였던 것입니다.
"본부장님, 어제 본부장님이 말씀하신 것 주주방에 떴어요"
그날 오후 품질의 E과장이 저에게 달려와 전달해 주었습니다.
내부의 모든 사정들이 외부로 새어나가 주주들에게 공유되고 있음을 새삼 다시 깨닫게 되었습니다.
"여보, 난 당신 회사 O대표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아요"
이제 마음이 놓여 그간 상황을 아내에게 말하고는 비로소 발 뻗고 자게 되었다는 순진한 생각을 전하였는데, 아내는 당사자로서 상황에 쏙 빠져 객관적인 시각을 갖지 못하던 저에게 이떄도 제삼자의 입장에서 사태를 바라보게 하였습니다.
현재 회사에서 가장 어려운 상태에 있는 사람이 누군가 하는 것이었는데, 아내는 자신이 봤을 때 O대표이사가 가장 곤란한 상황이라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었습니다.
지금까지의 상황을 보면, 실제적으로 돈을 투자하고 빼돌린 사람은 K회장과 S이사로 보이는데 O대표이사는 들러리로 서고 법적으로 횡령과 배임 혐의로 가장 큰 곤란을 겪고 있습니다.
그리고 얻은 정보로는 O대표이사의 아버지가 큰 부동산을 갖고 있는 유력가이고, O대표이사가 매수 대금을 빌리려 다닐 때는 자신의 아버지의 자산을 보증하고 돈을 빌리려 다녔다는 소문이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아들이 지금 감옥에 가게 되었는데 왜 아버지는 가만히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이 상황에서 주가가 폭락되어 누구든 지금 시세로 저렴한 비용으로 회사의 소유권을 쥘 수 있게 된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회사를 사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당신에게 접촉하는 것을 보면 이 회사는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어 보이는데 정작 O대표의 아버지는 뭐 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내가 당사자라면 자신이 돈을 대어 O대표이사가 저지른 일을 돈으로 메워주면서, 회사의 주식을 저가로 매입하여 회사를 소유할 수 있는 상황인데 왜 가만히 있느냐는 의문이었습니다.
더구나 다들 상장폐지를 걱정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오히려 회사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상장폐지가 자신들이 저가로 회사의 소유권을 차지할 수 있는 호기이고, O대표이사가 그 주도권을 쥐고 있으니 지금 메꾸고 그냥 안고 있으면 결국 상장폐지가 되어도 최대 수혜자는 자신이 될 수 있지 않겠냐 하는 것입니다.
회사의 투자니 그런 것에는 문외한이 아내조차 그런 생각이 들었으니 이번 상황이 저희 같은 종업원들이야 예상하지 못하는 딴 꿍꿍이속이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자 이 사건에 중요한 영향을 끼치는 사람들을 연결해 주는 하나의 접촉점(contact point) 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O대표이사와 Q씨, D사장. 그리고 D사장이 데리고 오려고 하는 G회사. J회장님까지 하나의 점에서 다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그때는 생사의 갈림길에 있았기에 그런 발칙한 생각을 할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지금에서 보면 그것은 당연한 수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사람에게는 어떤 계획에 의하여 이러한 네트워크 형성을 만약을 대비한 경영의 일환, 수익을 극대화하려는 경영활동으로 검토의 대상이 될 수 있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어디까지가 오리지널 계획이었고 어디까지가 예기치 못한 상황에 대한 임시대응이었는지는 미지의 세계로 남겨졌지만 말입니다.
이것 역시 전지적 독자시점으로 독자들에게 남겨둡니다.)
그리고 어쩌면 저는 꼭두각시 인형처럼 그 설계자의 계획대로 움직이는 장기판의 말에 불과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부자들'이란 영화에서 주연을 맡아 청룡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은 모배우의 수상소감이 생각이 납니다.
“처음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는 설마 이러한 상황들이 현실일까?
영화가 너무 과장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였다.
그러나 지금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 오히려 현실이 영화를 이겨버린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래서 저는 매트릭스의 주인공처럼 저를 이 설계된 세계에 두고 저를 꼭두각시처럼 조종하는 끈으로 행동한 key man을 통하여 한번 설계자에게로 가는 문을 노크해 보기로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