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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GUM Oct 25. 2023

깔루아밀크와 오아시스 그리고 낭만에 대하여

Editor 예빈


  '어떤 술을 마셔야 하지?'

  열아홉 겨울의 고민이었다. 곧 성인이 되는 해를 마주한 고등학생에게 '스무 살'과 '술'이란 다이어터에게 주어지는 치팅데이 같은 것이었다. 대학 입시설명회에서 받은 달력의 1월 1일에 빨간 색연필로 동그라미를 그렸다. 공부가 손에 잡히지 않을 때마다 달력을 봤다. 웅장한 대학 마크와 1월 1일의 표식를 볼 때면 풀리지 않던 이차방정식도, 계속 까먹던 영어 단어도 술술 풀리는 기분이었다.


  수능이 일주일도 안 남았을 시점, 윤과 나는 독서실 앞 벤치에 앉아 하늘을 바라봤다. 새까만 하늘에 구름이 잔뜩 껴있었다. 별도 달도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까만 하늘이 우리의 막막한 미래 같았다. 마음이 웅얼거려 하소연을 내뱉었다. 우리는 하염없이 흘러가는 저 구름처럼 살아야 하는 걸까. 나는 별이 되고 싶은데, 왜 세상은 자꾸만 벌을 주는 걸까. 나비처럼 날아오르고 싶었는데, 살기 위해 꿀을 모으는 벌이 되는 걸까.  우리는 왜 별이 아니라 벌이고 나비가 아니라 벌인 걸까. 언제까지 벌벌 떨며 살아야 하는 걸까. 오들거리는 입술 사이를 비집고 튀어나온 단어가 허공을 맴돌았다. 속으로 괜한 말을 했나 생각했다. 수능을 앞두고 서로 예민하던 시기였다. 경제적 여유는 물론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힘든 친구에게 부정만 더 얹어 준 거 같다는 생각에 기분이 우울했다.


  윤은 한동안 말이 없더니 입을 열었다.

  "예빈아, 너는 영원을 믿어?"

  "세상에 영원한 게 어디 있어. 다 사라지는 거지."

  "그지. 세상에는 영원한 게 없겠지. 그런데 말이야, 나는 그럼에도 소멸을 버티고 오래가는 것들이 있다고 믿어. 세상 모든 것은 언젠간 흔적도 없이 다 사라질 거야. 그래서 아름다운 거고."

  "..."

  "봄이면 다들 벚꽃을 기다리잖아. 새 원피스도 사고, 사진도 찍고."

  "..."

  "만약에, 아주 만약에 벚꽃이 일 년 내내 핀다면 어떨 거 같아?"

  "그야 뭐, 다들 좋아하지 않을까. 이쁘잖아, 꽃."

  "과연 사람들이 봄을 기대할까? 우리가 벚꽃을 좋아하는 이유는 꽃이 피고 지는 존재라서야. 너도 나한테 그래.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이 소중한 거지"


  윤은 멍하니 하늘을 보고 있었다. 손을 덥석, 잡고선 말했다. 서로 옆에 있을 때 최선을 다하자고, 그러다 보면 소멸도 사랑할 날이 올 거라고. 순간 보이지 않던 달의 모퉁이가 살짝 반짝거렸다. 서늘한 밤이었지만 윤과 맞잡은 손은 난로만큼 따뜻했다.

알고리즘을 통해 깔루아밀크라는 칵테일을 알게 되었다. 우유와 깔루아가 몇 번의 휘적임을 통해 하나의 깔루아밀크가 되는 모습을 보며 윤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영원하지 않기에 아름다운 거야.


 

  우유 아래 가라앉은 깔루아. 스터. 깔루아밀크.


  결국 뒤섞여 깔루아밀크가 되어버린 우유와 깔루아, 둘의 운명이 영원하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때 결심했다. 스무 살이 되면 깔루아밀크를 마시기로.    

걸어서 갈 수 있는 칵테일바는 산타모니카가 유일했다. 원룸촌에 자리 잡은 화려한 칵테일바의 존재가 뭐랄까, 사막 속 오아시스를 보는 듯했다. 적당한 채도의 붉은 외벽이 산타모니카를 이질적이지 않고 공간에 잘 어우러지게끔 했다. 작은 세계의 놀이공원과 골동품, 잔잔한 팝송이 자아내는 분위기는 황홀했다. 황홀, 환상, 낭만. 그것이 산타모니카를 형용할 수 있는 단어다.


  "주문하신 깔루아밀크 나왔습니다."

우유와 깔루아가 잘 맞물리도록 몇 번의 스터를 반복했다. 그렇게 마주한 첫 술. 첫 입. 첫 깔루아밀크. 씁쓸한 술맛이 혀에 닿고 달콤한 라떼 맛이 입에 남았다. 쓴 가? 하면 달았고 단 가? 하면 썼다. 이리저리 맛을 바꾸는 깔루아밀크의 행위에 놀아나 정신이 나갈 때쯤, 데코로 올라간 마시멜로를 한 입 먹으면 '아, 이게 인생이구나!'하며 무릎을 탁 치게 된다.


  노래 하나에 꽂히면 그 곡만 질릴 때까지 반복해서 듣는 습관이 있다. 이맘때 겨울에는 한창 오아시스의 champagne supernova를 들었다. 한국 아티스트의 커버 버전을 너무 좋아해서 원곡까지 즐겨듣게 된 케이스였다. 신청곡 종이에  champagne..을 꾹꾹 눌러썼다. 사각거리는 종이 소리가 좋았다.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며 좋아하게 된 칵테일을 먹는 잠시 동안 환상 속을 걷는 기분이었다. 가게의 분위기 탓인지, 취기 탓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답은 찾지 못했지만, 그때의 순간은 영원히 미결인 채로 남겨두고 싶다.


  그러고 보니 깔루아밀크가 삶이랑 닮은 구석이 있다. 달고 또 쓰디쓴 인생. 살다 보면 불행에 잔뜩 절여있다가도 행복한 순간이 찾아오고, 기분 좋은 일에 들떠있다가도 안 좋은 소식을 듣기 마련이다. 이런 '단쓴단쓴'의 매력이 깔루아밀크를 계속 마시게 하듯, 삶을 살게 하는 동력이 된다. 괜찮지 않다가도 괜찮아질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굳건히 살아가는 우리에게, 치얼스!



     - Editor 예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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