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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isha Jan 22. 2021

오늘 나는 ‘퇴사’를 말한다.

조용히 듣던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에 나는 눈물이 핑 돌았다.


드디어 D-DAY, 어느 금요일.


대한민국 직장인이 보통 그렇듯, 나 역시 줄줄이 설정해놓은 알람 소리가 못 견딜 때까지 울리면 하루를 시작한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이건 거의 일 년에 두 번 있을법한 일인데, 알람이 울리기 전 그 무겁던 눈이 저절로 떠졌다. 선크림을 툭 짜서 바르고, 괜히 마스카라도 한 올 한 올 힘을 줘본다. 그리곤 그냥 두어도 멀쩡한 운동화 끈을 새로 묶고, 총을 장전한 군인처럼 마음의 준비를 다하고 출근한다.


회사에서는 분기별로 팀장과 팀원이 1:1 면담을 한다. 주기적으로 역량을 평가받고, 그에 대한 구체적인 피드백을 받게 된다. 그게 다가 아니다. 팀원 역시 평소 꺼내기 어려운 불만사항이라던지, 업무 전반에 관해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 그러니까 오늘이 바로 그 면담이 있는 날이다.


면담 시간은 오후 3시.
아무렇지 않은 척 시간을 보냈지만 사실은 속이 타서 죽겠다. 죄지은 것도 없는데 내 자리의 전화벨이 울리면 깜짝깜짝 놀란다. 그런 나와 달리 팀장님은 여유롭게 과자를 드시며 모니터를 응시하고 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일까. 약속한 3시가 다 되었는데도 팀장님은 자리를 뜰 생각을 안 하신다. 기다려야 할까? 말해야 할까? 고민 끝에 10분 동안 마음을 졸이고 있다가 다가간다.


“팀장님, 저 오늘 면담하는 날 아닌가요? 지금 3시 넘었는데...”

“아 맞네! 근데 지혜야, 내가 이번에 휴가도 취소되고 우울하다야. 우리 다음에 이야기하면 안 될까?”


순간 머릿속이 어지럽다. 그토록 준비했던 D-DAY는 오늘인데! 이건 예상에 없던 시나리오다. 기분이 그다지 좋지 않은 상황에 이야기를 꺼냈다가 괜히 화만 불러오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오늘도 이야기하지 않으면 나는 주말 내내 가슴 졸일 것이며, 죄 없는 남편은 나의 넋두리를 온전히 받아내야 할 타깃이 될 것이다.


“아... 근데 팀장님! 과자 드시는데 목마르지 않으세요? 잠깐 시원한 물 한잔 하실래요?”

 
애꿎은 과자를 빌미로 터무니없는 용기를 내었다.

숨 막히는 면담, 아니 나의 일방적인 퇴사 통보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퇴사'


일 년을 고민한 사안이기에 단어조차 입 밖으로 내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대학교 졸업반에 들어온 첫 직장, 취준생이라면 한 번쯤 꿈꾼다는 외국계 대기업. 극심한 취업난 속에서 첫 발돋움을 하게 해준 곳과 자그마치 8년 만의 이별이 어찌 쉬우랴.


특히 나는 부서 이동이 잦은 조직임에도 불구하고 8년간 단 한 번도 팀이 바뀌지 않았다. 입사 동기들을 보면 2-3년에 한 번 꼴로 팀 이동이 있었지만 팀이 바뀌지 않은 사람은 나뿐이었다. 좋게 포장하자면 '스페셜리스트'라는 이름의 특수 카테고리 업무를 맡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특별해 보이는 나의 역할은 시간이 지나니 독이 되기도 했다. 누군가에겐 특별해 보이지만 나에게는 반복되는 일이 계속되며 '지겹다'라는 생각을 꽤나 자주 하게 되었다. 그럼 팀을 옮기면 되지 않느냐고?


갈증은 단순히 그것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나를 거두어준 회사에 죽도록 충성할 것 같은 마음은 어디 가고, 자꾸만 다른 생각이 커지고 있었다. 무슨 말인고 하니, 회사의 사업이 잘 되는 것은 뿌듯했지만 단지 그뿐. 시간이 지날수록 나의 것이 아니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이 말은 당장 내 사업을 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단지 1년 후에도, 2년 후에도 지금과 똑같은 '노동 노예' 레퍼토리로 살고 싶지 않았다.

언젠가는 회사라는 틀을 깨부수어야 하고, 혼자 일 해야 하는 날이 분명히 올 텐데?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 그 생각은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커졌다.



훗날 세계여행을 떠난 나인지라, 여행을 위해 퇴사를 강행했다고 생각하는 지인들이 있더라. 그건 전혀 아니다. 위의 고뇌 끝에 퇴사라는 결단을 내렸고, 그 후 자연스러운 수순으로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단지 그 여행길이 남들보다 조금 길었을 뿐.






팀장님과 나는 물 한잔을 마주하고 앉았다.


집에서는 막내딸로 자랐지만 회사에서만큼은 맏언니처럼 묵묵히 신뢰를 쌓아온 나였다. 도대체 네가 왜?라고 반론할 것을 대비해 머릿속에 시나리오를 착착 준비했다. 하지만 턱 끝까지 올라온 나의 진심이 보인 걸까. 8년간 한 번도 꺼내지 않았던 말을 진지하게 들어주셨다. 평소의 나를 잘 아는 그녀의 입에서 나온 대답에 나는 눈물이 핑 돌았다.


“으이그, 퇴사 결정도 쉽지 않았을 텐데 네가 이 말을 꺼내려고 얼마나 고민을 했을지 안 봐도 훤하다!

그동안 고생 많았어. 언니가 응원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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