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울 두 미소

by 산속

7

재하와 함께 돌아온 방, 불을 켜지 않은 채 어둠 속에 앉아 도현이 남기고 간 낡은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는 먼지 쌓인 인화지들과 짧은 메모들이 흩어져 있었다.
​그의 필체로 적힌 글자들은 내가 외면하고 싶었던 진실을 낱낱이 고해하고 있었다.
'이곳은 화려하지만, 우리의 일상은 지루하다.'

'더 넓은 세상을 찍고 싶다. 그녀의 웃음보다 더 강렬한 빛을 찾고 싶다.'
​그가 느꼈던 권태와 야망의 기록들. 그것을 읽어 내려가는 동안 가슴 한구석이 서늘하게 비어갔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상자 밑바닥에서 발견한 건 나의 가장 아름다웠던 한때였다.
​그가 꿈을 좇아 나를 버렸던 그 순간에도, 그의 렌즈가 가장 오랫동안 머물렀던 곳은 결국 나였다. 빛바랜 사진 속의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바보 같아. 이렇게 아름다웠는데, 그게 지루하다고 도망친 거야?"
​눈물이 툭, 사진 위로 떨어졌다.
그를 원망하는 마음보다 더 깊은 곳에서, 그 시절 우리가 나누었던 찬란한 온기가 되살아났다. 미치도록 미운데, 그 이기적인 남자가 보여주었던 사랑이 너무나 눈부셔서 외면할 수가 없었다.
​그리움은 늘 이런 식이다. 가시가 돋친 진실인 걸 알면서도, 그 끝에 매달린 달콤한 추억 한 조각 때문에 결국 상처 입을 걸 알면서도 손을 뻗게 만든다.

​우리는 사진을 가슴에 품고 소리 없이 울었다.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부서진 조각조차 찬란했던 우리의 한겨울이 창밖의 눈송이처럼 흩날리고 있었다.


​재하는 밤새 잠들지 못했다. 거실 소파에 앉아 열린 방문 사이로 들려오는 우리의 낮은 흐느낌을 묵묵히 견뎌낼 뿐이었다. 새벽녘, 울음소리가 잦아들고 나서야 그는 조심스럽게 방으로 들어갔다.
​바닥에 흩어진 사진들, 그리고 우리의 손에 꼭 쥐어진 도현의 기록들. 재하는 그것들을 하나하나 주워 담으며 심장이 서서히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결국... 버리지 못했구나."
​사진 속 도현을 바라보는 우리의 표정이 너무나 찬란해서, 재하는 자신이 아무리 애써도 채울 수 없는 시간의 벽을 실감했다. 그는 잠든 우리의 머릿속을 조심스레 쓸어 넘기고는, 차마 다 치우지 못한 사진 한 장을 주머니에 넣은 채 밖으로 나왔다.
​한편, 마을 입구 카페에는 낯선 여자가 차가운 공기를 뚫고 나타났다. 도현의 대학 후배이자, 그가 꿈을 좇아 외국을 떠돌 때 늘 곁을 지켰던 지수'였다. 그녀는 도현이 이곳으로 왔다는 소식을 듣고 단숨에 달려온 참이었다.
​"선배, 결국 여기였어? 그 무책임한 권태를 핑계로 도망쳐온 곳이?"

​지수는 카페 창가에 멍하니 앉아 있는 도현을 향해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누구보다 도현의 이기심을 잘 알았고, 동시에 그 이기심을 동경하며 사랑했던 사람이었다.
​"한우리가 알까? 선배가 나랑 같이 사진 찍으러 다니면서, 우리 사이가 얼마나 지루하다고 불평했었는지."
​지수의 등장은 평온해 보이던 재하와 우리의 일상에 던져진 또 다른 가시였다. 재하가 카페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지수와 도현, 그리고 재하의 시선이 얽히며 차가운 공기가 소용돌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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