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2
"아빠가 너만큼 어렸을 땐, 버스카드란 게 없었어."
"그럼 아빠는 어떻게 지하철 탔어?"
"아빠의 아빠가 표를 끊어줬지. 주황색으로 되어 있던."
여섯 살짜리 소년의 손은 산나물처럼 성글다. 남자는 외투 주머니에 소년의 한 손을 찔러 넣는다. 한참 아래에서 자신을 올려다보는 소년을 위해 서른이 넘은 남자는 자신의 다리 보폭을 벌려 키를 낮춰 준다. 두 사람은 마주보고 선 채 서로를 잠시 마주본다. 소년의 눈은 여자와 지금은 없는 어떤 중년 남성을 닮아 있다. 쌍꺼풀과 눈을 아예 덮어버리는 긴 속눈썹, 남자는 소년이 자신에게서 눈을 땔때까지 쳐다본다. 천장에서 반 쯤 기계음이 섞인 안내음이 새어 나온다. 바퀴가 선로에 마찰하는 소리가 거새지며 점점 전철은 속도를 낮추어 간다. 남자는 반대편 손으로 자세를 낮춰 소년의 어깨를 붙잡는다. 열차가 정지한다. 관성으로 모든 것이 뒤로 밀릴 때 남자는 최대한 꿈쩍하지 않는다.
"직장생활은 하지 마. 아빠처럼 되기 싫으면. 아빠가 벌어둔 걸로 네가 원하는 거 하며 살아."
새벽 세 시였다. 스물하나 소년은 누군가가 자신의 어깨를 두드려서 몸만 겨우 일으켰다. 산책을 나가야 하겠다. 누렇게 뜬 오십대 남자의 얼굴이 소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소년은 휴대전화 라이트를 따라 시선을 병상 난간으로 고정했다. 병상 난간에 걸린 클립은 좀처럼 떼어지지 않았다. 잠결에 손을 버벅거리느라 소년은 클립을 떼는데 한참 걸렸고 남자의 재촉을 들어야 했다. 클립 옆에는 누런 액체가 담긴 팩이 들어 있었다. 팩이 걸린 클립을 링거걸이로 옮겨놔야 링거걸이를 지팡이 삼아 남자가 움직일 수 있었다. 남자는 혼자서 걸음을 제대로 할 수 없어 소년의 부축을 받아야 했다. 육인실을 조용히 빠져나와 소년은 남자와 함께 병동 복도를 한 바퀴 걸었다. 병동 창가에는 다른 쪽 건물이 비치고 있었고 어둠과 푸른 빛이 뒤섞인 공기가 바깥에 감돌았다. 형광등으로 눈부신 복도에 소년의 동공은 잠시 기지개를 펴야 했다. 남자는 복도를 절반 쯤 걸었을 때 소년에게 지나치듯 유언을 읊었다. 대장암은 직장생활을 하면 오는 병인 듯했다. 정확히는 과음을 해야만 찾아오는 병이라고 소년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암이라는 녀석은 대장에서 사라졌다가 다시 간으로 옮겨갔다. 남자는 간이 붙어 있는 몸 쪽에 관을 하나 꽂아야 했다. 관을 따라 이어진 팩에 노란 액체가 점점 찰수록 남자는 숨이 멎어간다고 했다.
종이팩 안에 든 주황빛 액체가 하얀 플라스틱 빨대를 따라 여섯 살짜리 소년의 입으로 들어간다. 천천히 마셔, 사레 들려. 서른이 넘은 남자는 소년을 의자에 앉혀 놓고 휴대전화 화면을 응시한다. 저녁 여섯 시, 여섯 살짜리가 밥을 먹어야할 타이밍이다. 역 안에 국수집이 남자의 눈에 들어온다. 음료수를 먼저 마시면 애가 밥을 덜 먹을 거란 것을 알지만 소년은 열차 안에서부터 갈증을 느껴왔다. 남자가 생수를 권하니 소년은 고개를 홱홱 저으며 오랜지 주스를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아빠는 어렸을 때 오랜지 주스를 저녁 먹기 전엔 먹지 않았어. 하지만 난 아빠가 아닌 걸. 소년이 음료수를 다 마시고 난 뒤 남자는 음료수팩을 양철로 된 쓰레기통에 버린다. 소년의 손을 열차에서처럼 잡고서 남자는 국수집으로 가서 국수 한 그릇을 주문한다. 젓가락을 가져오고 물을 한 사발 퍼오고 소년이 휴대전화로 게임을 하겠다는 걸 말려보다가 남자는 자신의 휴대전화를 줘버린다. 국수가 나오고 나서야 남자는 소년을 겨우 휴대전화에서 떼어놓고 예비 접시에다가 면을 몇 가닥 건져내 소년에게 내어준다. 포크 한 자루, 소년은 포크로 면발을 쿡 찍어 신사답게 면을 훌쩍인다.
"나 회사 잘렸어. 애는 내가 데려고 집에 갈게."
오십대 남자가 유언하거나 기도하는 건 몽땅 허사가 되고 말았다. 월급쟁이로 살지 말란 소리를 스물하나짜리 소년은 지킬 수 없었다. 대학 복학하면 여자친구도 사귀어보라는 유언도 바람으로 남았다. 새벽 창가로 비치는 어둠은 소년의 피부색이었다. 소년은 자신과 같은 어둠을 가진 소녀를 찾을 수 없었고 소녀들은 소년의 어둠을 보고서 도망가버렸다. 남자의 어미는 소년이 후레자식 소리를 듣지 않길 바랬다. 다만, 소년의 어미에게는 팔짜 사나운 년이란 소리를 하고는 했다. 소년의 집은 항상 새벽처럼 그늘져 있었다. 소년이 남자의 어미, 할미의 집에 마지막으로 왔을 적에 소년은 이미 남자가 되어 있었다. 남자가 소년을 낳았을 나이에 소년은 남자가 되어 직장에 목을 메었다.
"어른이 되면, 네가 아빠보다 더 커질 거야."
남자도 주황색 티켓을 신기하게 쳐다볼 적엔 자신의 아버지가 태산 같아 보였다. 소년의 동그란 눈을 보면서 순간 남자는 이십대 어느 소년을 떠올려본다. 차창으로 서른 즈음의 남자의 옅은 미소가 비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