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과 텃밭
“거기에다 뭐 심으요?”
차로 드나들기 불편해서 아예 대문을 뜯어버렸더니, 마을 분들이 지나다 들여다보시곤 자주 참견을 하십니다.
“꽃 심어요.”
“꽃을 뭐 할라고 심으요?”
“볼라고요. 예쁘잖아요.”
물어보시는 의도는 알지만 정색을 하며 답해드립니다.
“허, 참. 멀쩡한 남새밭을... 에이... 쯧쯧쯧... ”
혼잣말을 하며 돌아서 가시면서 어르신은 연신 머리를 흔드십니다.
아무렴요. 꽃에서 밥이 나오나요, 식재료가 나오나요. 당연한 말씀이지요.
우리 가족이 이사 와 살기 전까지 이곳은 훌륭한 텃밭이었습니다. 이 집을 보러 온 것이 11월 말, 가을이라기에는 늦고 겨울이라기에는 이른 스산한 날이었습니다. 잡초하나 없이 깔끔하게 정돈된 텃밭에서는 열 맞춰 마늘, 쪽파, 양파, 시금치 등 겨울 채소들이 질서정연하게 잘 자라고 있었지요.
그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되자 특별히 뭐 한 것도 없었는데 엄청난 양의 마늘과 양파를 수확했고, 쪽파도 얼마나 많은지 놀러 오시는 지인들이 한 보따리씩 싸 가고도 남았습니다.
한 해, 두 해 지나면서 텃밭은 점점 어수선해지기 시작하더니, 3년 쯤 되자 작물 반, 잡초 반인 밭이 되고 말았습니다. 급기야 점차 잡초 정글이 되어가는 것을 보다 못해 과일 나무를 심고, 꽃을 심고 그렇게 해서 텃밭이 점점 정원이 되어갔던 것입니다. 그런 내력을 속속들이 아시는 마을 어르신의 혀 차는 소리는, 실은 별난 까탈스러움이 아닌 것이지요.
한소리를 듣고 보니, 그도 그럴 것 같습니다. 꽃을 심어도 신경 써 가꿔야하는 건 마찬가지고, 채소를 심어도 마찬가지인데, 왜 텃밭은 유독 힘들고, 마음에 부담이 될까? 왜 전전긍긍 신경이 쓰이는가? 왜 텃밭의 잡초는 정원의 잡초보다 보고 견디기 힘드는가? 그런 생각들이 떠올랐습니다.
텃밭과 정원은 얼른 보기에는 비슷합니다. 흙을 일구고 식물을 기른다는 점에서는 비슷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막상 텃밭도 정원도 가꿔보니 둘은 꽤나 다릅니다.
텃밭은 먹기 위해 가꾸는 곳입니다. 봄이면 씨를 뿌리거나, 모종을 옮겨 심고, 김을 매고, 비료를 주고 가꿉니다. 여름이면 고추며 상추, 토마토를 따 먹고, 가을에는 깨나 콩, 고구마를 캐냅니다. 그리고 김장 배추 무를 심어 수확하고 나면 텃밭의 시간은 끝납니다.
텃밭에서는 무엇을 얼마나 거두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늘 바쁘고, 늘 손이 갑니다. 잡초가 보이면 얼른얼른 뽑아내야하고, 비가 내리지 않으면 바로 물을 줘야합니다. 때에 맞춰 비료를 줘야하고, 병들거나 벌레가 생기지 않도록 방제를 해줘야합니다. 손이 많이 가지요. 작물이 요구하는 상황에 따라서 내 상황과는 상관없이 부지런히 움직여야만 그만한 대가를 내줍니다.
그런데 정원은 조금 다릅니다. 정원에서는 꼭 무엇인가를 거두지 않아도 됩니다. 꽃이 피었다가 지는 것을 바라보고, 계절이 바뀌며 색이 달라지는 나무들을 그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꽃을 잘 피우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올해는 그렇지만 다음해에 또 피게 될 테니까요. 정원에서는 수확물보다는 시간이 더 중요합니다. 나와 함께 한 시간, 그리고 시나브로 자라고 꽃피고 변해가는 그 시간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잡초를 대하는 마음도 조금 다릅니다. 텃밭에서 잡초는 반드시 없어져야할 적입니다. 잡초는 내가 키우는 작물의 양분을 빼앗아갈 뿐만 아니라, 자리도 차지해서 제대로 자라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정원에서 잡초는 때로 풍경이 되기도 합니다. 특히나 초봄 아직 본격적인 정원의 시간이 되기 전에 피어나는 봄까치 꽃이나 광대나물은 정원을 환하게 밝혀주기도 합니다. 또 민들레는 노랑 하양 꽃으로도, 하얀 솜털의 홀씨로도 화초의 역할을 하기에 충분한 잡초이지요. 무더기로 모여자라는 쑥은 적당히 자라는 동안에는 다른 잡초가 자라지 못하도록 하는 지피식물 역할을 톡톡히 하기도 합니다. 정원의 잡초는 때로는 배경으로 때로는 공백을 메꾸는 또다른 화초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가꿔지는 텃밭의 결과물은 주방의 식탁으로 이어지고, 정원은 가꾸는 동안 정원지기의 마음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나는 오래도록 나의 몸을 텃밭처럼 대했습니다. 더 빨리 움직이고, 가장 효율적으로 시간을 쪼개가며 일하고, 결과물이 확실한, 예컨대 농사의 수확물처럼 밥이 되거나 모두에게 이로운 보기에 좋은 결과물을 좆아 살았습니다. 효율을 떨어뜨리는 요소는 제거하고 오로지 가장 좋은 결과물을 위해 힘껏 살아왔던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몸이 보내오는 작은 신호들은 무시하고, 혹시나 텃밭의 잡초들처럼 쓸데없는 게으름의 신호이지 않은가 질책하며 더 다그쳐 일하곤 했지요.
병을 앓고 나서야 알았습니다. 몸은 텃밭이 아니라 정원에 더 가깝다는 것을요. 텃밭처럼 쥐어짜며 수확을 내야하는 곳이 아니라, 가꾸어가며 함께 시간을 보내고, 계절을 지나며 살아가는 정원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