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봄을 부르는 비가 한차례 쏟아지더니, 오늘은 기온이 쑥 올라갑니다. 창밖에 햇살이 쨍합니다. 창밖을 내다보다가 도저히 어찌할 수가 없어 단단히 차비를 하고 정원으로 나섭니다.
개나리와는 다른 샛노랑으로 첫봄을 알려주는 영춘화에 눈 맞춤을 하고, 수선화 새싹 주변을 정리합니다. 겨우내 말라있던 버들 마편초 줄기가 어수선합니다. 가위로 마른 줄기를 자르다 보니, 아래에서 새순이 자라나고 있는 게 보입니다. 돌보지 않아도 제철을 알고 깨어나는 이런 친구들에 감탄이 절로 납니다.
그 옆으로 꽃망울이 부풀 대로 부풀어 오른 명자나무가 ‘나도 좀 보세요’ 합니다. 병원 다니느라 살펴보지 못했더니, 새로운 줄기들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네요. 이 명자는 가지치기를 하여, 무성하지 않게 외목대로 키우고 있었는데, 아들 손자 쭉 거느리고 어느새 무리를 이루고 있습니다. 한 무리 명자나무들도 멋있지만, 자리를 넓게 차지할 수 없는 곳이어서, 새로 난 가지들을 잘라줍니다.
겨울을 지나오며 정원의 흙은 포슬포슬 씨앗 받을 준비를 마치고 있습니다. 물론 먼저 자리 잡은 봄까치 꽃, 광대나물, 별꽃나물 등 잡초들이 무성하지만, 이른 봄 잡초들은 키가 작고, 작은 꽃들을 눈부시게 피워 삭막한 초봄 정원의 운치를 더해 주기도 합니다. 천천히 그날 먹을 나물 반찬할 만큼씩만 뽑아내 무쳐 반찬을 만들어 먹습니다.
아직 정원이라 하기에는 폐허처럼 스산한 초봄의 정원. 2년씩이나 돌보지 않아, 쇄락해진 정원에 다시 섭니다.
아무런 생각도 없이 늘 하듯이 정기 건강진단을 받으러 가던 때가 2년 전 딱 지금인 3월 6일. 그리고 내 몸 안에서 찾아낸 암. 그리고 2년이 지났습니다. 어쩌면 지난 2년은 내게서 겨울 정원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찬바람 불고, 혹독한 절망의 시간만은 아니었다 해도 훈풍 부는 봄은 아니었으니까요.
계절이 바뀌면 정원 식물들이 시들어가는 것처럼 나에게 찾아온 암으로 낯선 병원들을 찾아다니며, 치료를 받았던 시간이었습니다. 그 시간 동안은 그동안 해오던 일들을 중단해야 했고, 그동안 해오던 생각들이 바꿔야 했고, 환경은 바뀌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긴 사람의 일생을 4계절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태어나 자라는 시기를 봄, 왕성하게 활동하는 청장년 시기를 여름, 은퇴하고 자녀들을 독립시키고 하는 시기를 가을, 그리고 마지막을 준비하는 시기를 겨울. 꽤 그럴듯해 보이는 비유입니다.
돌이켜 다시 생각해 보면 봄과 여름 사이는 꽤 선명하게 보입니다. 대부분 학교를 졸업하고 취업을 하여 경제적으로 독립하는 시기가 청장년 시기의 진입으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름과 가을 사이는 좀 애매하지요. 특히나 요즘은 자녀들이 독립해도 장년들을 그냥 쉬는 가을로 접어들지를 못합니다. 마지막 에너지를 끌어 모아 쉼 없이 활동을 이어가지요. 백세시대라는 말처럼 사람들이 예전에 비해 건강해졌고, 은퇴 후에도 아직 일할 만한 에너지가 남아있고, 전문 지식들도 가지고 있어 그렇습니다.
나 역시 다르지 않아서, 이런저런 일들을 놓지 못하고 하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몸의 시계는 낙엽을 떨어뜨리고 정리를 해야 하는 시간이었지만, 마음은 끊임없이 새 이파리를 만들어내고자 애쓰고 있지 않았던가 싶습니다.
그러다가 떡하니, 병에 걸리고 만 것입니다. 그러니까 단풍 들어가는 숲에서 혼자 새파랗다고 생각하고 있다가 화들짝 놀라게 된 것이지요. 사실 몸의 통증이나, 힘듦보다 더 힘들었던 것은 갑자기 멈춰버린 시계, 아니 하루아침에 계절이 바뀌어 어제까지 여름이었다가 무서리 내리는 가을을 맞은 느낌이었다 할까요? 그런 기분이었습니다.
그러나 강제로 멈출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오히려 저는 새로운 시도를 해봤습니다. 넘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지금까지 지나왔던 시간을 찬찬히 점검해보기도 하고, 남아있는 시간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와 시간에 대해서, 중요한 것들, 우선순위에 대해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기준으로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었지요. 그리고 그런 시간과 생각들은 상당한 충격이 아니고서는 가지기 힘들다는 점에서 나쁘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 시간이 흘러 2년이 지나가며, 그 무렵 태어난 손녀는 기다가 걷다가 뛰어다니며, 제법 의사표현을 하는 정도로 자랐고, 아들은 새로운 가정을 꾸렸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나는 지금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중이고요.
그럼에도 이른 봄 창가에서 봄볕 쏟아지는 햇살 속으로 겨울 정원을 바라보며 서성이고 있는 나를 봅니다. 멀리서 아직은 푸른 기운 하나 없는 정원. 말라비틀어진 채 널브러져 있는 화초들,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다듬어지지 않은 나무들, 텅 비어 있는 공간들을 어찌할거나 하며 서성이는 모습.
아직도 3개월에 한 번씩 병원에 가서 여기저기 사진을 찍어보며 암의 진행 추이를 살펴봐야 하는 상황. 무리하면 안 된다는데 그 무리라는 것이 도대체 얼마나 이었는지 가늠이 되지도 않는데. 계속 창문 안에서 창밖의 봄을 바라보고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런 서성임.
그러다 오늘 과감히 정원에 섰습니다. 마른 줄기와 지난 계절의 흔적들이 흙 위에 그대로 남아있는 정원에서 지난 2년 암환자로 살아왔던 시간들이 겹쳐 보입니다.
어떤 기억들은 아직도 여전히 내 안에 흩어져 있고, 어떤 날들은 아직 이름도 붙이지 못한 채 남아 있기도 합니다. 그래서 겨울 정원을 정리하듯, 마른 줄기를 잘라내고 엉켜있는 가지를 풀어내고, 흙을 다시 고르듯이 그 시간들을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정원은 아직 푸르지 않지만 이미 새로운 계절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아팠던 시간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러할 테지만, 겨울정원에 봄이 깃들고, 무성한 여름이 지나고 다시 쇄락의 가을 지나 겨울 정원이 되고 또다시 봄이 깃들 듯이, 암환자로서의 마침표를 찍지는 못하겠지만 새봄은 돌아옵니다.
그리고 나는 봄의 문턱에 서서, 지난겨울을 정리하며 씨앗을 뿌리려고 합니다. 그것이 마땅히 몸이라는 정원의 정원지기 일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