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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갓혁 Mar 22. 2022

태극기 휘날리며 (전쟁에서 숭고한 가치를 꺼내보다.)

서대문형무소와 난쏘공카페를 둘러보며.

3.1 (삼일절)


이번 골목투어의 취지는 조금 일상적인 글을 담고자 한다. 가끔씩 특별한 일상을 투어에 결부시키면 나 또한 기록하는 맛이 더욱 감미로워진다.


특히 삼일절을 맞아서 평소 역사에 관심이 많은 나는 서대문형무소 탐방을 하기로 했다.


내린 곳은 독립문역이었다.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다. 특히 가족 관람 단체로 모이거나 역사 동호회 위주로 사진 출사를 하기 위한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평소에 관광통역사 공부를 하면서 가끔씩 이론 수업보다는 밖으로 나와 직접 둘러보고 싶었다. 마침 그 장소가 서대문형무소였다.


솔직히 대만족이었다. 물론 코로나 핑계로 나오지 않는다면 조금 아쉬운 나였기에, 그리고 3월 이후로는 슬슬 관광이 다시 활성화되길 간절히 바라는 국민들도 많았다. 어차피 엔데믹 현상이면 일반 독감처럼 지내야 하는 과정이라고 생각이 들곤 했다. 현 정부의 관광에 대한 방침과 우리들의 생각이 첨화를 이루어 1석2조 형식이 되었던 셈이다.



*개인/단체 온라인 예약 방법


서대문 형무소 예약 방법 : 서대문형무소역사관 (sscmc.or.kr)

딜쿠샤 예약 방법 : 전시/관람 | 문화체험 | 서울특별시 공공서비스예약 (seoul.go.kr)


(참고로 방문 일자 전날까지 신청해야한다.)



코로나로 인한 서대문형무소 전체 관람은 불가했다.



현재 가능한 코스를 거의 돌면 대략 2시간 정도 소요된다.


아쉽지만 전체 관람은 불가했다. 대신에 일부 장소를 개방하였고 각 시간마다 안내 해설가 및 큐레이터분이 10분 정도 설명해 주시고 입장하도록 해주셨다. 하필이면 사람들이 몰리는 오후 4~5시에 도착했다.


그래서 일부 안내사들도 최대한 편리한 동선을 만들어주기 위해 딱 둘러보기 좋은 곳만 안내해 주시고 자유관람하도록 해주셨다.


예전 같았으면 15분 잡고 안내에 따라 이동해는 수동적 관람이었다만, 요즈음은 자유자재로 구경하게끔 해주신다. 그리고 큐레이터들 또한 편하게 힐링하시는 것은 대만족~! 솔직히 이분들 1시간마다 계속 같은 말해주시고 안내해 주시고 변수 대처해 주시려면 엄청난 노고가 필요하시다.


난 이분들의 고된 업무를 알기에 솔직히 3월 이후 개편될 큐레이터 거리 두기 개정안을 적극 찬성한다.


독립유공자 매점

입구에 들어서면 '독립유공자 매점'을 발견할 수 있다. 신기한 점은 종로구 안에 있는 대부분의 편의점들은 간판이 한글로 되어있다!


예를 들면 씨유, 지에쓰, 세븐일레븐, 매점 등등.. 아무래도 적극적인 외국인 관광객 유치를 위한 종로구의 재빠른 정책 구현이 아닐까 한다.



그리고 기다란 서대문형무소 장벽들이 우두커니 서있다. 우리가 아는 감방의 원조가 바로 일제강점기에 세워진 형무소라는 점에서 참 진기한 풍경이었다. 그리고 곳곳에는 시인 윤동주와 한용운 선생님, 이육사 시인의 아픔을 느낄 수 있는 시와 어구들이 즐비해있다. 입구로 들어서면 연세대 느낌 비슷한 언더우드관 풍경이 보인다. 그렇지만 그런 느낌으로 힐링할 곳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쓰러져가고 무너져내릴 듯한 이 빨간색 거대 담벼락 안에서 숭고하고 무고한 독립운동가들이 처형당했다. 내가 좋아하는 시인들, 특히 윤동주 시인 또한 얼마나 많은 고군분투를 겪으셨을까.


담벼락 사이사이에는 그 수많은 운동가들의 새까마한 손톱자국의 흔적이 어렴풋이 보였다. 그리고 화염에 그을린 장소와 1인 형무소까지 찾게 되었다. 큐레이터가 말하길, 윤동주는 일제에 의해 고된 생체실험을 당했다고 한다. 그 장소가 바로 이 장소였다.


저 멀리 보이는 일본인 순사의 마네킹은 독립운동가들을 처참히 몽둥이로 구타하며 안으로 들어오라는 손짓을 하고 있었다. 그 인공적인 퍼포먼스는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하나의 역사였다.



서대문 형무소 인근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태극기를 들고 퍼포먼스를 하고 있었다. 그들이 외치는 바람은 하나였다.


'독립유공자들을 위한 정부의 적극 대처가 필요하다.'


이 피켓과 문구를 들고 소소한 행동 예술로 적극 승화시켜준 그분들께 감사할 따름이었다. 한편으로는 인근 경비원들이 그들이 혹시라도 도발하고 잦은 시위를 펼칠까 봐 근심 어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래도 오늘은 삼일절인 만큼 이러한 행동에 대해 잠시나마 예우를 대하고 진실한 과정으로 다가가길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그 누구도 이분들에게 뭐라 할 의사 표현은 없었다. 다들 조용히 관조하였다. 마치 다시 일제강점기로 돌아간 운동가들처럼.


형무소 안에 위치한 거대한 태극기

이 거대한 태극기가 형무소 안에 꽉 채워져있다.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당연히 볼 수밖에 없는 풍경이었다. 아픔 속에서도 그들의 표정을 읽어낼 수 있을 만큼 거대하고 웅장했다.


국기 게양을 하던 군 생활이 떠올랐다. 그 당시에는 이 태극기가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정확히 인지하지 못했고 그저 형식적인 군생활로 생각해왔던 그날의 연속들.


그러나 어른이 되어 다시 생각해 보니 이 국기 안에는 값을 매길 수 없는 다양한 신념과 사상이 깃들어져 있었다.


나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모든 부모님들은 아이들에게 좋은 것만 가르쳐주고 싶고 보여주고 싶어서 오늘날만큼은 서대문형무소에 온 것 자체에 큰 기쁨과 예찬을 아끼지 않으실 것이다. 그렇게 믿어왔다. 그리고 그 신념이 현실화되었다.


조용히 인근 인왕산 부대에서 국기 게양하는 소리가 들리자 몇몇의 사람들은 인왕산 자락을 바라보며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기 시작했다. 자츰 조용해지고 쌀쌀한 저녁이 되어서도 우리들 마음속에는 아직 '윤동주'와 '이육사', 그리고 '한용운' 등의 멋진 독립운동가들이 자리 잡았다는 점은 무시 못 했다.


나 또한 맹세코 스스로에게 다짐을 하였다.


'역사란 멈춤이 아니라, 현재 계속 진행 중이다.'




통일로를 바라보며.
서대무형무소역사관
독립지사들의 처절한 울분의 장소. 그래서 잊지말자.


큐레이터가 마감시간이 되었으니 얼른 나오라고 하셨다. 잠시나마 국기에 대한 경례를 일단락시키고 조용히 쓸쓸히 그리고 하염없이 땅만 바라보며 출구로 이동하였다. 그들의 표정을 읽었을 때 관람객들의 마음 속에서 피어나는 무언의 이야기가 오고 갔을지도 모른다.


누구와 무언의 이야기를 하고 계셨던 것일까. 할아버지는 조용히 웅얼거리시면서 대한 독립을 연거푸 이야기하심이 내 귀에 들렸다. 어느 귀여운 유치원생은 아버지한테 대뜸 유관순 누님 보러 가자고 손짓을 하는 중이었고, 철없는 초등학생 친구들은 손에 쥐인 태극기를 휘날리며 동동 발걸음을 구를뿐이었다.


태극기 휘날리며

태극기를 보며 그동안 시청했던 영화들이 떠올랐다. '태극기 휘날리며','웰컴투동막골','고지전','밀정','암살' 그 외에도 드라마가 막연히 머릿속으로 지나쳐갔다. '미스터션샤인'


드라마 미스터션샤인 中

나라를 잃은 자의 설움은 무엇일까.


유관순

난 어릴 적 유관순을 굉장히 좋아했다. 더 깊이 파고들면 구한말 남녀평등을 앞장세우는 멋진 여성이었다. 단순히 유교 사상에 얽매인 조선의 마지막 뿌리들을 깊게 불태웠고, 유관순은 이러한 말을 남겼다고 한다.


'나는 양성평등을 억제하고 통제하는 현존 유교사상을 타파하기 위한 선두구자이며, 독립의 새로운 어머니이다.'


이 말이 굉장히 각인되었다. 스스로 우매하고 몽매한 사람이지만 이 자리를 대표한다라니.. 어쩌면 스스로 겸손함을 취하면서도 굳센 자신감을 표현한 내용이 아닐까 한다.


독립과 민주의 길 '당신의 역사를 기억합니다.


현재까지 생존하신 독립지사 30명의 족적(발자국)이 있는 자리가 따로 전시되어 있다. 이들은 수많은 아픔과 노고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숭고한 업적을 남기시기 위해 이 자리로 돌아오셨다. 비로소 기록으로 남겨진 그들의 발자국은 누군가에게 뜻깊은 동기부여가 될 것이다.


독립지사 30명을 담다.
사적 제32호 서울 독립문



어차피 관광통역안내사 공부를 하면서 한번 와봐야 하는 곳이었다.

난 참으로 신기했다. 원래 영은문으로 있던 자리에 '독립문'이라는 새로운 건축물이 들어선 상황이 말이다.


미국 유학파이자 개화파의 아버지 '서재필'이 주도한 독립협회에서 만든 독립문은 사실 청나라로부터 자주권을 확보하기 위한 하나의 방침이었다. 일본뿐만 아니라 청나라의 간섭이 무척 심했던 고종 집권 시절에 그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 한국으로 귀화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참 웃긴 점은 미스터션샤인에 나오는 이병헌 배우(유진)가 서재필을 본떠서 만든 캐릭터라고한다. 알고 보니 본인이 원해서 미국으로 도망친 것이 아니라, 조선 구한말 앞날의 발전을 위해 그리고 선진문물을 받아들이고자 본인이 스스로 미국에 뛰어 들었다는 점이었고 그 내심 속마음에는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기 위한 하나의 각성제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즉, 서재필이 스티붕유처럼 군대를 회피하려고, 혹은 자신의 명예가 더럽혀질까봐 외국으로 도망갔다는 것은 오보이며, 그저 고종의 명을 받아 타국으로부터 독립과 자치권 확보를 위해서 열심히 앞장 섰다는 점이 기정사실화되었다. 그리고 서재필은 이 멘트를 남겼다.


'비록 내가 미국 시민권자여도, 피는 대한민국 사람이다.'


최근 베이징 동계 올림픽의 루지 대표선수이자, 대한민국으로 귀화한 아일린 프리쉐 선수가 떠올랐다.


독립문 - 난쏘공 (걸어서 15분)

인근 사직단 방향으로 걸어갔다. 경사가 굉장히 가파른 지역을 마주쳤다. 아마 인왕산 자락에 위치한 동네를 지나가고 있는 중일 지도 모른다.



사람중심 명품도시 종로. 그리고 마스코트 종돌이


카페 딜쿠샤 / 종로는 근현대사의 중심지.


#딜쿠샤

인근에 딜쿠샤라는 유명한 국가등록문화재가 있다.


3.1운동 독립선언서를 외신으로 처음 알린 미국인 앨버트 테일러의 가옥이다. 그리고 그의 아내가 인도의 딜쿠샤 궁전의 이름을 본떠 만든 자리가 바로 내가 서 있는 자리이다. 놀라운 점은 2021년 3월 1일에 최초로 공개, 개방했다고 한다.


시간이 맞지 않아 내부 구경을 하지는 못했지만 여러 리뷰를 보고 읽어보았을 때, 적어도 구한말 조선의 상황과 대한 제국의 상황을 재빠르게 전파하기 위한 외국인들의 노고가 있었기에 국가문화재로 등록되었지 않았나 싶다. 결국에 그 앨버트는 일제의 노골적인 외국인 귀화정책으로 미국에서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앨버트의 본가는 일면식이 있는 어느 교수의 도움으로 연구를 하고 복원한 결과 재탄생하게 되었다.


인왕산까지 걸을까 말까.


마음속에 품은 딜쿠샤를 마음 한켠에 담아두고 인근 인왕산 자락 오르막길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흔적이 없는 이유를 알겠다. 상당히 경사가 가팔랐다. 대신에 나의 전지전능한 뚜벅이로 느닷없이 빠르게 속보하기 시작했지. 덕분이라고 할까. 노을을 구경 하지는 못했지만, 인근 인왕산 자락길을 구경할 수 있었다.


어느새 물들어진 흰색 담벼락 위로 솟구치는 잔잔한 불빛을 바라보면서 다시 한번 잘 왔다고 생각했다.


홍난파가옥
한양도성자락길
한성도성


멈출 수 없었던 나의 걸음을 겨우 만보를 찍고 나서야 다시 한번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제 봄을 알리는 소소한 풍경들일지 아닐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마음속에서는 따스한 풍경의 냄새가 펼쳐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인근에 한국의 저명한 화가의 집인 '홍난파가옥'을 구경하였다. 밤에 빛을 비추는 광경을 잠시나마 구경하고 다시 제 발걸음을 이동했다.


카페 난쏘공


인근에 난쏘공카페를 발견했다.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라는 소설이 떠올랐다.


우리 소시민의 삶을 대변하는 현대주의 소설이다. 예전 문학책에서 읽었는데 바로 옆 고기 굽는 아파트 단지와 허름한 집에 사는 주인공 가족이 대조되는 모습이 자주 눈앞에 아른거렸다. 어쩌면 지금 또한 그런 상황을 예견한 글쓴이의 마음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내가 있는 이 동네 이름은 예전에 돈의문 박물관으로 유명한 '교남동'인근이라고 한다. 확실히 올라오면서 경사가 급하고 인근 다닥다닥 붙어있는 판잣집 느낌의 연립주택들이 문학적 느낌을 선사해 주었다.


'사람이 머문 그 자리에 오롯이 향기가 풍겨져 있다.'



사장님이 스콘을 제공해주셨다. 서비스-라고 말씀하시면서 맛을 보았는데 굉장히 달짝지근했다. 안에는 대추와 여러 견과류가 있었다. 덕분에 지금 포스팅을 하면서도 힘이 났다. 매우 감사했다. 이렇게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우리의 삶은 별거 아니었기에 더 감칠맛 나는 하루이다. 그래서 우리는 매사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그저 그런 삶이었기에.



저 멀리 보이는 손톱같은 달이 나에게도 한마디를 던진다.


'역사를 모르는 자에게는 미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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