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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갓혁 Mar 24. 2022

봄과 가을에는 신촌에 가세요.

연세대와 안산이 가지는 대학 라이프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어느 화창한 서울의 완연한 가을 날씨였다. 아마 작년 2021년 10월이었겠지.

그때 내가 기록했던 가을의 막바지를 신촌이라는 젊음의 장소에 잠깐 녹여내려고 한다.

신촌이 가지는 유구한 전통과 젊음이라는 레트로의 한 장소에서 내가 머물 장소를 하나하나 상기시키도록 노력하였다. 영화 1987의 이한열 열사의 숭고한 희생이 있었던 장소와 일제강점기 대학 지식인들의 무구한 항일 독립의 투지 장소가 바로 이 곳이었음을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러나 뭘 했다고 이렇게 애꿎은 시간만 빨리 지나가는지 시간아 너 야속했다. 그에 상응하는 내 감정. 마침 신촌에서 업무를 보고 문득 드는 생각. 이런 날에 집에 가면 굉장히 마음이 아프잖아. 그렇게 감성과 젊음을 느낄 수 있는 곳으로 출발해 본다. 뻔한 곳이라 생각하겠지만 그렇게 평범하지 않도록 의미 있게 작성해야겠다. 앞으로 이 글을 보고 들어오는 사람들도 단순한 여행에 대한 무의미적인 편견을 가지지 않게끔 도와드려야겠다. 참고로 오늘은 오히려 기분이 좋아지는 딱 적당한 가을 날씨로 상기되더라.



신촌에서 연세대학교 가는 방향



낯이 익다면 캠퍼스 투어를 즐길 자격이 있다. 가을의 풍경이 물씬 느껴지는 연세로를 따라 터벅터벅 입구를 거닐어 보았다. 뭐랄까 예전 캠퍼스 낭만이 꽃피웠던 새콤달콤한 기억이 떠오른다. 이제 코로나로 인해서 대학 낭만을 즐길 수 없는 대학생들에게 묻고 싶다. 너희들 잘못이 아니라 이렇게 만든 사회를 원망하라고. 울부짖고 소리 지르면서 너희들 속에 남아 있는 앙금과 부정적인 가래를 뱉어버리길 간곡히 부탁한다고. 이미 이 추억 있는 감성 시대를 겪어온 이 청년은 앞으로도 너희들의 의견에 충분히 동의할 것임이 분명하다. 그러니까 힘내자. 너희들이 곧 희망이다.



한 발자국 두 발자국 세 발자국 거닐 때마다 예전 지식인들의 감성이 느껴지는 그러한 공간이다. 누군가가 그랬다. 미친 듯이 준비해서 대학교에서 즐기라고. 그럼 고등학생들은 못 즐기는 건가? 학창 시절부터 계속 세뇌되어 고막에 피가 날 정도로 들었던 그 멘트. 과연 그게 정당하고 올바른 소리일지, 아니면 대리만족을 위한 누군가의 발언일지 참으로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교육의 질은 향상되었지만, 사회 곳곳에 만연되어 왔던 우리나라 교육의 현실 태세가 그 반증을 의미하더라.


분명한 건 대학교를 왜 나와야 하는지, 대학 구성원이 되어도 어떤 목적으로 미래를 준비할지 이 부분을 자세히 알려주지 않았던 내 어린 학창 시절. 그저 현실 상 좋은 대학만 나와야 한다는 말의 모순에서 참 안타까움과 자조감이 섞인다. 그렇게 스스로 입시 공부하고 성장해오고 실패하고 우울했던 나 자신에게 이제는 한 점 부끄럼도 없다. 후회가 없는 대학 생활이었다면 다행이라고 생각이 든다. 그럼 난 지금 참 다행이다.




요즈음 대학교 교수님과 동기들을 사이버로 보는 세상. 참 지긋지긋할 거 같다. 그러니까 오히려 대학 생활은 전격 얼굴을 마주보며 서로 행복한 시간을 가지길 간절히 바란다. 조별 과제를 사이버로 하고, 피드백과 첨삭, 중간 점검도 다 사이버라고? 괜스레 미안해진다. 분명한 점은 교수님 잘못도 아니고, 대학 잘못도 아니겠지만 적어도 대학 낭만을 바랐던 지옥 고3 생활을 끝마친 학생들이 무슨 죄일까. 그저 사회가 안내해 준 현실적 방향에 맞추고 다가가는 아이들일 뿐인데 말이야. 혹시라도 코로나가 풀린다면 제일 먼저 합법적으로 돗자리 막걸리 노상 까길 권유하고 싶다.


(사실 나만의 자조 섞인 대학 라이프를 조금 대변하였다. 요즈음 대학생들 참으로 재미없는 일상을 보내는 듯 하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창의력과 미래 발견성과는 전혀 상관없는 사이버 플랫폼 앞에서 본질적인 수업을 진행한다더라니. 의미가 상실되는 대학 생활은 한순간이더라.)



그러고 보니 나도 대학 생활에 큰 의미를 두지는 않았다. 그저 3, 4학년에 스펙 쌓기에 모든 걸 투자한 나였기에 오히려 공감이 잘 안 되는 부분도 없지 않아 있다. 그나마 내가 가장 기억에 깊었던 대학 라이프를 정리하자면 조별 과제를 끝내고 친구들과 대학가에서 술 퍼마시고 개가 되어 기숙사에 들어온 썰, 기숙사 내부 생활도 꽤 재미있었던 그때의 철없던 나날들. 사감들에게 혼나고 벌점을 받아도 내 같은 룸메이트들과 몰래 술 마시고 오히려 걸려서 벌점 청소를 했던 썰, 대학 인근 뒷산, 동산에서 돗자리 깔고 막걸리 부어마시며 술에 절었던 학창 시절 등등 내 대학 라이프는 참으로 술에 미친 일상이었다. 그래도 할 건 다했다. 조별 과제가 특히 많았던 대학 라이프는 나에게 있어서 사회생활에 더 관심을 두고 책임감을 얹히도록 갈구하였다. 덕분에 철없던 1학년 생활은 군대로 마무리되었지만 앞으로 현실이 바라는 길로 가야 한다는 강박관념도 컸다. 그렇다면 이 부분이 내가 정말 잘못된 부분일지 깊게 고심하게 되더라. 사실 아니더라.


언더우드관으로 가는 방향


이 대학교에서 가장 유명한 언더우드관으로 향한다. 참고로 역사적으로도 깊이가 있는 건물이다. 사적 제276호, 근대식 건물, 서양 건축물의 기반이 있는 건물, 미술가적 예술이 갖춰진 건물 등등. 수식할 여지가 없지만 이 학교의 전신이 되는 연희전문학교를 설립한 언더우드 선교사를 기리기 위한 건물이라 보면 된다.


네이버 백과 참고



언더우드관 앞에서 신촌을 향해 바라본 장면. 이 길을 왔다 갔다 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동이 필요할지 예상 간다. 역시 대학교는 버스가 필요해. 서울대학교가 지금도 그러하다. 넓은 부지와 간격 사이사이를 학생들의 근거지 활동으로 자리 잡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투자했을지 예상이 된다.



언더우드 계단을 밟아본다. (우와 호그와트로 가는 길 같다.)



이 지역을 담당하는 수호신 역할, 해태도 있다. 언더우드관 양 옆에 있다. (왼쪽 스팀슨관, 오른쪽 아펜젤러관)


참으로 대학교 캠퍼스 투어와 연혁을 통해 역사를 공부할 수 있다는 점이 신기하다. 특히 이 학교 부지는 안산 자락을 깎아서 건립했다고 한다. 그리고 조선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면 성균관 다음으로 역사가 깊다. 근현대사를 대표하는 연희전문학교, 이화학당, 배재학당 이 세 가지 학교들이 그 틀을 잡았다고 보면 된다. 내가 알기로 연희전문대학과 이화학당은 서울에 부지를 잘 잡아 인서울의 명목을 유지했지만, 배재학당은 6.25 전쟁 당시 이전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대전으로 이동했다고 한다. 지역적으로 더 멀어짐과 동시에 현재 지방대라는 인식을 못 벗어나고 있다. 참 안타까운 부분이지만 현실을 받아들여야 하기에 더 냉정하게 생각해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청역 근처 정동 관련 옛 전통을 보전하기 위한 방안을 충분히 모색 중이라고 한다. 역사가 끊긴 학교에는 훌륭한 지식인들이 없다는 판단도 한몫하더라. 적어도 우리 학교의 설립 의도를 안다면 조금 더 자부심을 가지지 않을까 한다.



유학생들과 외국인들이 사진을 찍는다. 미국 하버드처럼 역사의 유서가 깊은 지역이라 관광지로서의 의미도 지닌 듯하다. 하긴 아펜젤러, 언더우드 등 미국 선교사들 덕분에 폐쇄정책에 망할 뻔한 구한말을 조금 개선한 부분도 없지 않아 있다. 참 고맙다. 그리고 암기식 교육 방법을 이해 방법으로 수업 진행하신 분들이기에 더 그 의미를 되짚게 된다. 특히 요즈음 그 사례로 하브루타 방식이 꽤 인기가 많다고 한다. 유대인들이 자주 활용했던 교육 방법이자, 나이, 계급, 성별에 관계없이 두 명이 짝을 지어 서로 논쟁을 통해 진리를 찾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이 또한 구한말에 선교사들이 백성들에게 활용했던 교육 방법이다. 하지만 일본제국에 의해 암기만을 위한 교육 방법으로 변질되었지만 말이다. 그래서 그 시절 본질적이고 순수한 의미의 교육을 되찾기 위해 개화파들뿐만 아니라 서양 문물, 기술, 문화에 최적화된 지식인들이 나름 애썼던 이유가 있나 보다.


언더우드 뜰




세월의 흔적이 보이는 아펜젤러관 건물. 저 덩굴들이 오랜 역사를 간직했다면 다할 나위 없이 이미 순국하신 지식인들은 꽤 행복할 거 같다.


언더우드관과 언더우드 조각상과 기념비. 학생들이 현 교육 제도의 노예가 되는 걸 간절히 간곡히 바라지 않는다. 적어도 언더우드는 알았을까? 우리 대한민국이 점점 공부가 수단이 되어간다는 것을. 다시 이런 분이 환생하신다면 우리나라 기본 교육제도부터 싹 다 바꿔주시길 기대한다.




아펜젤러관 방향


스팀슨관 방향


언더우드관 광장


왜 자꾸 해리포터 호그와트가 상기될까. 그래서 해리포터 덕분에 대학 생활을 고수했다는 학생들도 많다고 하더라.


17:00

아직 멈출 수가 없다. 더 위로 올라가 본다.


곧 있으면 일몰이 지는 연세대학교


대우관 방향으로 가는 길



참고로 작년 2020년 고(故)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흉상이 이 대우관 1층에 세워졌다.



이 구간은 대학 축제 기간 때 주차장으로 활용되었다. 내 기억으로는 대학교는 5월마다 정기 축제가 있거나, 늦으면 2학기 9~10월 사이에 진행한다. 2015년(11학번 / 고인물)에 당시 유행했던 코로나의 동생 뻘 메르스 때문에 대학 생활 고생했던 기억이 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응원단 덕분에 대학 라이프가 그렇게 무덤덤하지는 않았다. 교내 생활 안 해서 문제였다. 학회장한테 미움받았던 내 신세. 그러나 대외활동과 연합 동아리 활동에 더 치중했던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오히려 누군가가 대학 생활 중에서 어떤 사건이 제일 기억나요? 한다면 이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1. 신입생부터 몸 바쳤던 응원단 생활. 당시 학교 홍보 사절단이라는 명목으로 여러 중고등학교 및 축제 행사 이벤트 기획 행사에 참여했던 기억이 난다.


2. 응원단 활동이 연합 활동으로 더 거대화되며 각 해당 학교 캠퍼스 투어 및 인근 지역 여행에 대한 참 묘미. 참으로 재미있었다. 실제로 정기 미팅이라고 하여 응원단 존속 및 개선 변화, 액션 업그레이드 회의, 연합 무대 포지션 맞추기, 회장, 부회장, 총무, 서기 뽑기 등등. 실제 회사에서 이루어질 그러한 경영 기획까지 맛보는 단계였다. 물론 신입생 때에는 꿈도 못 꿨지만 내가 현역, 부단장, 단장이 된 이후로 그 권력의 힘이 참으로 재미있더라. 그리고 인사관리뿐만 아니라 단원 관리까지. 움직이는 대학교 사업체였다. 단 아쉬운 점은 1년만 하고 4학년 때부터는 대외활동 및 스펙 쌓기에 취중 한 나머지 응원단에 조금 소홀해졌던 점. 이때부터는 조금 눈치 보였다. 살짝 말년 병장이 소대 분위기 흐리는 느낌이랄까. 다행인 건 동기가 단장이라 많이 의지했고 매 행사마다 동기에게 미안한 마음으로 같이 행사를 뛰었다. (단장=분대장, 나=말년병장, 최고의 소대 조합)


그리고 전통적으로 응원단 생활을 하면 '다나까'를 사용하게 된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사라졌다. 아마 2010년~2015년 응원단 출신이면 알 것이다. 괜스레 군대 분위기 난다. 난 전역했는데 대학교마저도 군대 같다. 난 이 유교적인 관습이 싫었다. 아마 2015년 내가 단장하고 최대한 개방적인 사내 정책을 펼쳤다. (현대판의 개화파) 단실에서 술 까기, 취하면 잠깐 자도 됨, 타 응원단과 연애, 다나까 금지, 그러나 술 주정은 용납 못한다.


3. 당시 스펙업으로 여러 대외활동 진행함. 특히 기억나는 부분은 '아시테지', '내 나라 여행박람회, '하나투어 여행박람회, 'KTNG마케터' 등 이 있겠다. 우물 안 개구리보다는 여러 활동을 하는 게 더 소중하고 값진 교훈을 얻어 가더라. 특히 괜히 불안해서 '난 안될 거야'라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나보다 스펙 좋은 친구들이 되는 대외활동'이란 생각 자체를 버려야 함. 요즈음은 이력서와 자소서도 구라를 안 까고 정말 솔직 담백한 내 일생 일대기를 스토리텔링하여 감동 마케팅하면 거의 뽑아간다. 이건 거짓말이 아니라 진짜다. 블로그에서도 구라가 아니라 사실, 경험 위주로 작성해야 사람들이 더 공감하고 감동받는 의미가 바로 이런 사례라고 본다.



잡담이 길었다. 옆으로 꺾어지는 방향으로 나간다. 참고로 이 길은 안산으로 가는 산책길 방향이다. 내가 왜 굳이 여기를 가냐고? 참고로 이 글 취지는 골목투어라서 내가 소신 있게 주관적인 느낌에서 작성하는 여행일기라는 점. 물론 탐방기라면 동방견문록 느낌이 나도록 작성해야 하니, 마르코 폴로도 여행 일지는 안 쓰고 자기 여행 다녀온 후의 하소연 적더라. 관동별곡 작성한 정철은 말할 것도 없다. 부질없는 연군지정, 우국지정 읊다가 강원도까지 가는 처량한 신세야.



연세대학교에서 안산 둘레길로 가는 방향


참고로 입구가 등산로 같다. 그렇다. 대학교라고 뭐 다를 거 없다. 일단 들어간다. 18:00 일몰이라 1시간 남았던 상황. 검은색의 기다란 아우터를 입고 올라간다.



올라가다 보면 안산 공원에 입성했다는 간판 구경과 함께 옛날 연희동 산자락 동네와 풍경이 등장한다.



배드민턴 치시는 토박이 주민 어르신들. 다들 혈기왕성하게 '핫' '헛' '흐앗'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후회 없이 후회 없이' 구호를 외치신다.



이정표가 보인다. 당연히 안산 자락길로 가야지. 저기 꼭대기에 봉수대가 있다고 한다.



잠깐 힘들어서 중간 벤치에서 쉬었다. 가끔 대학생들이 아웃도어 패션으로 산책을 한다.



이름 모를 정자가 있다. 무악정이라는 이곳은 그저 잠깐 쉬는 곳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살짝 고풍스러운 감이 묻어 있다. 뭐랄까. 아차산 고구려정을 보는 느낌이다.



안산도시자연공원 표지판


쭈욱 올라가다 보면 H 표시가 된 봉수대 입구 인근 장소가 보인다. 헬리콥터 표시 지역인가 싶기도 하다. 아마 산불 예방이나 인명 피해 관련 고립을 방지하려고 일부러 만든 표식일지도 모르겠다. 참 센스 있다. 좋다.




드디어 봉수대 도착했다! 안산 봉수대이면서 동시에 무악동 봉수대라고 부른다. 정상에 도착하자마자 힘겨운 응축된 숨을 내뱉는다. 바람이 무섭게 분다. 다행인 건 사람들이 없어서 더 좋았던 오후 17:30이다. 이 시간에서 30분만 더 기다리면 일몰지는 소식을 듣고 주변 경관지를 찍어본다.



예전 조선 때부터 봉수대의 의미는 꽤 중요했다. 외세가 침입한다는 경고 표시, 그리고 때에 따라 인근에 연결된 봉수대에 불이 퍼진 횟수에 따라 위험 단계를 따졌다고 한다. 참으로 과학적이다.


17:45


일몰이 슬슬 퍼진다. 노른자가 얼른 퍼져서 도시 하늘 전체를 물들었으면 좋겠다.



아쉽게도 날씨가 조금 흐릿했다. 이 지역에 비가 왔다는 증거. 한쪽만 빨갛고 다른 한쪽은 파랗더라.



하늘에 누군가가 빗질을 한다. 세상의 모든 속세를 지우려는 흔적일까. 조용히 사색하게 된다.



하늘에서 자신의 자유를 되찾으려고 하는 어느 사람들의 이야기가 귓가에 맴돈다.



일몰까지 5분 남았다. 빗질은 더 예술적으로 바뀐다. 중요한 손님이 왔나 보다. 결과적으로 빗질은 성공적이었다. 상쾌한 공기가 입속으로 들어온다. 머리가 맑아진다.


그렇게 잠깐의 여유를 가지고 하산한다. 다행인 건 안산 둘레길은 길이 참 잘 되어있다. 난 홍제천 방향으로 이동했다. 원래 등산은 같은 코스를 왕복하면 재미가 없기 때문이다.


갑자기 또 다은 길로 등산한다. 인생은 모른다 오르막길 내리막길 그냥 반복의 연속. 난 차라리 올라가는 길이 좋다. 내려가는 길은 항상 다리 풀리는 순간에 등장하더라.


그리고 등장한 그 장소, 빨간색으로 표시하겠음. 은근히 데이트 코스랑 가을 둘레길 걸으면서 감성을 느낄 수 있는 장소. 특히 안산 봉수대에서 일몰 보고 도착하면 문학 감성이 있는 곳이다.


소설가 만우 박영준 문학비 둘레길 가는 방향


난 이 길이 너무 좋다. 그러나 네이버 지도에서는 표시가 안 돼있더라.


박영준 소설가에 대한 뉴스 기사 참고


만우의 작품은 전쟁의 참화 한가운데 던져진 인간의 삶도 넉넉한 감동의 소재임을 보여주었다. 긍정적인 시선으로 사회적 격차를 문화 예술화시킨 작가의 정신력이 돋보인다는 글이 보인다.


윤동주, 김소월, 김수영 등 다양한 시인과 소설 외에도 근현대사 문학계의 거장을 한 명 더 배우게 된다. 나중에 문학계의 인물들을 내 철학 신조와 신념에 맞게 분석하는 기록을 포스팅하고자 한다. 덕분에 이런 여행도 하고 역사 공부도 하는 상황이 매우 좋더라.


참고로 위치는 안산공원과 홍제천 사이에 있는 벚꽃 마당이라는 봄에 다양한 꽃을 볼 수 있는 공원이 있다. 그러나 가을밤에도 느낌 있는 경관을 연출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 이유는 아래 사진을 보면 안다.


안산공원 벚꽃 마당 인근에 세워진 기념비


서대문구가 일을 참 잘한다. 역사적이고 전통 있는 지역이라 그런지 지역들을 하나하나씩 자연 친화적으로 탈바꿈하고, 현대 트렌드화에 맞춰서 도시 재생을 일궈내기도 한다. 다른 구청들이 이 사례를 보고 많이 배웠으면 한다. 특히 이 지역들을 스토리텔링하는 공무원분들, 도대체 어떤 창의적인 크리에이터를 섭외한 거냐. 참 대단하다. 앞으로 이렇게 하길 바라는 청년.


요즈음 둘레길도 스토리 텔링화 시킨 구역이 참 많다. (앞으로 더 기대되는 부분이다.) 윤동주 문학관이 있는 청운동도 나름 문학의 소양이 깃든 둘레길, 자락길 코스로 유명하다. 그러니까 전통이 깃든 지역을 함부로 없애면 안 되는 이유가 있다.



기억 찾기 길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저 빨간색 위치가 확실할 거다. 밤이 깊어지기 전에 홍제천 방향으로 빠져나가 본다.



가을 분위기는 아니지만, 공원 생태 조성은 잘 되어있다. 사람들의 때가 거의 묻지 않은 곳이라 더 느낌 있는 곳. 벚꽃 마당이라는 이 구역명을 추측하면 아마 봄 축제 장소라는 것으로 예상된다.




길 따라 쭈욱 내려오면 응암동으로 이어지는 홍제천이 있다. 그리고 특이한 점은 하천 위를 걷는 돌길이 있다.



그렇게 한숨이 놓이는 그런 곳에 도착한다. 허벅지가 아프다. 이제 천천히 이동해야겠다.


한강 마포 방향으로 이어지는 작은 하천이 나온다. 그리고 그동안 찍었던 사진을 다시 한번 더 구경을 해본 다음에 이 길을 마무리하여 다시 빠져나가 본다.



생각해 보니 신촌동에서 안산을 넘고 응암동 인근까지 왔다. 전체적인 경로는


그래 캠퍼스 투어하고 등산도 하고 노을 샷도 찍고 산책길도 거닐고 문학, 역사 공부도 하고 그걸로 된 거다. 이렇게 하루를 마무리하면서 사색을 핑계로 다시 집에 간다면 얼마나 의미 있는 하루일까. 카페 투어도 하나의 매력이지만 이 소소한 곳을 탐방하는 묘미는 계속 머릿속에 각인될 것이다. 앞으로도 그렇게 할 거고.


요즈음 도시 재생 프로젝트에 관심이 많아서 관심이 더 깊다. 전에 블로그 쓴 내용들처럼 내가 정말 골목투어를 하면서 여행에 관점을 두는 게 아니라 내가 원하는 내 여행 철학이 들어가 있어서 더 좋다고 본다. 특히 '도시화는 지속되지만 자연, 생태주의적 관점에서 공생하는 도시'라는 핵심을 기반으로 재개발되는 구역들이나 사람들에게 잊히기 쉬운 지역을 탐방할 목적은 계속 지속된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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