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몸 안에 암이 살고 있다는 것을 처음 안 날
아주 고약한 녀석과 동거
정원지기에게 잡초는 반갑잖은 상대입니다. 뽑아도 뽑아도 생겨나는 잡초를 전쟁 치르듯 뽑아내느라 정원지기의 손가락은 휘어지고, 무릎 관절은 신음합니다.
애써 돌보는 화초는 볕이 뜨겁다고, 비가 많이 온다고, 걸핏하면 시름시름 앓다가 한 순간에 스러지는 경우가 많은데, 잡초는 왜 그리 생명력이 강한지 가뭄 속에서도, 장마 통에도, ‘제발 덕분에 좀 죽어주소서’ 빌어도 꿋꿋하게 번성합니다. 꽃 보자고 애지중지 키우던 화초 곁에 떡하니 자리 잡은 잡초는 정원지기에겐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는 존재이지요.
저는 나름대로 정원의 식물들을 구분하는 기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꽃의 모양이나 색깔이 예쁘거나 향기가 짙으면 화초, 먹기에 맛이 좋으면 채소, 예쁘지도 맛있지도 않지만 몸에 약이 된다면 약초, 그 외 풀은 잡초. 이렇게 정리를 하고 보니 꽤 그럴듯해 보입니다.
꽃밭에는 당연히 화초가 주인공입니다. 채소가 자라는 구역은 따로 한쪽에 마련해 자라도록 해주고, 그 사이 고랑에 약초로 알려진 곰보배추니, 민들레니 하는 것들은 애써 뽑아내지 않고 샐러드 할 때나 쌈 싸 먹을 때 몇 잎씩 뜯어다가 먹는 것으로 구역 정리가 됩니다. 채소라도 꽃이 예쁜 무는 일부러 몇 개 뽑아 먹지 않고 남겨두어 봄에 꽃을 본다든지, 화초나 채소 구역에서 자라는 광대나물, 냉이, 달래 등 먹을 수 있는 것들은 뽑아내지 않고 눈감아 두고서 틈틈이 뽑아 나물해 먹습니다.
다만 여기도 저기도 끼지 못하는 잡초는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합니다. ‘어이, 미안한데 넌 자리를 잘못 잡았어. 여기는 채소 구역이거든. 그러니 여기서 나가줘야 해.’ ‘화초 구역에 왜 슬그머니 자리 잡은 거야.’ 이렇게 강제 퇴거를 당하는 대상입니다.
잡초 입장에서야 많이 억울할 것도 같습니다. 모두에게는 구역이 있는데, 자신은 일정한 거처조차 주어지지 않았고, 어디 뿌리 좀 내리고 살려고 하면 뽑혀나가게 되고 하니 말입니다.
그러나 정원지기 입장에서는 정원에서 쓸모가 없는 잡초는 난처한 존재인 거지요. 그도 생명이니 어딘가에 쓸모가 있을 테지만, 당장 화초나 채소에게는 치명적인 위협이 되니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내 몸 안에 암이 살고 있다는 걸 처음 알았을 때, 실은 크게 놀라지는 않았습니다. 마치 정원지기의 영토에 자리 잡은 잡초를 보는 정도 느낌이었달까요? 그래서 “이제 의사들이 암을 제거하겠구나. 마치 내 정원에 잘못 자리 잡아 내 손에 뽑혀나간 잡초들처럼, 이제 의사들의 날카로운 메스에 의해 암 덩어리는 잘려나가겠구나. 나는 뭐 조금 상처의 흔적을 가지고 살게 되겠구나.” “잠시 이 녀석과 동거를 하면 되나 보다”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의사 선생님들이 이런저런 기계들로 보이지 않는 몸속을 여기저기 들여다본 결과, 녀석은 성질이 ‘아주 고약하고 사나워서 매우 공격적이다.’는 것과 ‘쉽게 떼어 내 제거하기 난처한 곳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사실 이런 종류의 잡초들은 정원에서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소중하게 키우던 화초 곁에 딱 달라붙어 자라다가 어느 순간 화초보다 더 세력을 넓히는 녀석들을 정원지기들은 어렵잖게 만나게 됩니다. 자칫 잡초를 뽑아내다가 화초 뿌리라도 건드리면 애지중지하던 녀석을 아주 보내버리게 되기도 합니다. 잡초 죽으라고 약이라도 뿌렸다간 옆에 있던 화초마저 약에 노출되어 잡초랑 손잡고 아주 떠나가게 될 수도 있습니다.
암튼, 떼어내기도 곤란한 곳에, 성질머리 고약한 녀석과 동거 중이었다니. 이 녀석을 어찌 다뤄야 할 것인가. 정원에서야 다른 화초로 대체가 가능하지만, 이건 또 그것과는 다른 문제이니....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정원에서라면 나는 이미 삽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 정원은 내 몸입니다. 나의 영토에서 사실상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