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암이 의심됩니다.
정원에 심을 화초를 구입할 때, 가능하면 월동이 되는 화초를 구합니다. 매년 새로운 꽃을 사다 심으면 새로운 꽃을 보는 즐거움이 있기는 하지만, 매년 봄이면 뾰족하게 새싹을 밀어 올리는 월동 화초를 보는 재미가 크기 때문입니다. 죽은 듯이 있다가 어느 날 느닷없이 밀고 올라오는 새싹은 꽃 보다 더 한 감동을 주기에 충분하지요.
그렇게 자리 잡은 터줏대감 월동화초들 옆에 새로운 꽃들을 조화롭게 배치하면 봄의 정원은 훨씬 풍부해집니다. 그래서 매년 봄이면 화원에 가서 새로운 봄꽃들을 사 오곤 합니다. 화원에 가면 처음 보는 화려한 꽃들이 많이 나와 있어, 어떤 꽃을 고를지 애를 먹으며 계획보다 훨씬 많은 꽃을 데려오게 됩니다.
그렇게 데려와 날마다 들여다보며 키우던 녀석이 어느 날 아침에 보면 겉은 생생하고 멀쩡한데 뚝, 쓰러져 있는 때가 있습니다. 벌레가 아랫부분을 갉아먹어 줄기가 부러졌거나, 멀쩡해 보였지만 이미 땅 속에서 뿌리가 썩어 어느 한 순간 속절없이 주저앉아 버린 것입니다. 나름대로 힘들다고, 아프다고 소리쳤겠지만 정원지기는 꽃과 향기에만 취해 전혀 눈치 채지 못했던 것입니다.
정기 검진 차 건강검진 센터에 가던 날은 벌써 겨울 외투가 무겁게 느껴지는 3월 초였습니다. 양지바른 곳에 있는 나무에 연두색 싹이 돋아나고 있었고, 벚꽃 망울은 터질 듯이 부풀어 있는 그야말로 만물이 소생하는 활기찬 봄의 서막이 열리던 시점이었습니다. 검진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화원에 들렀다가 꽃을 좀 사가야겠다는 계획을 추가하며 가벼운 마음으로 검진을 시작했지요.
“지금 당장, 가장 빨리 진료를 잡아주는 대학병원으로 가세요. 간암이 의심됩니다.”
영화에서처럼 하늘이 무너지고 노래지는 그런 느낌은 아니었습니다. 그 상황이 너무나 비현실적이어서 그랬을 지도 모르지요.
“가족들한테 어떻게 알리지? 한 달 남은 자격증 시험 준비에 열중하고 있는 남편, 벌써 삼 개월째 한 달의 반은 외국에서 반은 국내에서 근무 중인 아들, 이제 출산한 지 6개월 된 딸. 모두에게 충격과 부담을 주게 되겠군.”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그나저나 난 왜 여태까지 녀석이 자리를 잡고 자라는 동안 눈치조차 채지 못한 건지. 아무리 간이 내색하지 않는 침묵의 장기라지만, 어떻게 그토록 모르고 있었던 건지. 손톱 끝에 거스러미 하나만 생겨도 손가락이 붓고 욱신욱신 아리는데.... 내 몸 안에서 한참을 자랐을 암 덩어리를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니.....
봄마다 사들여서 속절없이 죽이던 화초처럼 눈에 보이는 것만 바라봤구나. 내 안에서 둥지를 틀고 월동하고 있었는데도 모르고 있었구나. 월동 식물의 새순에는 감탄이 절로 나지만, 내 몸에서 월동하듯 자리 잡은 암은 감탄스러울 수 없습니다.
그 해 봄에는 병원 순례를 다니느라 결국 화원에는 들르지도 못했고, 풀 관리도 제대로 안된 정원은 여름을 지나면서 월동하던 화초들마저 떠나고 그야말로 쑥대밭이 되고 말았습니다.
물론 저의 주치의 선생님은 내 몸에 월동하듯 잘못 자리 잡은 녀석을 없애는데 성공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