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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갓혁 Jul 10. 2022

인사동 가는 길

친구와 골목에 대해 논하는 중이었습니다.

2월이었을까?

삼청동에서 업무를 끝마친 후 뒤늦은 식사를 하러 인사동에 갔다. 그리고 친구가 물었다.


"넌 왜 그렇게 인사동이나 성북동, 삼청동만 고집하는 이유가 뭐야. 다른 핫플레이스도 많은데 말이야."


"아~ 그거? 있잖아.. 나중에 되돌아보면 알게 될 거야."


이 말 한마디로 친구는 순간 정적을 약 5초간 유지했고, 나는 살짝 옅은 웃음을 쓰윽 머금었다. 친구는 그게 뭔 X소리냐고 또 한마디 하였지만, 무조건 대중적으로 유명하고 대중적인 장소에만 혈안 된 사상을 가진 친구에게 나만의 순수한 이야기를 하기에는 다소 이해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그래서 그냥 사진을 몇 개 보여주었더니


"인사동.. 아 그런 곳이었구나. 야 나중에 가자."


이 말 한마디로 끝났던 장소. 그렇다. 인사동에 갔다. 북촌 마을 아래에 위치한 조그마한 시장이었지만 현재에는 다양한 전통과 공예품들이 즐비한 거리.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유명한 '쌈지길'로 저명한 곳. 다시 레트로 감성을 찾아 떠나는 갓혁의 골목 여정. 시작합니다.




인사동으로 가는 길

여전히 골목길 사이로 음식을 만드는 그릇 소리와 예술공품 만지는 소리가 즐비했다.

그리고 어스름한 골목 따라 식사하러 이동하는 중이었다.


인사동이 지니고 있는 골목길의 풍경. 얼음, 동동주, 송중기. 아직도 10년 전 포스터가 즐비하다.


주말임에도 불구하고 뒤늦은 업무가 끝났다. 삼청동 어느 사무실에서 나왔을 때 갑작스러운 강풍과 바람 덕분에(때문에) 내 눈에는 벌써부터 안개가 자욱해지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이징 올림픽 중계를 구경 해야 하기 때문에 딱 8시에 맞춰 구경할 알맞을 장소를 찾다 다녔다.


여전히 인사동에는 사람들이 북적이지만 예전만큼 그러지 못했다. 그러나 그 코로나 덕분이라고 할까, 확실히 한옥과 인사동 골목길 사이에 늘어선 고즈넉한 풍경이 옛 감성을 더욱 극대화했더라. 덕분에 살짝 기뻤다. 어느덧 친구와 함께 삶에 찌든 서울의 소시민적인 일상 이야기를 하면서 이 인사동 거리를 돌아다녔다. 이 친구는 여전히 자신의 미래 프로젝트에 대해 굉장히 열광하듯이 아주 입에 침이 마르도록 이야기를 하더라.




그렇게 우리는 인사동 골목을 곳곳 후벼파기 시작했다. 예전에 인사동 쌈지길에서 공방 구경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 당시에 소상공인들이 제작한 저렴한 제품들이 즐비했던 풍경이 어느덧 뇌리 속을 스쳐 지나갔고 그 장소로 잠깐 고개를 돌렸지만 아쉽게도 문이 닫혀있었다. 그렇게 발걸음은 얼른 추운 몸을 따스하게 보호해 줄 식당으로 이동했지만, 내 시선만큼은 그 쌈지길로 돌아가고 말았다. 살짝 아쉬움을 뒤로한 채 하나 둘 눈 덮인 인사동 골목을 스텝 밟으면서 친구의 추천을 받아 좁디좁은 후미진 인사동 뒷골목으로 이동한다.



주모, 여기 수제비 한 그릇이요 ._.

아 동동주도 시킬게요 !



처음으로 왔던 곳인데, 외관부터 고즈넉한 풍경과 한옥 이미지, 그리고 성인 남자가 겨우 들어갈만한 장소였기에 매력에 이끌려 입장하였다. 그리고 사실 매우 추웠던 기억도 있었기에 얼른 들어가서 몸을 식히고 싶었다. 호호 입김을 불면서 자리에 착석하였고 7000원 인사동 수제비를 시켰다. 그리고 오른쪽을 돌려보니 벌써부터 베이징 올림픽 쇼트트랙 준비를 하고 있더라. 내가 예전부터 응원했던 '황대헌' 국가대표 선수가 입장할 시간이었다. 시간은 대략 오후 8시였나. 가물가물했지만 타이밍이 좋았다는 명분으로 우리는 일 이야기는 잠깐 접어두고 티비에 더욱 열중하였다.


그리고 네이버 응원창을 틀고 황대헌 선수를 위한 장문의 응원 문장을 작성하였다.


'국가 대표인 것만으로도 대단한 겁니다. 실패해도, 실수해도 기죽지 마시고 최선을 다해주세요 ! 파이팅입니다.'



작은 옹기에 담백한 수제비를 담아주셨다. 이름값했다. 아니 소소한 브랜드마저도 감미로웠던 이 풍경과 외관에 벌써 몰입했던 나 자신에게 매우 기특해했다.


"야 잘 왔다. 여기 분위기 진짜 좋다. 베이징 올림픽 구경하면서 우리 옹기에 있는 수제비 한 번 뜯어보자 !"


이 말 한마디와 함께 겉으로는 황대헌 선수를 응원한 척하지만, 사실 속으로는 허기진 배를 채우기에 안성맞춤인 수제비를 허겁지겁 삼켜버렸다. 꼭꼭 씹으면서 건조해진 내 입 안속에서 뜨거운 열기를 내뿜는 수제비 원소 하나하나가 구내 면적에 활성화되었던 그 추억은 아직도 머릿속에 기억난다. 벌써부터 입천장 부분이 따갑다. 최근 설날에 만드셨는지 매우 달콤 쌉싸름한 겉절이와 함께 먹으니 꿀맛이었다. 국물을 들이켜보았다. 속에서 요동치는 요란스러운 나의 위장은 어느덧 얌전해졌다. 1분간 내 위장의 느낌을 한번 느껴보고, 다시 한 번 더 들이켜본다. 또 들이키고 하다 보니 어느새 수제비 국물은 바닥을 드러냈다.


친구가 동동주를 시키자고 했다. 하지만 동동주를 마시면 입 돌아간다는 생각이 난무하더라. 분명 그렇게 생각했는데 어느새 나는 사장님께 입을 열었다.


"사장님 동동주 있나요? :D"


"네네 여기요!"


그렇게 친구와 동동주 한 사발을 쭈욱 들이켠다. 황대헌 선수는 내 마음을 모른 채 열심히 쇼트트랙 위를 달리고 있는데, 덕분에 열기가 찬 이 수제비 항아리를 바탕으로 모든 사람들이 열광하고 열정을 3번 외치며 합심하여 국가대표를 응원하고 있었다. 하마터면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으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그때가 그립더라.


그냥 마스크 안 쓰고 예전처럼 소소한 풍경을 간직했던 그날이 그리웠다.



ㅇㅇ

ㅁㅁ


내추럴 와인바

일명

'음음'


밤 오후 8시 40분쯤. 그렇게 동동주를 다 들이키고 밖으로 나섰다. 입에서는 동동주 알코올 향이 아직 미처 가시지 못했고, 그저 추위가 우리를 또 강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진지한 모드로 돌입하는 친구의 주둥아리를 겨우 닫아버렸다. 5분도 안되어서 읍읍 거리면서 할 말이 그렇게 많은지.. 


아니 그럼 아까 회의 시간에 이야기하지 그걸 굳이 사적인 공간에서 이야기하냐고 속으로 삭혔던 기억이 난다. 그래도 술기운에 이야기하는 것이니 오늘은 참았다. 알고 보니 요즈음 코로나라서 참 힘들다는 하소연. 뭐 나도 똑같지. 그런데 어떻게 하겠어. 우리뿐만 아니라 여기 있는 대한민국, 아니 전 세계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지닐 지금 엔데믹 상황인데.


아, 그러고 보니 이제는 팬데믹이 아니고 엔데믹이란다. 엔데믹은 일종의 풍토병으로 보자는 인식인데. 그저 특수한 지역에서만 생기는 질병으로 치부해버렸다. 그러니까 이제는 장기적인 감기로 생각하자는 보편적인 관점이다. 세계보건기구가 그렇게 언급했으니 우리는 뭐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어차피 세상은 각자도생이라고 느껴왔던 나는 내심 조금 부끄러웠다. 엔데믹이면 사실 너무 이기적이고 잔인한 상황 아닌가 하고 말이다.


인생 운명론에따라 건강에도 차별화가 생기고 그로 인한 세대갈등, 남녀갈등, 빈부격차 등등.


엊그제 20대 대통령 대선 30일을 앞두고 이재명, 윤석열, 안철수, 심상정 이 4명이 요리조리 토론을 이어가던데, 특히 2030 세대를 위한 마케팅을 중점적으로 이야기하더라. 솔직히 우리 표심이 많이 없는 것은 이해하지만 너무 노골적으로 우리들을 겨냥한 것 자체가 좀 그렇다. 우리 잘못도 아니잖아. 나중에 누굴 원망하게.


동계올림픽 대표단 선수들은 정말 열심히 하루하루를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데 우리들은 뭐하고 있는 건가.


.

.

.


그렇게 친구와 인생무상 이야기를 곁들인 채 30분가량 골목을 거닐어보았다.


인사동 10길로 빠져나간다.


인사동 8길


표지판은 인사동 8길을 가리키지만 우리는 그쪽으로 걸어가지 않았다.

다시 돌아갈 일은 없거든. 인생 또한 그렇잖아.


고즈넉한 풍경과 외관을 머금은 큰 대로로 나왔다. 인근에 한옥 게스트하우스들이 거리마다 나온다는 점이 참 신기했다.


인사동의 첫 모습은... 북촌 한옥마을인 줄 알았다. 아니면 서촌 마을..? 그쯤 하지 않을까 했는데 다시 정신 차리니 여기는 '인사동'이었다. 인사동은 거짓말 안 해. 예전 감수성 풍부한 전통 공예품들과 전시품들이 즐비했던 미술관과 소규모 전시회, 복합문화 단지들을 구경하면서 저벅저벅 거닐어 보았다.


그리고 친구가 또 하소연하기 시작한다.


"하 인생 진짜 너무 힘들다. 그래도 이렇게 소소한 이야기하면서 풀 수 있다는 게 좋다."


"응 너 인생은 너무 부질없어서 내가 오히려 위안된다. 내가 너보다 비교우위 스텟 +10 ?"


이렇게 시시콜콜한 이야기하면서 거닐어본다.


인생 미래 이야기. 조만간 결혼한다는 친구의 이야기. 예비신부랑 같이 술 한잔하자는 이야기, 최근에 메타버스 관련 주식 종목 떡락했다는 이야기, NFT (불가 대체 토큰) 관련 이야기, 생계 관련 업종 이야기, 자영업자, 프리랜서, 사업장 이야기, 거래처 이야기 등등 쓸데없이 남자들끼리 고민할 거리가 이렇게 많았던가.


너무 현실적이라서 더 마음이 아팠다. 언제부터였을까.


이렇게 현실적이고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람이 되어간다는 게 참 슬펐다. 난 ENFP라서 아직 '이성적'이라기보다는 '이상적'인 대가리 꽃밭을 유지하고 싶은 '어른 아이'이고 싶은데 참 쉽지가 않더라. 그럼 어떻게 해야 되겠나.


"뭘 어떻게 해. 그저 사색하면서 그냥 인생 흘러가듯이 살아야지 않겠나." 

라는 친구의 말에 한 번 더 짜증 났다 (-_-)


내 인생 내가 알아서 살고 싶은데, 내 친구는 너무 극단적인 현실주의형 인간이라 나랑 도저히 안 맞는다. 그런데 의외로 얘 예비 신부가 나랑 같은 ENFP란다. 역시 연애는 공감대 맞고, 결혼은 공감대 안 맞는 사람들끼리 해야하나 ? 우리 부모님 보면 그렇다. 맨날 싸우신다. 성향 둘이 1도 안 맞는다. 아 맞는 거 하나 있다. '똥고집은 더럽게 강력하다.' 이건 인정한 부분이었다.


친구는 그 이야기를 듣고 탑골공원에 계신 10년 인생 득도한 할아버지처럼 껄껄 웃으면서 이야기를 이어갔다.


천도교 중앙대교당


그렇게 한적한 골목을 발견하고 이동해 보았다. 친구는 이 고즈넉한 풍경 자체가 이제서야 이해한다고 했다. 참 웃기다.


본인은 그렇게 여행을 좋아하면서, 한편으로는 노지 캠핑이나 등산, 사람들이 자주 안 가는 노지 여행을 좋아하는데 이런 고즈넉하고 조용한 풍경을 싫어했다. 이유를 물어보니 사실 자기 취향이 아니었고, 그냥 구경만 하는거 아니냐고.. 가끔씩 텐트 치면서 움직이는 활동, 액티비티, 등산 등 고된 활동 여행이 더 재미있지 않냐고 하는데, 사실 나는 반반이다.


양념 반, 후라이드 반처럼 사실 단체 (4명 이상) 가는 여행이면 글램핑, 캠핑, 등산, 야영 등 조금 내가 뭔가 이루려고 하는 과정이 고스란히 보이면 더 재미있고 서로 돈독한 군대 스타일을 느낄 수 있겠지만, 요즈음 코로나라서 온전히 나 혼자 여행하고픈 생각만 많아지더라.


그냥 코로나 3만 명대 돌입부터 사실 겁먹었다. 이러다가 나도 무증상 아닐까 하고 말이다. 그래서 설날에 외할머니 댁에 가기 전에 미리 자가 키트 진단도 받아보고 음성 체크도 했지만, 그래도 불안한 거 있잖아. 다행스러운 건 난 주위에 그렇게 술 퍼마시고 놀자는 친구들이 많이 없어서 위안되었다. 예전에 그런 경험 이후로 다음날 일정 꼬인 부분도 있고 사실 나만의 '여행 방식'이 확고하지만 그렇게 여행 관념 확실한 타인들과 친구들이랑 같이 동행하면 괜스레 내가 불편하더라. (아마 여행을 임하는 성향 차이인 듯)


나는 온전히 '무규칙, 무계획' 여행을 좋아했기에, 이러한 부분은 남들이 잘 이해하지 못했지.

그런데 막상 해보니 사람들도 대리만족했었고, 나 또한 그래왔다. 그럼 이걸로 된 거였지.


그리고 이러한 모든 이야기를 친구한테 정성적으로 진실적으로 이성적으로 이야기를 하니 결국에서야 '갓혁만의 여행 철학'을 드디어 이해했다.


역시 친구 아니랄까 봐, 진짜 설득하고 이해시키느라 이 똥고집 선비 마인드 친구를 겨우 설득시킨 나 자신에게 격려의 박수를 짝짝짝 ._.



인사동 10길.  경운동 민병옥가옥, 천도교 중앙대교당을 구경할 수 있다



친구랑 경운동 민병옥가옥 풍경을 보고, 여기는 진짜 재벌들이나 부촌 사람들이 사는 곳이겠지 생각했다.

사실 민병옥 또한 그랬다. 나중에 자신의 가족과 사업 증진을 위해 결국 '친일파'로 변질된 인물이지만..


근현대사를 보면 왜 이렇게 변질된 사람들이 많을까 의심이 들었다.

예전에는 교과서로 배운 자아가 미성숙한 학창 시절에는 그저 욕만 하기 바빴다.


그런데 지금 어느 정도 성숙해지고 다양한 역사 체계론을 공부하다 보니 나는 우물 안 개구리였다.


저명한 역사학자가 그랬다.


"국뽕 가득한 국사만 공부하지 말고, 객관적인 시야를 가진 세계사를 공부하면 정확한 역사 인식을 가지게 된다."


맞다. 국사랑 근현대사는 너무 국뽕이 넘쳐흐르지 못해 그냥 홍수다.

이때부터 알았다. 왜곡되고 편협된 시야를 가지는 것은 어쩌면 하나만 보고 둘을 모른다는 개념이 아닐까.

그리고 내심 속마음을 바꿨다. 민병옥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했다.


이완용도 그랬다. 고종 대신 서약한 그 과정, 분명 자신의 가족을 위함이겠지. 명분 없는 이유도 없고, 이유 없는 명분도 없었다.단지 크게 거시적으로 '나라'를 팔았다는 그 하나만으로 욕만 먹었던 건 부정할 수 없었기에 말이다. 어쩌면 현 정치판도 좌, 우로 구별된 이유가 이 사례랑 비슷하지 않을까한다.


<다음화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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