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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수는 예고도 없이 나를 찾아왔다. 그녀는 도현 오빠와 함께 찍은 이국적인 사진들을 내 앞에 오만하게 늘어놓았다.
"언니가 '우리'예요? 선배가 외국에서 내내 말하던 그 지루한 과거?"
지수의 말은 날카로운 얼음 조각처럼 내 가슴에 박혔다. 그녀는 오빠가 나와의 시간을 얼마나 따분해했는지,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나와의 관계를 얼마나 짐스러워했는지 낱낱이 읊어댔다. 하지만 이상했다. 지수의 도발이 거세질수록, 내 안의 폭풍은 오히려 잦아들었다.
'아, 그랬구나. 오빠에게 나는 그저 그 정도였구나.'
지수가 돌아간 뒤, 나는 한참 동안 거울 속의 나를 응시했다. 그리고 결심한 듯 화장대를 정리하고, 그가 남긴 상자를 다시 닫았다. 지독했던 그리움이 차갑게 식어 '체념'이라는 이름으로 굳어지는 순간이었다.
다음 날, 바닷가 끝자락에서 만난 도현 오빠는 눈에 띄게 수척해져 있었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지수가 다녀갔음을 직감한 듯 고개를 떨구었다.
"우리야... 미안해. 내가 정말 비겁했어. 꿈을 좇는다는 핑계로 내 비겁한 마음을 포장했었어."
항상 자신만만하게 미소 짓던 그가, 처음으로 미소를 지운 채 아이처럼 어깨를 떨며 고백했다.
"네가 지루했던 게 아니라, 너를 지루하게 느꼈던 내 마음이 가난했던 거야. 성공하고 돌아오면 다 해결될 줄 알았는데... 돌아와 보니 정작 내가 지켜야 할 가장 소중한 건 내 손으로 다 망가뜨렸더라고. 정말 미안해."
그의 절절한 사과를 들으며 나는 비로소 그를 향해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원망도, 분노도 아닌, 정말로 끝을 마주한 사람만이 지을 수 있는 평온한 미소였다.
"오빠, 이제 미안해하지 마. 그 미안함마저도 오빠가 편해지려고 하는 거잖아. 이제는 정말... 서로의 계절에서 나가주자."
도현은 내 말에 더 이상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무책임이 낳은 결과가 '증오'가 아닌 '완벽한 외면'이라는 사실을 뼈아프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도현을 떠나보낸 뒤, 나는 곧장 재하에게로 향했다. 그는 언제나처럼 그 자리에 서서, 찬바람을 맞고 돌아온 나를 넓은 품으로 안아주었다. 그의 품은 따뜻했고, 그곳에 머물면 모든 상처가 금방이라도 아물 것 같았다.
하지만 그의 심장 소리를 들으며 나는 깨달았다. 누군가의 품 안에서 쉬는 것보다, 내 스스로 똑바로 서서 숨 쉬는 법을 먼저 익혀야 한다는 것을.
"재하야."
나는 그의 품에서 조심스럽게 물러나 그의 따뜻한 눈을 마주 보았다. 재하의 눈동자에 당혹감과 슬픔이 스쳤지만, 나는 단호하게 미소 지었다.
"고마워. 네가 없었다면 난 아마 그 차가운 바다에서 영영 숨을 찾지 못했을 거야. 그런데 이제는 다른 사람의 온기가 아니라, 내 안의 온기로 겨울을 나보고 싶어."
"우리야... 내가 기다릴게. 네가 어떤 결정을 하든."
재하는 역시나 마음이 넓은 사람이었다. 그는 나의 이기적일 수도 있는 선택조차 '성장'으로 받아들여 주었다. 나는 그의 손등에 가벼운 입맞춤을 남기며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나의 계절을 온전히 찾으면, 그때 다시 너에게 갈게. 누군가의 '우리'가 아니라, '나'로서 당당하게 네 곁에 서고 싶어."
재하를 뒤로하고 걷는 바닷길은 더 이상 시리지 않았다. 도현이 남긴 이기적인 미소도, 재하가 준 무조건적인 다정함도 잠시 내려놓은 채, 나는 오직 나만의 숨소리에 집중했다.
한겨울, 두 남자의 미소가 머물다 간 자리에 비로소 나만의 작은 싹이 돋아나고 있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누군가에게 내 숨을 맡기지 않는다.
차가운 공기를 깊게 들이마셨다.
비로소, 나의 진짜 계절이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