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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겐 홍콩도 영화도 배우도 모두 판타지였다

홍콩과 영화와 배우 1

by 리금홍

지방 소도시 ‘이리’에서 나고 자란 나는 고3 가을 어느 목요일 학교를 몰래 빠져나와 ‘삼남극장’에 갔다.

매주 목요일 새로운 영화를 개봉하는 극장에서 홍콩영화 한 편을 봤다. 영화 제목은 ‘천장지구’. 남자 주인공은 ‘유덕화’. 며칠을 끙끙 앓았다.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나는 극장으로 달려갔다. 새벽에 시장길을 가로질러 달려가 몰래 극장 앞 포스터와 주요 장면 사진들을 떼어다가 책상 앞에 붙여 두었다. 유덕화를 만나는 것이 인생의 목표가 되었다. 반환을 앞둔 세기말의 홍콩, 내일이 없는 불안한 청춘들의 암울한 사랑이야기가 내 현실에 파열음을 냈다. 중국말만 할 줄 알게 되면 당장 홍콩으로 날아가리라 마음먹었다. 스크린 속 그들은 어떤 어감으로 피를 철철 흘리면서 이다지도 애절한 말을 하는 건지 궁금했다. 홍콩에 가서 영화배우가 되면 유덕화를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의 대화에 동참하고 싶었다. 아비정전, 열혈남아 속의 유덕화를 만난다는 생각만으로도 두근두근 박자가 빨라지며 숨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이미 유덕화는 내 현실에 존재하고 있었다. 명보극장에서 중앙극장으로 피카디리에서 삼남극장으로 홍콩영화 동시 상영극장을 찾아다녔다.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중어중문과에 진학했다. 드디어 홍콩으로 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중문과에 진학하고서야 알았다. 한국의 중문과에서는 유덕화가 쓰는 광동말을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고 더 중요한 건 광동말이 됐건, 북경말이 됐건 간에 내가 홍콩영화배우가 된다는 것은 애시당초 불가능한 일이었다는 것을. 그것을 깨닫는데 오래걸리지는

않았다.


나에겐 홍콩도 영화도 배우도 모두 판타지였다. 생각만으로도 설렜던 내 꿈은 다시 스크린 너머로 사라졌다.



2019년 12월 중국 푸젠 성(福建省)에 갔었다.

첩첩산중 골짜기를 마을 청년의 차를 얻어 타고 다음 목적지로 이동 중이었다.

운전해 주던 청년은 스물아홉이라고 했다. 나를 포함한 한국 중년 여자 4명을 태우고 산길을 운전하고 있으니 이 친구도 꽤 재미없었는지 음악을 튼다. 근데 흘러나오는 노래가 영화 ‘천장지구’의 삽입곡 <천약유정>이었다.


하....아....고3 열아홉, 열병처럼 유덕화 천장지구에 빠져 허우적이다가 그가 하는 말을 제대로 알아듣고 싶어서 중문과에 갔더랬지. 그 노래가 나오는데 나도 모르게 탄성을 흘리고 말았다. 물론, 운전하던 청년이나 뒷자리의 내 동행들은 내가 왜 그러는지 놀랐고. 하여 나는 이러쿵저러쿵 전은 저렇고 후는 이렇고를 설명했다. 그리고, 운전하던 동네 청년에게도 말해줬다. 내가 30년 전 고등학생 때 너무너무 좋아했던 노래다...그랬더니 그 친구 눈이 휘둥그레지며. “뭐라고라고라? 네가 30년 전에 고등학생이었다고~~~~~~? 진짜야??” 놀랬겠지. 지 엄마 나이 뻘 되는 사람들이 철딱서니 없이 배낭 메고 차도 안 다니는 중국 촌구석을 헤매고 있으니..


아무튼, 그 노래가 갑자기 중국 푸젠 성 어느 촌구석의 나를 전북 이리 삼남극장으로 옮겨 놓았다. 매주 목요일 개봉을 하던 후미진 극장으로. 눈치도 없이 눈물이 났다. 얼른 선글라스를 꺼내 쓰고는 창밖을 바라보는데 이놈의 눈물이 그치지를 않는다. 결국 꺽꺽 소리가 나버렸다. 몸은 이제 점점 말을 안듣기 시작하는데,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그때. 현재가 후져서가 아니다. 과거가 찬란해서는 더더욱 아니다. 되려 과거에 서 있는 내가 처량하고, 딱하고 미련하고 멍청하고 쪼다 같아서 토닥여 주고 싶은데, 절대로 돌아갈 수 없으니, 돌아갈 수 없다고 생각할수록 선명해지니 꺽꺽 소리가 날 수밖에.

나중에 뒷자리 앉았던 동행자 이야기에 의하면, “천약유정”다음 노래는 비트가 빠른 곡이었는데 전주가 시작되자마자 그 친구가 차분한 다른 곡으로 넘기더란다. 청승맞게 선글라스 끼고서 차창에 머리 박은 채 훌쩍이는 한국 아줌마의 추억 돋는 갬성에 스크래치 나지 않게 말이다... 이 와중에 청년의 이름이 기억나네. 阿江


阿江이 틀어준 노래로 유덕화는 30년 만에 내 삶 안으로 들어왔다.

(다음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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