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순위

정원은 망설이지 않는다.

by 낮은자리 수니

정원지기에게 가장 감탄스러운 때는 이른 봄. 응달에서 녹아가는 눈이 전장의 잔해처럼 처참하나, 서슬퍼렇게 남아있는 이른 봄일 것입니다. 가장 먼저 불쑥 새의 부리 같은 싹을 내미는 수선화와 마주하게 되는 때이지요. 아직은 잔디조차 푸른 기운을 얻지 못하고 있을 때, 흙을 밀고 올라오는 초록 작은 이파리는 머지않아 눈부시게 피어날 봄 화단을 그리게 하여 가슴을 설레게 하기에 충분합니다.


정원은 그런 초록이를 시작으로 다투듯 싹을 내고 꽃을 피웁니다. 정원 생명들에겐 더없이 힘든 시기인 고온 다습한 여름조차도 제 차례의 꽃은 알아서 피어나지요. 심지어 한 겨울 눈 속에서 더 처연히 피어나는 동백꽃. 봄부터 시작하여 겨울에 이르기까지 정원의 식물들은 제 차례를 알고, 알아서 차근차근 꽃을 피웁니다.


물론 그 곁에서 잡초들도 시기에 따라 서로 다른 종류대로 열심히 자리를 바꿔가며 자라납니다. 어떻게 그렇게 차례차례 잊지도 않고 순서를 지켜 피고 지는지, 그 자연의 흐름을 보며 감탄과 겸손을 절로 배우게 됩니다.


한참 일을 많이 하던 때는 하루에 네댓 가지의 일정이 있을 때가 있었습니다. 다행히 순차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면 그래도 괜찮지만 때로는 시간이 겹쳐 곤란할 때도 있지요. 그럴 때면 어쩔 수 없이 일의 우선순위를 생각하게 됩니다. 선택의 상황에서 기준을 정하고 비교우위를 생각하고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대비하며 머릿속이 슈퍼컴퓨터처럼 분주히 돌아갑니다. 한참 그런 시간을 보내고 있던 차에 내 몸 속의 암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스톱 스위치가 고장 난 로봇처럼 지내다가, 배터리가 다 되어 멈춰버린 것처럼 어느 날 갑자기 멈춰 선 것입니다. 넘어진 김에 쉬어 간다고 나는 병에 걸렸으니, 좀 점검을 해 보자 마음 먹었습니다. 그때까지 내가 살아오던 여러 습관이나 원칙들에 대해서 생각을 해 봤습니다. 더군다나 주치의 선생님이 나의 시간을 2~3년 보장해준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게 생각하자 일의 우선순위가 아주 선명해졌습니다. 2~3년 안에 꼭 해야만 하는 일이란 그렇게 많지 않았습니다. 또 그렇게 중요하지도 않는 일이었습니다. 나 아니어도 되는 일이 대다수였지요. 그렇다면 우선 순위를 정하는 일이 아주 선명해지지요. 영화에 나오는 어느 노인처럼 ‘죽기 전에 할 일’이 시한이 정해지니 아주 쉽게 정리되는 것이었습니다.


이미 작가들과 협업으로 여러 권의 책을 내기는 했지만, 내 순수 창작물을 책으로 만들고 싶다는 숙명같은 욕망이 가장 크게 떠올랐습니다. 그러나 너무 오랫동안 글쓰기 작업을 놓고 있었지요. 컴퓨터 안에 있을 원고 파일은 어디 쯤에 저장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고, 출력해둔 원고들도 서재 어디 구석에 있는 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 겁니다.


그리고 책 만드는 일을 1순위로 정하고 보니, 마음만 급해 우와좌왕할 뿐,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막연하기만 했습니다. 그래서 생각했습니다. 이제 암환자라서 가장 많이 가진 것이 시간 아닌가요. 생각하고 또 생각을 하자, 기가 막히게도 수 년전 집필을 멈춘 그 시점에 정확히 가 닿았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그 고비 앞에서 도망을 쳤던 것이었지요. 글을 쓸수록 나를 옭아매던 질문들.

나는 왜 쓰려고 하는가.

꼭 필요한 글인가.

나무나 죽이고 쓰레기를 만드는 일은 아닌가.

발병 후 가장 먼저 옷가지, 살림살이 정리부터 해놓고선, 어쩌면 가장 크고 치우기 힘든 짐이 될 수도 있는 짐을 새삼스럽게 만들려하는가.


또 다시 근원적인 질문과 더불어 도망갈 도피처를 찾고 있는 내 모습과 마주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도망갈 수가 없습니다. 나의 시한은 2~3년이지 않던가. (아무리 생각해도 주치의 선생님의 냉철한 선고는 내게 유익, 유효한 것이었습니다.) 그 끝에 와서 또다시 크게 후회하고 싶지는 않다는 마음이 도피로를 막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쉽게 우선순위를 정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암환자답게 1순위는 운동. 어쩔 수 없지 않는 이상 몸 움직이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사람으로서 이런 결정은 크나큰 결심인 셈입니다. 그러나 운동은 선택의 상황이 아니라, 2~3년의 삶을 연장 받은 암환자로서 당연히, 그리고 겸허히 받아들이고 성실 의무로 이행해야할 사항입니다.


다음 2순위는 당연히 글쓰기입니다. 그것은 어쩜 가장 큰 스트레스이며, 가장 큰 힐링이 될 수 있는 양날의 검이지요. 오늘도 컴퓨터가 부팅을 시작하여 화면이 열리는 그 시간 동안 달리기 스타트 라인에 선 육상선수처럼 완급을 위한 호흡을 조절합니다.


정원의 식물들처럼 온도와 햇볕의 길이만으로 자신이 피어날 때를 자연스럽게 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마는, 오랫동안 몸의 편리만을 위해 진화해온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이렇게도 터무니없는 고민 끝에 우선순위를 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몸이 절대적인 상황에 처하고서야 진심으로 내게 필요한 것을 알아차리고, 그걸 향해 움직일 용기나 결단이 생깁니다.


그나마 참 다행한 일이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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