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분위기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아 에어비앤비를 통하여 새로운 숙소를 정했다.
차에 짐을 싣고 오전에 케이프타운 한 바퀴를 하고 오후에 숙소로 갈 예정이었다.
이왕 나선 김에 멀리 떨어져 있는 희망봉에 갔다 오자고 의견이 모아져 방향을 잡았다.
가는 도중에 비가 뚝 뚝 창문을 두드리는데 차량의 윈도와이퍼가 영 엉망이다.
북북 거리며 소리도 크게 나고 윈도 워셔도 없었다.
차를 공항 렌터카 사무실로 돌려 차량교체 요청을 하러 갔다.
반납창구에 가서 차량 결함을 이야기하고 교체를 했는데 이번에는 구글맵 화면 디스플레이어가 없었다.
한 번에 입맛대로 되는 게 없으니 답답하다.
구글맵이 없으면 운전을 못한다고 재차 차량의 교체를 요구하였다.
책임자 되는 사람이 나와서 죄송하다며 차량을 찾아보고 새로운 차를 가지고 오겠다고 하면서 사무실 쪽으로 갔다.
얼마 지나자 교체된 차량을 가지고 다시 와서는 이 차는 괜찮을 거라고 말했다.
그래 믿어볼게.
그러나 할 말은 해야지.
나는 차 때문에 아까운 시간을 많이 허비했다고 한 소리 하고 새로운 차를 받아서 희망봉으로 달렸다.
희망봉은 케이프 포인트라고도 하는데 15세기 후반 대항해시대의 개막을 알린다.
포르투갈의 엔히크가 아프리카 서남해안을 거쳐 인도로 가는 항로를 모색하다가 사망하자 그 뒤를 이어 디아스가 1488년에 아프리카 남단에 도착했다.
심한 폭풍우 속에서 발견했다고 하여 이곳을 '폭풍의 곶'이라 했다.
포르투갈 국왕 후앙 2세가 미래의 희망을 시사하는 뜻에서 희망봉으로 개명하였다고 한다.
9년 후 희망봉 길을 애 돌아 인도항로 개척을 바스코 다 가마가 성공시켰다고 한다.
이런 역사적인 사실과 아프리카 대륙의 최남단 가까이 왔다는 게 내게는 의미가 있었다.
희망봉이 최남단이라고 흔히들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실제로는 아굴라스 곶 서쪽의 해안 절벽이란다.
가는 도중에 벼리가
"희망봉 가면 뭐해요? 나는 보기 싫은데."
"여기까지 왔으면 희망봉을 보고 가야지요."
벼리는 가기 싫다면서 말문을 닫았다.
혼자 가기도 그렇고 안 가기도 그렇고 난처한 입장이다.
그러는 가운데 차는 매표소 입구로 미끄러지듯 진입하고 있었다.
희망봉은 국립공원으로 지정하여 운영하고 있는데 입장료가 현지인에 비하여 외국인들은 4배 정도 비싼 가격으로 일인당 26,000원을 받고 있었다.
이제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다.
주차를 하고 높은 언덕을 올라가는 길은 완만하고 걷기에 좋았다.
이런 길을 좋아하며 잘 걷던 벼리는 뚝 떨어져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오른쪽 바다에서는 고래가 춤을 추듯 호흡하며 물길질을 하고, 왼쪽 바다에는 상어인지 참치인지 확실치 않은 큰 물체가 점핑을 하면서 물보라를 일으켰다.
대서양과 인도양이 만나는 이곳에서 항해하던 배들이 왔다 갔다 했을 먼 옛날의 용기 있는 이들을 떠올리니 그 무리 속에서 같이 생사고락을 한 것 같은 느낌이다.
'와 여기다.'
'우리가 해냈다. 야호~'
나의 상상이다.
거친 물살을 헤치며 모험을 했던 선원들이 고비고비 어려움을 넘고 헤치며 도착했을 그들의 마음이 조금은 이해가 갔다.
그에 비할 수는 없지만 굽이 굽이 작고 큰 일들을 겪으면서 우리도 아프리카 여기까지 왔다.
어릴 적 운동회 때의 장애물 넘기 경기를 하고 있는 것 같다.
거친 파도가 바위에 와서 철썩대며 일으키는 하얀 물보라가 해안가 주변에 넓게 자리 잡았다.
바다의 푸른색과 부서지는 물거품의 하얀색의 경계가 뚜렷했으며, 두 색깔의 조화와 험한 절벽까지 어우러져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아주 멋진 곳에서 벼리에게 변고가 생겼다.
며칠 전부터 조그마한 일이 생기면 기분이 다운되다가 구경을 하면서 다니면 회복되다가를 반복했다.
하염없이 바다만 바라보며 꼼짝도 하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사진도 찍기 싫다고 했다.
희망봉에서 벼리는 희망을 잃어버렸다고 한다.
향수병에 걸린 것 같다.
향수병은 잘 낫지도 않는다는데 어쩌면 좋을까?
자유여행이 힘들지만 그만큼 의미가 있고 이것이 나의 인생에서 어떤 의미가 될지 짐작하고 있기에 열심히 재밌게 하고 있는데 벼리는 지금...
벼리에게는 이런 철학적 요소가 없어 정신적 지지대가 없는 것 같다.
편하고 여유 있고 재밌는 볼거리만 좋아한다.
벼리 여행 스타일대로 살랑살랑거리면서 편하게 여행하기도 하는데 기간이 길다 보니 예기치 않은 일이 생기면 그런 일을 겪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럴 때 벼리는 기분이 다운된다.
며칠 더 이야기해보고 안 되면 조치를 해야 할 듯하다.
희망봉에 와서 희망을 잃어버린 벼리를 보니 마음이 착잡하다.
평소에 우리나라에서 하던 모습과 달라서 옆에서 보는 나도 적응이 안 되고 힘들었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 생겼으니...
벼리는 여려 보여도 내공이 깊은데 마음을 앓고 있으니 큰 일이다.
우리나라로 갔으면 좋겠다고 했다.
유럽에서도 여행 기간이 길어 힘들다고 해서 먼저 귀국하라고 이야기했는데도 아프리카까지 와서는 같이 들어가자고 한다.
다행히 조금 안정이 되었는지 내려가려고 하니 저기 가보자며 손짓을 했다.
바다가 훤히 보이는 오솔길은 황토 흙으로 걷기에 아주 편았다.
벼리는 이런 길을 좋아하며 한없이 걷기를 원한다.
이런 길이라면 지구 끝까지 걷고 싶다고 평소에 말했었다.
걸으면 기분이 좋아진다는 벼리는 이 길을 걷고 나니 마음이 편안하다고 했다.
조금은 나아진 듯하나 완전히 돌아오지는 않은 것 같았다.
나는 어디 있든 우리 둘이 같이 있는 곳이 집이라고 생각하는데 벼리는 아니란다.
고국과 안락한 집이 그리운 가 보다.
벼리가 잘 견뎌 냈으면 좋겠다.
우리나라의 일상에서도 세계여행하면서도 밝고 활기차고 적극적인 모습이 참 보기 좋았는데...
빨리 그런 모습을 되찾기를 바라본다.
오는 길에 하얀 모래에 넓게 펼쳐진 예쁜 해변에 차를 세웠다.
희망봉에서는 사진도 안 찍으려고 하더니 모래가 만지고 싶다고 해변가로 내려갔다.
모래가 곱고 부드러웠다.
그 모습을 사진에 담았다.
벼리의 기분이 많이 좋아졌다.
희망을 찾는 중이다.
벼리, 힘내~~ 파이팅!!!
아침식사하는 카페
동네마켓에서 점심거리 준비
새로 받은 렌터카
희망봉 가는 도중 비가 와서 잠시 휴식
희망봉 입구
고래가 춤추고
희망봉 아래 떨어진 벼리의 희망을 찾아서
희망봉 끝머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