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어버린 어린 시절

by 산속


어른이 되면서 우리는 참 많은 것을 잃어버린다. 그중에서도 가장 아쉬운 것은 어린 시절의 기억들이다. 한때는 온 세상이었던 그 작은 우주들이 시간의 강물에 떠내려간 지 오래다.
​문득 오래된 사진첩을 뒤적이다 보면, 낯설면서도 익숙한 얼굴과 마주친다. 해맑게 웃고 있는 그 아이가 정말 나였을까 싶을 정도로 멀게 느껴진다. 그 눈빛에 담긴 호기심과 순수함, 세상을 향한 무한한 신뢰를 보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어린 시절에는 모든 것이 처음이었다. 처음 보는 벚꽃이 피는 봄날, 처음 만난 바다, 첫눈이 내리던 겨울밤. 그 모든 ‘처음’들은 지금 생각해도 가슴 뛸 만큼 특별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처음'이라는 말이 낯설어졌다. 모든 것이 반복되고, 예측 가능해지고, 놀라움보다는 익숙함이 더 편해졌다.
​그때는 시간이 무한했다. 하루가 일주일처럼 길게 느껴졌고, 방학은 마치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았다. 오후 햇살이 기울어지는 것을 보며 '아, 하루가 또 끝나가는구나' 하고 아쉬워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하루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버리는데, 그때는 시간이 정말 천천히 흘렀다.


​놀이에 대한 기억도 선명하다. 아무것도 없는 빈 상자가 우주선이 되고, 담요 하나로 비밀의 성을 만들었다. 상상력이라는 마법의 힘으로 평범한 모든 것을 특별하게 바꿀 수 있었다. 그 시절에는 장난감의 가격이 중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직접 만들고, 상상으로 채워 넣은 것들이 더 소중했다.
​친구들과의 우정도 달랐다. 복잡한 계산이나 이해관계없이, 그저 함께 놀고 싶다는 마음만으로 친구가 되었다. 싸우더라도 금세 화해하고, 서로의 비밀을 나누고, 작은 일에도 같이 웃고 울었다. 그 순수한 연대감은 어른이 되어서는 찾기 어려운 것이 되어버렸다.


가족과의 추억들도 소중하다. 엄마가 해주시던 밥의 맛, 아빠와 함께 본 만화영화, 할머니가 들려주시던 옛날이야기. 그때는 당연하게 여겼던 그 모든 것이 지금은 그리움이 되었다.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고 있다는 안정감, 보호받고 있다는 든든함을 당연하게 여겼던 시절.
​어린 시절의 계절들은 유독 선명하다. 여름 매미 소리와 아이스크림의 단맛, 가을 낙엽을 밟으며 걷던 길, 겨울 첫눈을 보며 뛰어다니던 운동장, 봄꽃이 피면 느꼈던 설렘. 계절마다 특별한 의식과 기대가 있었다. 지금은 계절이 바뀌어도 일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데, 그때는 계절의 변화가 곧 새로운 모험의 시작이었다.
​학교에서의 기억들도 아련하다. 새 학기가 시작되면서 받았던 새 책의 냄새, 칠판에 적힌 글씨를 공책에 따라 쓰던 집중의 시간, 쉬는 시간마다 친구들과 뛰어놀던 복도와 운동장. 시험이 다가오면 느꼈던 두근거림과 방학이 시작되면서 느꼈던 해방감.

​무엇보다 그 시절에는 꿈이 구체적이면서도 무한했다. 우주비행사가 되고 싶다고 하면 정말 될 수 있을 것 같았고, 가수가 되고 싶다고 하면 언젠가는 무대에 설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현실적인 제약이나 한계를 고민하기보다는, 순수한 동경과 열정으로 미래를 그려나갔다.
​하지만 어린 시절이 모두 달콤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때로는 이해할 수 없는 어른들의 세계 때문에 혼란스러워했고, 작은 일에도 크게 상처받았다. 그러나 그마저도 지금은 소중한 성장의 과정이었다고 생각한다.
​지금 어른이 된 우리에게 어린 시절은 돌아갈 수 없는 과거가 되었다. 하지만 완전히 잃어버린 것은 아니다. 가끔씩 어린아이들을 보면서, 혹은 예상치 못한 순간에 그 시절의 감정들이 되살아난다. 처음 보는 것에 대한 경이로움, 작은 것에서 찾는 기쁨, 순수한 호기심과 상상력.


어쩌면 어린 시절을 그리워한다는 것은 단순히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는 뜻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보다는 그 시절의 순수함과 경이로움을 지금 여기에서 다시 찾고 싶다는 마음일 것이다. 복잡해진 일상 속에서도 어린아이처럼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을, 작은 것에서도 기쁨을 느낄 수 있는 마음을.
​오늘도 하늘을 올려다본다. 어린 시절 올려다보던 그 하늘과 같은 하늘이다. 시간은 흘렀지만 하늘의 푸름은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하늘을 보며 가슴이 뛰는 마음 또한 여전히 내 안 어딘가에 살아있다.

​잊어버린 것처럼 보이는 어린 시절이지만, 사실은 우리 안에 조용히 자리하고 있다. 그 순수했던 마음이, 그 경이로웠던 눈빛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다만 일상의 무게 아래 잠시 숨어있을 뿐이다.
​그래서 가끔은 의도적으로 그 아이를 찾아보려 한다. 새로운 것을 배워보고, 작은 것에 감동해 보고, 이유 없이 웃어보고. 그럴 때마다 잊었다고 생각했던 어린 시절의 나와 다시 만나게 된다.
​어린 시절은 끝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선택하기에 따라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다.

목,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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