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혁의 에쎄이 10
‘꽃이 지고 나서야 봄인 줄 알았습니다.’
참으로 후회하고 회의감이 드는 문구를 보았다. 연희창작촌이 어느덧 10주년을 맞이하여 N형님이 새로운 보금자리를 향해 어디론가 떠나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우리는 마지못한 예전의 추억을 되살리기 바빴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는 의미였다.
다음날. 연희창작촌에 가보았다. 형은 쪽지만 남긴 채 멀쩡한 사지로 도망간 느낌이었다. 솔직히 배신감이 들었다. 이럴 거면 미리 말씀하고 떠나시던가, 그동안 나와의 정을 무시하는 감정은 백배로 솟구쳤지만 사실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걸 누구나 알고 있었다. 무려 2년 넘게 동고동락했던 N형님의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여전히 내 귓가에 들려왔다. 보고싶다.
이 형님 MBTI를 문득 기억했다. 나와 똑같은 엔프피 성향이었다. 그리고 형님의 별명은 두레였다. ENFP를 한글 키보드로 치면 ‘두레’로 뜨기 때문이다. 그걸 또 K는 좋다면서 두레 1,2로 칭하는 별명까지 만들어버렸다. N형님은 두레 1, 나는 두레 2. 누가 보면 의좋은 형제로 만들어버린 셈이었다.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넘나드는 연희동 고깃집과 창작촌, 그리고 하염없이 온 동네를 떠들썩하게 하였던 이 형님의 파워는 과언이 아닐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그래서 친구들과 함께 창작촌을 가면 어느샌가 볼이 빨개지면서 와인 한 병에 분위기를 심취하는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지. 느닷없이 보고 싶었기에 무의식적으로 전화를 걸었지만 음성사서함이라는 함정에 놓인 채 그저 아쉬움을 달래고 달래었다.
K는 그런 나를 다독여 주었다. 그리고 조만간 이 친구도 다른 지역으로 이사할 예정이라고 한다. 경제적인 손실을 떠나서 더 이상 예전의 연희동 감성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1년 뒤에 코로나가 극대화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단순한 감기로 치부하기도 뭐 했던 당시 상황에서는 N형님, K 또한 자영업자의 업무를 지속할지 회의감 드는 말만 주야장천할 뿐이었다. 그리고 형님은 먼저 떠나신 거고, K도 조만간 이 지역을 이탈할지도 모르겠다.
내심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괜찮았다. 언젠가는 우리가 다시 만날 일이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나의 그러한 마음을 잘 알았는지 H도 내심 기뻐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나를 다독여주었다. K의 절친이었던 그녀는 당분간 연희동에서 나와 함께 추억을 쌓기로 결심했다.
비록 소심한 성격의 끝판왕이었던 그녀가 어쩐지 자신의 가면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려고 노력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입을 꺼내기 시작한 H.
“사람의 인연은 아 다르고 어 다르더라. 내가 비록 너를 K로부터 만나게 되었고, N 오빠는 이미 구면인 상황이지만 다시 만나길 굳게 염원한다면 돌아오지 않을까. 난 그렇게 생각해.”
“회자정리 거자필반”
“아무래도.. 그런 거겠지? 솔직히 난 내심 공감이 가질 않아.”
“아니 오히려 공감 안 가도 되는 게 사람 마음인걸”
내가 그동안 써왔던 사람의 인연 관계는 이 말 하나로 정립되었다. 일련 된 소통의 과정이 아니었음을 당연히 인지했고, 그녀로부터 많은 철학과 관념을 무수히 얻어 갔다. 항상 느꼈지만 그녀의 MBTI를 묻고 싶었다. 그렇지만 절대 알려주지 않았다.
다만 내가 알고 있는 H의 성격은 소심하지만 친한 사이일수록 더욱 돈독해지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니까 가식적이고 절대적인 과시를 범하지 않으려는 겸손의 근본이었다. 그녀 입장에서는 자기가 어색하고 내심 표현하기 어려워서 그렇다고 하는데 내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묵직한 느낌과 남들이 갖지 못하는 이상적인 현상을 적극적으로 현실에 기재하려고 노력하였다. 그제서야 난 조용히 물어보았다.
“너 I로 시작하고 끝에 P으로 끝나지.”
“어, 맞아. 어떻게 알았지? 계속해봐!”
“INTP 아니면 INFP 같은데...”
"풋-"
그녀의 뻥 터진 웃음 속에서 나는 무언의 감정을 느끼기 시작했다. 예전에 K가 말했던 H에 대한 비난과 비판은 사실 거짓말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K랑 H는 성향이 전혀 달랐기에 서로 이해하지 못했겠지. 나 또한 K의 말을 일부분 수용했지만 거시적으로 인정한 건 아니었기에. 아무튼 말이 길었지만 K는 분명 거짓말을 한 게 틀림없었다. 본인을 조금 더 우월하게 보이기 위함, 그리고 보이지 않은 추정되지 못한 것들에 대해 자기 합리화가 조금 심했다. 그렇지만 인간 본성이기에 우리는 그것을 ‘자기방어기제’라고 표현해 보련다.
나 또한 그랬다. 거짓말을 하면 어느샌가 일련의 논리가 끊기고 이해하는 범위가 너무 추상적으로 변질되었다. 하마터면 K한테 속을뻔했다.
“아오 괜스레 미안해진다. K 말이 전부 진실이 아니었어. 그저 그 상황에서 걔 편을 들어줬을 뿐이었는데. 너무 미안하다. 미안하고 미안해.”
“갑자기 뭔 소리야? 나 K한테 들은 이야기 하나도 없는데? 또 너희 트리오끼리 뭔 이야기했지!”
“아니면 말고.”
갑자기 분위기 싸해지기 싫어서 난 조용히 그녀에게 조금 달콤한 말을 던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K의 친구라는 점이 참 좋다. 비록 N형님은 떠나서 연희동 분위기가 많이 작살났지만 친구의 친구를 서로 알아간다니. 이것 또한 인연 아니겠냐.”
“그래 진혁아. 이런 걸 한 번 더 뭐라고 한다고?”
“회자정리 거자필반”
“그럼 예전에 내가 너를 본 적이 있었나?”
“몰라-”
곤두세우지 못하는 내 입장 상황에서 그녀는 어디 이동하자면서 나를 안내하였다. 그리고 그 앞에는 K가 있었다. 내심 웃고 있었지만 다소 아쉬운 마음으로 우리 세명은 조용히 연희동 사진관으로 입장하였다. 마치 30년 전 그 자리에 머물렀던 것처럼.
“안녕하세요. 전통을 자부하는 연희동 사진관입니다. (찡긋)”
'우리가 머문 그 자리는 영원히 변치않길 기대하자고.'
<다음화가 마지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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