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울 두 미소

by 산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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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어지는 우리의 뒷모습, 그리고 그녀의 어깨를 감싸 쥔 채 든든하게 곁을 지키는 낯선 남자의 실루엣. 도현은 그 자리에 박힌 듯 서서 움직일 수 없었다.
​"무책임하게 떠났으면, 끝까지 나타나지 말았어야지..."
​우리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귓가에 이명처럼 맴돌았다. 5년 전, 그가 그토록 지키고 싶어 했던 '다정한 오빠'라는 가면이 발등 위로 산산조각 나 떨어졌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코트 주머니 속, 낡은 인화 사진 한 장을 움켜쥐었다.

​사진 속의 우리는 활짝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을 지켜주고 싶어서, 자신의 삶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보여주기 싫어서 선택했던 이별이었다. 하지만 오늘 깨달았다. 자신의 침묵이 그녀에게는 배려가 아닌 지독한 방치였고, 자신의 미소가 그녀에게는 숨을 막는 독가스였다는 것을.
​"하..."
​도현은 모래사장에 주저앉아 헛웃음을 내뱉었다. 바다에게 휴식을 주는 계절이라며 멋진 척을 해보았지만, 정작 가장 쉴 곳이 필요한 건 자신이었다. 여행 작가라는 이름으로 세상을 떠돌았지만, 그건 자유가 아니라 사실 도망이었다.


​밀려오는 파도가 그의 구두 앞코를 적셨다. 그는 카메라 렌즈 캡을 닫았다. 오늘 처음으로, 그는 억지로 미소 짓지 않았다. 대신 어둠이 내려앉은 바다를 향해 길고 무거운 한숨을 내뱉었다.
​'미안해, 우리야. 내가 정말... 그렇게 나쁜 놈이었나 봐.'
​홀로 남겨진 도현의 위로 차가운 눈발이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제야 비로소 그는 깨달았다. 그녀 없는 자신의 계절은 5년 전 그날 이후 단 한 번도 봄인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도현은 파도 소리에 묻혀버린 자신의 과거를 되짚었다.
​5년 전, 그를 움직였던 건 거창한 희생이 아니었다. 숨이 막힐 듯한 권태기, 그리고 그 권태기를 뚫고 올라온 성공에 대한 지독한 갈증이었다. 사랑보다 꿈이 더 컸고, 우리와 함께하는 안온한 일상보다 미지의 세상을 담는 뷰파인더 속 세상이 더 화려해 보였다.
​'그땐 그게 최선인 줄 알았지.'


​우리가 싫어진 게 아니었다. 그저 우리와 함께하는 시간이 당연해졌고, 그 당연함이 자신의 앞길을 막는 짐처럼 느껴졌을 뿐이었다. 비겁하게도 그는 "너를 위해서"라는 핑계를 방패 삼아 도망쳤다. 그녀가 흘릴 눈물보다 자신이 펼칠 날개가 더 중요했던, 지독히도 이기적인 청춘이었다.
​하지만 세상의 끝까지 카메라를 들고 돌아다녀 봐도, 그가 찾던 '완벽한 풍경'은 어디에도 없었다. 화려한 이국의 노을 아래에서도 그는 늘 숨이 가빴다. 이제야 깨달은 진실은 명확했다.

​그는 꿈을 찾아 떠난 게 아니라, 자신의 숨구멍이었던 '우리'를 스스로 버리고 온 것이었다.

​"이제 와서 후회하면 뭐가 달라진다고."


​도현은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권태로움을 핑계로 밀어냈던 그녀의 다정함이, 이제는 그 어떤 화려한 경력보다 간절해졌다. 하지만 이미 그녀의 곁엔 그녀를 위해 '권태'가 아닌 '헌신'을 선택한 다른 남자가 서 있었다.
​무책임했던 과거의 대가는 혹독했다. 그는 이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진을 찍을 수 있게 되었지만, 정작 자신이 찍고 싶은 단 한 사람의 미소는 영원히 잃어버렸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그를 덮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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