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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갓혁 Mar 31. 2022

구십도에서 만난 사람들.

혼자라고 느낄 때

성산에 있는 시골감성 셰어하우스인 구십도에 도착한 이후 낯선 타인들과 자기소개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묘하게 효리네 민박 감성은 덤)


현각이형은 피곤한 여력이 가득했다. 알고 보니 다음날 병원에 갈 일이 있었기에. 그래도 저 멀리 육지에서 내려온 나를 반갑게 맞이해준 형님께 감사할 따름이다. 1년 만에 만났어도 어색하지 않았고, 다만 요즈음 많이 힘들거나 지친 일상을 보내고 있지 않을까 내가 괜스레 미안해지고 근심 걱정이 많았다.



애써 웃으면서 자기는 잘 테니 여기에 계신 사람들과 오붓한 이야기와 소중한 시간을 가지라며 나에게 웃음을 날려주고 어디론가 이동하였다. 나른한 목소리와 함께 힘이 없어 보이던 형님의 뒷모습을 보면서 예전 같지가 않은 분위기에 사실 마음이 아팠다. 코로나 장기 여파가 지속됨에 따라 점점 무기력해지는 우리의 삶을 대변해 준 어느 건장한 30대 사장님의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이내 마음을 다시 잡고 내 키가 간신히 닿을 정도의 입구로 들어섰다. 그리고 지퍼를 여는 순간 조용히 이야기하시던 분들의 시선이 나를 향해있었다. 굉장히 어색하고 부담스러운 여력이 감돌게 뻔했지만 이내 나의 파워 ENFP 성향을 고스란히 보여드리고자 자신만만하게 신발을 벗고 마룻바닥 비스름한 로비로 이동했다.


구십도 쉐어하우스


아마 이 장소였다. 넙적하고 삐거덕거리는 나무 목재로 만들어진 책상 위에 서로 안면식이 이루어졌다. 처음에 내 자리에 누군가가 방석을 올려주었던 장면을 보고 굉장히 놀랐다. 난 그분들이 모두 스태프인 줄 알았다. 알고 보니 굉장히 매력만점의 개성을 지닌 여행객들이었다. 그리고 서로 사는 지역과 이름, 그리고 MBTI 성향을 나누면서 아이스브레이킹을 이어갔다. 생각보다 빠른 친화력을 소유하신 분들이었기에 나 또한 놀라웠다. 각각의 개인적인 사정이 있기에 이곳에 오신 걸까. 내심 궁금했던 나는 예의가 없을 정도가 아닌, 그저 나만의 탁월한 은유법 섞인 질문을 이어갔다.


"제주도에 오신 이유가 따로 있으실까요? 전 현각이형.. 아니 사장님 뵈러 왔거든요."


A : 저는 5일 전부터 이 구십도가 너무 마음에 들었고 특히 특별한 이유 없이 그저 편하게 머물다 갈 수 있다는 느낌을 받아서 바로 오게 되었어요.


B : 전 퇴사 여행입니다.


C : 앞으로 해보고 싶은 것들이 무수히 많아서 혹시라도 그러한 사람들이랑 같이 일상을 공유하고 싶어서 왔어요.


D : 현실로부터 잠깐의 안녕을 고하고 섬이 가지는 특수한 매력에 빠지고 싶었어요.


사실 이 네 분이 모두 말씀하셨던 내용은 나의 기억 왜곡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오자마자 술 한잔했기 때문이다. 답답함이 밀려오는 어느 호텔, 오피스텔과 다르게 사람들의 소소한 이야기와 피톤치드 향이 풍기는 목재 인테리어, 그리고 조용한 빛을 머금은 전구의 나열선, 마지막으로 제주도의 따스하고 선선함이 어색할 정도로 미묘하게 섞인 바람과 이내 코로 풍겨오는 인근 섭지코지의 파도 향기까지 모든 것이 환상의 궁합이었다.


구십도에서 머문 사람들의 인생 사진, 그리고 기록, 추억.


육지에서 미쳐 이야기하지 못했던 소소함의 이야기를 타인들과, 그것도 서로 일상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과 오늘 구십도에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굉장히 매력 있고 뜻깊은 감성이었지.


하마터면 오지 못해 아쉬움이 가득할 여정이었다. 현각이형을 볼 수 있어서 기쁘기도 했고 그 과정은 마치 잘 될 것이라는 의미심장한 내용을 포괄한 것처럼 순조롭게 나의 제주 조각들이 하나하나 맞춰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름 모를 카드게임을 진행하면서 서로 웃고 떠들 수 있다는 점에 감사했다. 비록 코로나라서 위험하기도 하지만 정녕 이분들을 만나지 못했으면 나의 여정은 완전히 꼬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밤이 무르익고 12시에 뒷정리를 마무리하며 나를 포함한 형님 2분과 함께 침실로 이동했다. 그러나 아직 자기 아쉬웠던 그날의 기억을 토대로 어쩌면 나 또한 육지에서 마무리하지 못한 어떤 매듭을 꽉 묶고 싶었을 것이다. 아쉬워서 그래. 정말 아쉬워서.


새벽 2시까지 진솔한 이야기가 오고 갔다.


예전 20대에는 '헌팅'과 '이성적인 만남', 그리고 '광란의 술 파티'만 이어갔던 철없던 나를 되돌아보는 계기가 구십도였다. 당장 그날에 이분들을 여기서 만나지 않았다면 나의 과거사를 통한 성찰과 반성을 미쳐 깨우치지 못했을 것이다. 수많은 위로와 조언을 아끼는 사람은 표현이 덜 된 사람이라고 배웠던 그날의 기억, 그리고 그 과정에서 표현하지 않는다면 오해가 쌓이고 결국에는 단절된 소통으로 이어간다는 상념의 벽을 연상케하던 이 곳.


나는 수많은 숙소와 게스트하우스를 거쳤지만 이렇게 진솔한 이야기를 나눈 장소는 여기가 처음이었다. 술이 전부가 아니었다. 단지 '사람'이 머문 자리이기에 아름답다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았을까.



아침이 되었다. 9시에 현각이형이 나를 직접 깨워주셨다. 사실 어제부터 내가 아침형 인간이 아닌지라 꼭 깨워달라는 간곡한 요청을 했었지. 형님은 몸 상태가 안 좋고 근심이 많아 보였지만 나를 위해 직접 마중 나와준 모양이었다. 고마움과 함께 아쉬움은 매한가지였다. 형님이 1시간 뒤에 병원으로 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식을 먹기로 했다. 간신히 내 키가 딱 닿는 부엌으로 가서 콘푸로스트와 우유를 섞어 야외 식탁으로 가져와 섭취하였다. 5년 만에 먹는 호랑이 기운이라 왜인지 그날따라 기분이 좋아지더라.



어제 잠깐 있었던 그 장소에 다시 와보았다. 현각이형은 가기 전에 목제 책상 위에 기분이 좋아지는 향을 피워놓고 나갔다. 은은하게 피어 오는 자연의 냄새가 내 후각을 자극했다. 그리고 멍하니 밖을 바라보면서 따스한 제주도 풍경을 멀리, 저 멀리 구경해 보았다. 이내 책을 읽고 싶은 심정에 옆에 꽂혀있던 철학 비스름한 시집을 꺼내보았다. 그러나 이내 나의 시선은 책이 아니라 여전히 구십도 외곽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싸인이었다. 밖으로 얼른 나가자는 내 마음의 징조였다. 본능적으로 다시 밖을 나가보았다.





어디선가 하이톤으로 울고 있는 고양이 소리가 들렸다. 입구로 나가보니 바로 앞에 떡하니 앉아 내 앞에서 배를 까기 시작했다. 일종의 신뢰관계였을까. 아니면 제주도에 사는 고영희들은 좨다 이런 모양일까. 마치 나를 사람으로 안 보고 같은 자연적인 친구로 보는 듯이 배를 뒤집고 마사지 해달라는 듯이 손을 배배 꼬기 시작했다. 꼬리가 앞으로 이동했다. 기분이 좋다는 징조였다.


그렇게 무료 마사지를 진행하면서 어제같이 이야기를 나누었던 형님께서 이 광경을 보면서 이 말씀을 해주셨다.


"여기 제주도는 육지와 다르게 여유롭고 사색하게 된다. 그냥 여유로워. 뭐가 그리 급한지 다들 핫플레이스를 시간에 쫓기듯 가려고 하고. 굳이 제주도에서 말이야. 고양이 인생 부럽다."


맞아. 이 여유로움의 미묘한 공기 흐름마저도 나를 마치 2배 덜 속도 내게끔 해주고 있는데 말이다. SLOW-DOWN -


고양이마저도 20분 동안 무덤덤하게 마사지를 받고 제 갈 길을 갔다. 오늘 했던 일과 중에 제일 기뻤던 고양이가 아닐까 싶다.


편안한 침대 : 구십도 침대


잠깐이지만 다시 침대에 누웠다. 3월의 제주도는 마치 초여름 같다. 따스하지만 그렇게 덥지도 않고 정말 사람이 기분 좋아지는 매력 지수라고 할까. 그 분위기인지 나도 모르게 다시 침대 위에 살포시 누워버렸다. 마치 이 자세로 있자면 그냥 잘 것 같다. 하지만 오후에 업무 일정이 있기에 제주도 시내까지 가야 한다. 나에게 남아 있는 시간은 당시 6시간 정도. 1분 1초가 매우 아까웠다고 생각하지만 몸이 안 일어나진다. 5분 정도 잠깐 눈을 감고 '오늘 뭘 해야 할까'라는 단순한 1차원적인 생각을 하게 되었다.


육지에서는 이러한 생각조차 나질 않았다. 오히려 '언제 끝나지?'라는 강박관념에만 사로잡혔던 결과론주의적 사상에 깊게 빠진 나였거든. 아무튼 결과에 주 근본이 되는 '원인과 과정'이 가장 핵심이었던 이 제주도에서, 그리고 구십도에서 나만의 색깔을 찾아가는 과정을 고심히 생각하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렇게 생각하다가 잠깐 잠이 들었다.

체크아웃 늦게 했다고 현각이형한테 혼날 느낌은 배제한 채.


<다음 화에 이어집니다.>

나만의 파도를 만들다. (brunch.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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