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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갓혁 Jun 24. 2022

서울 홍제동 개미마을을 아시나요?

서울의 마지막 시골 마을인 '개미마을'을 기록합니다.

<작년 11월, 낙엽이 지는 한 가을에 느닷없이 서울에서 가장 고즈넉함과 동시에 허름해져 없어질 마을로 방문했습니다. 바로 개미마을입니다. 이 마을은 제가 10여 전에 울면서 시청했던 어느 영화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서울에서 유일한 시골 마을, 그리고 행복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을 현재 상황에서, 그때 당시를 떠오르며 다시 재구성하여 기록합니다.>



영화 7번 방의 선물에서 용구와 딸 예승이가 살던 동네이자, 예승이의 어린 시절 기억이 모릇모릇 피어오르는 아담한 곳.


서울이 구색하지 않는 굉장히 정감 있고 농촌 풍경을 가지고 있는 마지막 서울 산자락 동네..


처음으로 가본 곳인데, 서울 은평구 홍제동 및 불암동 등 인근 노후화된 옛집을 재개발하기로 결정하고 이 옛 풍경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고 한다. 서울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옛 정취의 동네이자, 현재에는 아픔을 간직한 동네. 그래서 이곳에 온 이유이자 내 기록에 담아 이 글을 보는 사람들에게 도시 개발에 대한 경각심과 재개발의 아픔을 고스란히 보여드리고자 한다. 그것이 나의 골목투어의 취지이다.


개미마을 위치


정확한 위치로는 인왕산 자락에 위치한 판잣집 마을이다. 정말 홍제 3동 주민센터에서 500보 이상 올라가야 마을이 등장한다.


홍제동 개미마을은 한국전쟁 이후 사람들의 피난촌이었다. 삶의 터전을 잃은 이들이 야산에 천막을 치고 살기 시작했으며, 시골에서 무작정 상경한 젊은이도 숨어들었다. 그 풍경이 인디언 부락 같았는지 처음에는 ‘인디언촌’이라고 불렸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천막은 무허가 판잣집으로 바뀌었다. 판잣집들은 경사지에 아슬아슬하게 똬리를 틀었다. 70년대에는 몇 차례 철거 시도가 있었다. 이후 1985년을 전후해 토지비를 낸 이들에게 땅을 불하했다. 현재는 120여 동에 350여 명이 산다. 이름도 개미마을로 바뀌었다. 부지런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을이라는 의미다. 마을 풍경을 보기 위해 일부러 찾아오는 이들도 많다. <네이버 백과 참고>



절대 개미처럼 일만 하는 소시민의 마을이 아니라는 거다. 누군가 그렇게 오해할 수도 있기에 이렇게 작성해 본다.



버려지고 녹슬어가는 옛날 비디오테이프가 보이는 자그마한 동네.


오르막길 따라 쭈욱 이동하다 오면 여기가 정말 서울인지 아닌지 의구심부터 들게 된다. 그리고 의도치 않게 발견하는 80년대 감성 비디오테이프 케이스들이 곳곳에 즐비하더라. 이때부터 느꼈다.


'사람이 살았지만, 이제는 버려지는 곳이라는 걸. 그래 사람이 살았지."


하지만 이내 곳곳을 누비다 보면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어디론가 산책하시는 모습도 볼 수 있게 된다. 아직은 이 자리를 지키기 위한 소시민들이 있다는 증거였다.



서대문구 07 버스를 타고 올라오면 가능하겠지만, 난 저기 아래 홍제동 복지센터에서 쭈욱 올라왔다. 거의 20분 정도 소요됐지. 참 웃긴 점은 7번 방의 선물 영화 가상의 슈퍼 '동래 슈퍼'가 실제로 있었다! 이름부터 부산에 있을법한 로컬 슈퍼이지만, 개미마을에도 그 상호명을 쓰고 있었다.


이 두 가게가 서로 매칭 되는 이유는 뭘까. 아무래도 6.25 전쟁 당시 마지막 피난처였던 부산(동래구)과 일부 피난민들을 위한 서울의 피난처인 개미마을의 유사성이라고 할까.


어쨌든 이 주위를 배회하다 보면 다양한 벽화로 구성된 벽돌을 구경할 수 있다. 아마 예전부터 현주민들이 재개발에 반대하고자, 이 마을의 정체성을 유지하고자 노력한 흔적이 보였다. 아니면 일부 봉사단체들의 업적일 수도 있겠다.


소소한 레트로 감성의 벽과 화려한 꽃잎 무늬가 자리 잡힌 소소한 동네.






어느덧 11월 말, 사람들의 인적이 없었다. 미리 리써칭을 해보니 120여 동에 350명 정도 어르신들이 거주한다고 한다.


그러나 2013~2014년 기준이고, 현재에는 점점 판잣집의 부서진 흔적과 허물어져가는 초가집들이 많아지고 이에 따라 기존 현주민들은 정부로부터 거주 지원비를 받고 어디론가 훌쩍 떠나신 모양이다. (최근 다시 찾아보니 은평구의 어느 한적한 한옥마을 근처로 이주했다고 한다. 그 인근에는 박정희 정권이 직접 주도해서 도시화 사업을 거친 '기자촌'이 있다. 그 근처인 듯하다.)


<7번 방의 선물, 용구와 예승이의 마지막 배회 장소였던 해바라기 벽화>


영화를 보신 분들은 알 것이다. 바로 이 벽화 앞에서 용구와 예승이가 춤추고 노래 부르고 이 동네의 1인자가 된 것처럼 아주 해맑은 그들만의 리그를 펼쳤다. 그러나 이후 용역업체의 방해로 그들의 표정은 점차 어두워지고, 마을의 이미지조차 퇴색되어 갔다.



#7번방의선물


정신지체를 가지고 있는 아빠 용구와, 오히려 천재 성향을 가지고 있는 그의 딸 예승이가 살고 있는 가상의 동네.


그러나 가상의 동네가 아니라 정말 실존하는 동네였다. 참고로 예전에 이 영화를 보고 굉장히 마음이 아팠다. 굳이 스포일러는 언급 안 하겠다만, 두 부녀가 여기서 태어났으며, 아침 일찍 스쿨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딸과 그녀를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웃음, 미소가 번졌던 그 장면. 그러나 마지막으로 용구가 아동 성추행 사건에 휘말려 (물론 오해로 인한 사건) 서에 잡혀 이 동네로 돌아오지 못하고 그저 아빠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예승이가 우는 장면까지 모든 게 서사적이지만 배드 엔딩의 한 장면이었다. 그리고 조용해진 이 개미마을을 감싸는 듯한 노을의 풍경은 아직도 내 머릿속에 각인된다.




어린 왕자와 여우의 그림은 참고로 몸은 어른이지만 순수했던 용구가 그의 딸 예승이가 함께 벽화를 그리면서 잠깐의 힐링을 즐기는 장면으로 나온다. 물론 영화상이지만 실제로는 주변 청년 단체와 학교 봉사활동 단체에서 어르신들을 위한 벽화를 그렸다고 한다. 마을의 삭막한 이미지가 꽤 은평구 내에서도 자자했는데 기존 재개발의 곡소리가 확산될 때, 여기 마을 어르신들은 굉장히 반대하셨고 그 상황을 지켜보았던 여러 시민단체들이 재빠르게 달려와 그들을 지원했다는 점이었다. 그 이후 은평구청에서는 어떠한 조치를 취했을지 감이 잡힌다.




동래슈퍼 근처 벽화, 단풍잎이 떨어지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마치 마을의 미래를 대변하듯이.


확실히 시골이나 농촌에서 볼 듯한 가구와 골목길들이 엄청 많다. 그래서 더 정감 가고 뭔가 슬픈 동네.


한적한 어느 아침, 유치원 버스를 기다리기 위해 나서는 두 부녀 (용구와 예승이)_<7번 방의 선물>





7번 방의 선물 첫 장면. 바로 그 위치이다. 97학번 이화여대 과잠 입은 용구와, 노란색 패딩의 수면복 차림 예승이의 콜라보가 아주 환상적이었던 그 장면.





아직까지 누군가가 거주한다. 바깥 아궁이로 밥을 짓던 어느 어르신에게 물어보았는데 이 개미마을에는 할머니, 할아버지 그러니까 노부부 위주로만 산다고 한다. 어느 젊은 사람은 서울의 재개발 정책에 질려서 이 마을을 지켜낼 새로운 방안을 고안하러 다른 타지로 이동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이후 소식이 없어졌다고 하는데 굉장히 무서우면서 한편으로는 이 마을에 대한 무차별적인 재개발과 심각한 경제난에 의해 부모를 버리고 도망간 것이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해 본다.


듣는 내내 마음이 아팠다. 어쩌면 이것이 마을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비애일지도 모르겠다. 과연 서울 사람들은 이 마을에 대해 자세히 아는 것일지 스스로 나 또한 성찰하며 곱씹기 시작했다.



적어도 대한민국 사람임을 자부하는 태극기가 개미마을 마을회관 앞에 꽂혀 있다.


그러나 여전히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자부심은 넘쳐흐르는 동네. 적어도 이 동네에 관심을 주고 희망을 돋우어줄 분들이 굉장히 많으시기에 아직까지 웃고 있는 현주민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세상을 조금 더 긍정적이고 정감 있는 색깔로 바라봐 주길 언제나 기대하면서 말이지. 아직도 이 주민들은, 아니 적어도 이 개미마을에 한평생을 살아가던 주민들은 언젠가는 정부가 지원해줄 것이라며 그 작은 희망조차 버리지 않고 계신다. 이면에 숨겨진 그들의 마음, 그 누구보다 잘 이해할 수 있었다.


"할아버지, 할머니 걱정 마세요. 누군가는 이 마을을 수호하길 바라며 보이지 않은 곳에서 열심히 도와주고 있답니다. 꿈을 버리지 마세요. 적어도 살아있는 동네가 될 테니까요."


옛 60,70년대 판잣집들 뒤로 현재의 아파트가 보이는 그러한 동네. 참 이질적이다. 행정구역 상 서울이면서..


조금 충격받은 장면이었다. 저 뒤로 보이는 고층 빌딩과 지금 내가 서 있는 시골 같은 개미 마을의 괴리감이 이 사진 한컷을 통해 모든 설명을 부여한다. 서울시에서는 아직도 빈부격차를 막기 위한 다양한 방법을 모색 중이라고 하지만 사실 탁상공론의 결과일 뿐이었다. 허망함, 누군가의 울부짖음, 서글픈 경제난의 비극, 그리고 인한 극단적인 선택은 과연 이 개미마을 사람들의 업보일까?



아직도 용구와 예승이가 오붓하게 공기놀이와 달고나 뽑기 하면서 놀 것만 같은 분위기.

그러나 조용한 인적은 역시나 홀로 있음을 더욱 부각해놓는다.



삼거리 연탄가게

실제 버스정류장 이름이다. 굉장히 친숙한 분위기.

이 장소를 한번 둘러보았다.


서에서 조사 중인 아빠 용구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딸 예승이 <7번 방의 선물> 중에서



과거와 미래의 공존

누구는 따뜻한 밥을 먹고, 누구는 추위를 이겨내며 겨우 밥을 먹고. 이런 빈부격차가 제발 없기를 기대하는데.



개미마을에는 고양이들이 굉장히 많다. 주인도 없는, 그저 사람이 좋아 나를 쫑쫑 따라오는 이 녀석들의 울부짖음은 너무 서글펐다. 배고픔에 휩싸여 이 주민들처럼 똑같은 처지에 머물렀을까 봐 내내 두려웠다. 인근 슈퍼에서 구매한 참치 캔을 따 이 녀석들에게 제공하였다. 아주 맛있다는 듯이 곳곳 개미마을 뒤편부터 시작해서 인왕산 자락에서 고양이들이 몰리기 시작했다.


개미마을의 전통적인 사찰, 관음사


이 마을에 거주하시는 어르신들이 삶을 다 하시면 그 후손들이 관음사 옆에 묘장을 한다는 전례가 있다.



옛 빨간 굴뚝이 그 자리를 대신하겠지.

누군가의 소중한 공간, 더없이 한적해서 괴리감이 느껴진다.

바쁜 서울 속에서 한걸음만 건너면 누구보다 빠른 최첨단 시대에 사는 사람들이 보이면서, 허나 개미마을은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있다. 그래서 참 특이하다. 더 동조되고 관심이 간다. 적어도 나와 같은 사람들은 이 마을이 관광지화 될까봐 두렵게 느껴진다. 그저 한낱 레트로 감성 유발하는 문화재 장소가 되지 않았으면 한다.


"남들이 모를 때, 더 숭고한 법이다."



어딜 가나 고양이들이다. 서럽게 울고 있는 녀석들.

하지만 사람들의 인기척도 없는 이 개미마을에서조차 고양이들의 울음은 소용이 없었다. 오래간만에 보는 사람이 반가웠겠지. 하지만 이내 다른 곳으로 이동해야 한다. 그 녀석들의 울음소리는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마치 본고향인 여기가 사라질까 봐 서글프게 우는 현지민들처럼 말이야.



지난 11월, 어느 가을, 홍제 개미마을의 마지막 잎새들


홍심 약수터 (82년도에 제작한 팻말)



인왕산 자락 어느 약수터를 발견하였다.

이 옹달샘은 수질검사 결과 공해에 오염되지 않은 좋은 식수로 판명 되 읍니다. 이 물을 주민 여러분의 건강 석수로 이용토록 우리 모두 주위 환경을 정화하고 수질을 오래 보존할 수 있도록 다 함께 자연보호에 앞장서 주시기 바랍니다. - 1982.10. 서대문구청장 홍심 조기회


정말 오래된 약수터. 인적을 떠나서 이렇게 표지판조차 그 자리에 머물 정도면 이 동네에 다들 너무 관심이 없는 듯하다.





이 골목투어를 다녀오고 꽤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서울에서 유일하게 옛 풍경을 간직한 동네는 겨우 3곳뿐이라고 함.

하나는 홍제 개미마을, 두 번째는 서초 개룡 마을, 마지막은 우리 집 동네 근처인 강서구 방화 내촌마을이다.


내가 이 글을 올리는 취지는 여행도 있지만, 사람들의 인적이 없는, 동네의 의미가 퇴색되어가는 그러한 곳을 기록하여 추후 재개발이 되었을 때 한때 서울에 있었던 나름 잘 나갔던 동네였고 옛 문화관과, 가치관의 정취가 풍겨오는 곳이라고 홍보 아닌 홍보를 하고 싶기 때문이다.


마을의 정체성을 탐구하는 생각으로도 자주 골목투어에 녹여내고자 한다.


여전히 느끼지만 골목투어는 온전히 여행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온전히 느꼈던 부분을 캐치하여 글을 올리는 취지에 있다. 물론 누구나 도시재생과 재개발에 관심이 많겠지만 난 조금 더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갔으면 하는 바람이거든.


어쨌든, 오늘도 이 글을 올리면서 성찰해본다. 잊지 말자. 역사를 모르는 자에게는 미래도 없다. 왜 이러한 지역이 생기고 퇴색되고 점점 새로운 느낌의 도시화가 되어가는지 나는 오늘날 고된 여정을 통해 비롯이 알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7번가의 기적 하이라이트 장면.



10년 뒤 변호사가 된 예승이. 그리고 성추행 사건에 휘말려 사형 판정을 받은 자신의 아버지인 용구를 구하기 위해 수많은 공부와 노력 끝에 그가 무죄임을 입증하였다.


그렇지만 시간은 되돌릴 수 없다. 인생은 한 번. 언제나 소중한 사람은 옆에 있었고, 그렇게 서로 의지하면서 버텨왔으나 현실은 그렇지가 않았고 이제 혼자가 된 그녀를 누가 위로할지.


"있을 때 잘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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