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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하와 함께 돌아온 방, 불을 켜지 않은 채 어둠 속에 앉아 도현이 남기고 간 낡은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는 먼지 쌓인 인화지들과 짧은 메모들이 흩어져 있었다.
그의 필체로 적힌 글자들은 내가 외면하고 싶었던 진실을 낱낱이 고해하고 있었다.
'이곳은 화려하지만, 우리의 일상은 지루하다.'
'더 넓은 세상을 찍고 싶다. 그녀의 웃음보다 더 강렬한 빛을 찾고 싶다.'
그가 느꼈던 권태와 야망의 기록들. 그것을 읽어 내려가는 동안 가슴 한구석이 서늘하게 비어갔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상자 밑바닥에서 발견한 건 나의 가장 아름다웠던 한때였다.
그가 꿈을 좇아 나를 버렸던 그 순간에도, 그의 렌즈가 가장 오랫동안 머물렀던 곳은 결국 나였다. 빛바랜 사진 속의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바보 같아. 이렇게 아름다웠는데, 그게 지루하다고 도망친 거야?"
눈물이 툭, 사진 위로 떨어졌다.
그를 원망하는 마음보다 더 깊은 곳에서, 그 시절 우리가 나누었던 찬란한 온기가 되살아났다. 미치도록 미운데, 그 이기적인 남자가 보여주었던 사랑이 너무나 눈부셔서 외면할 수가 없었다.
그리움은 늘 이런 식이다. 가시가 돋친 진실인 걸 알면서도, 그 끝에 매달린 달콤한 추억 한 조각 때문에 결국 상처 입을 걸 알면서도 손을 뻗게 만든다.
우리는 사진을 가슴에 품고 소리 없이 울었다.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부서진 조각조차 찬란했던 우리의 한겨울이 창밖의 눈송이처럼 흩날리고 있었다.
재하는 밤새 잠들지 못했다. 거실 소파에 앉아 열린 방문 사이로 들려오는 우리의 낮은 흐느낌을 묵묵히 견뎌낼 뿐이었다. 새벽녘, 울음소리가 잦아들고 나서야 그는 조심스럽게 방으로 들어갔다.
바닥에 흩어진 사진들, 그리고 우리의 손에 꼭 쥐어진 도현의 기록들. 재하는 그것들을 하나하나 주워 담으며 심장이 서서히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결국... 버리지 못했구나."
사진 속 도현을 바라보는 우리의 표정이 너무나 찬란해서, 재하는 자신이 아무리 애써도 채울 수 없는 시간의 벽을 실감했다. 그는 잠든 우리의 머릿속을 조심스레 쓸어 넘기고는, 차마 다 치우지 못한 사진 한 장을 주머니에 넣은 채 밖으로 나왔다.
한편, 마을 입구 카페에는 낯선 여자가 차가운 공기를 뚫고 나타났다. 도현의 대학 후배이자, 그가 꿈을 좇아 외국을 떠돌 때 늘 곁을 지켰던 지수'였다. 그녀는 도현이 이곳으로 왔다는 소식을 듣고 단숨에 달려온 참이었다.
"선배, 결국 여기였어? 그 무책임한 권태를 핑계로 도망쳐온 곳이?"
지수는 카페 창가에 멍하니 앉아 있는 도현을 향해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누구보다 도현의 이기심을 잘 알았고, 동시에 그 이기심을 동경하며 사랑했던 사람이었다.
"한우리가 알까? 선배가 나랑 같이 사진 찍으러 다니면서, 우리 사이가 얼마나 지루하다고 불평했었는지."
지수의 등장은 평온해 보이던 재하와 우리의 일상에 던져진 또 다른 가시였다. 재하가 카페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지수와 도현, 그리고 재하의 시선이 얽히며 차가운 공기가 소용돌이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