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아이에게 주어진 천국
내가 오직 원했던 건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이었소. 하느님은 내게 그 열망을 주셨지만… 그러면서 왜 재능은 주시지 않으셨는지 말이오 - 살리에리
영화 <아마데우스>가 오랜만에 오리지널 리마스터링으로 재개봉하였습니다. 명작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감동을 주는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1984년에 개봉하였던 <아마데우스>는 명작이라고 생각합니다. 스토리의 탄탄함과 모차르트 음악이 주는 감동을 영화관에서 즐기는 것은 정말 행복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영화를 다시 보면서 제가 영화에서 발견하는 감동과 이해가 조금 달라진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래전에 보았을 때는 그저 모차르트의 천재성에 대한 놀라움 그리고 살리에르의 질투에 대한 안타까움 등 일반적으로 영화에서 발견하는 것들이 주요 포인트였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다시 영화를 보면서 발견했던 것들이 있었고 그런 조금 다른 시각들을 한번 정리해 보려고 합니다.
영화<아마데우스>는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가 사망한 1790년대부터 널리 퍼졌던 소문을 토대로 쓰인 피터 셰퍼 Peter Shaffer의 동명의 희곡을 바탕으로 영화화한 작품입니다.
그 소문이란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질투해서 그를 독살했다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세간에 이런 이야기가 많았던 듯합니다. 하지만 살리에리는 궁정음악장으로서 높은 지위에 있었고 음악적으로도 인정받는 사람이었습니다. 모든것을 가진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위협으로 느낄 필요는 없었을 것 같습니다. 다만 모차르트의 자유분방한 성격을 싫어했던 것은 분명합니다. 영화는 이런 정황을 토대로 만든 픽션일 뿐이며 살리에리가 진짜 악인이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모차르트가 음악적 천재성을 가졌음에도 가난속에 비극적 죽음을 맞이한 것과 반대로 살리에리는 높은 지위에서 편안하게 생활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천재적인 음악가가 비극적 죽음을 맞는 동안 별 재능 없는 사람이 높은 지위를 누리는 것에 대해 불공정함을 느낀 이들이 훗날 이런 소문을 만들어내지 않았을까 추측해 봅니다.
영화에서도 역시 이런 점에 초점을 맞춥니다. 살리에리의 음악적 평범성과 모차르트의 천재성입니다. 살리에리는 음악을 좋아해서 열심히 공부하여 자신의 자리를 차지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모차르트는 어린 시절부터 천재성을 타고난 음악가입니다.
모차르트는 자유분방한 예술가로 격식과 절차를 싫어하고 자존심이 강한 성격이었습니다. 한마디로 기존 질서를 비웃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질서와 권력을 상징하는 살리에리가 힘없는 평민인 모차르트를 죽였다는 이야기가 사회 일반에 퍼졌을 것입니다.
Amadeus라는 이름의 의미는 라틴어로 amare(사랑)와 deus(신)가 합쳐진 말로 '신의 사랑을 받은 자'라는 의미입니다. 영화의 제목처럼 하나님으로부터 천재적인 은사gift를 받은 모차르트를 살리에리는 질투합니다. 그 질투는 마침내 그 은사와 재능을 주신 하나님을 원망하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그래서 살리에리는 모차르트를 죽임으로써 자신의 질투를 완성하고 모차르트에게 재능을 주신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인의 길로 나아갑니다.
결국 이 영화는 신학적인 질문을 담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왜 하나님은 저급한 자들에게 재능talent을 주셨는가?"라는 질문인데 이는 높은 신분을 가진 사람을 하나님이 더 사랑하셔야 한다는 중세기적 신분 논리입니다.
실제로 살리에리는 굉장히 모범적인 생활을 한 사람입니다. 엄청난 노력으로 궁정악장의 지위에까지 올랐으며 마치 수도사와도 같은 경건한 생활습관을 가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살리에리의 음악은 기본적으로 보수적인 성향으로 기존 음악적 경향에 충실했으며 만년에는 종교음악에만 매진했습니다. 이렇게 보면 살리에리의 항변은 이유가 있습니다.
일반적인 생각으로는 모차르트에게 주어진 재능은 종교적열심이 있으며 사회적으로 모범이 되는 살리에리에게 돌아와야 하는 게 맞습니다. 살리에리는 사회적, 종교적으로 모차르트보다 더 중요한 일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은 또 다른 역사적 시각으로 본다면 중세 가톨릭적 신분질서와 프로테스탄트적인 평등한 사회 질서의 충돌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마치 하나님이 가인을 버리고 아벨을 선택하신 것과도 같습니다. 그에 대한 이유도 있겠지만 결국 본질은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입니다. 결국 이 질문은 행위와 구원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선한 행위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지만 그것이 구원의 이유가 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의 달란트talent비유에서 하나님은 어떤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주시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만 주시기도 하셨습니다. 달란트를 받은 일꾼은 이유를 묻지 않고 맡기신 달란트에만 충실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따지는 것은 하나님이 틀리셨다는 것으로 사탄의 반역과도 궤를 같이하는 것이 됩니다.
살리에리는 하나님이 틀리셨다는 것을 증명하겠다고 외칩니다. 그의 종교적 열심과는 정반대로 하나님을 부정하는 자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런 태도는 욥이 이유없이 당한 고난에서 하나님을 끝까지 원망하지 않은 것과 비교해도 크게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겉으로 드러나는 종교적 열심이나 그의 신분으로 구원을 판단하는 것은 위험한 일일 수 있습니다.
또 한 가지 필자가 눈여겨본 것은 모차르트의 음악성과 자유분방한 자세입니다. 영화로만 보면 모차르트가 마치 세속적인 음악만 한 것 같지만 사실 모차르트가 만든 종교음악도 많이 있습니다. 모차르트의 방탕한 생활 때문에 그의 음악이 경건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어떤 형식과 절차에 머물러 계신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모차르트의 편지와 기록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경외가 자주 드러납니다. 그는 자신의 재능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선물임을 믿었으며, 이를 음악을 통해 나타내려고 했습니다. 모차르트의 음악에는 이런 신앙이 반영되어 있어서 대중에게는 감동을 주고 음악가들에게는 높은 완성도로 찬사를 받았습니다. 모차르트의 음악은 창조주의 자유로움과 완전성을 표현하며 인간의 해방을 선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자유분방하고 창의적인 음악으로 인해 신적 영감을 발견한다는 고백도 많습니다.
개신교의 신정통주의(neo-orthodoxy)는 20세기를 뒤흔든 신학이었습니다. 신정통주의의 창시자 칼 바르트Karl Barth는 모차르트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언젠가 내가 하늘나라에 가게 된다면, 나는 거기서 누구보다도 먼저 모차르트 선생을 찾아뵐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토마스 아퀴나스, 루터, 칼빈, 슐아이허마허 선생들은 다음 차례입니다"
“나는 천사들이 하나님을 찬양할 때 오직 바하(Bach)만을 연주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확신하건대 천사들이 저희들끼리 있을 때는 모차르트를 연주한다는 것이고, 사랑의 하나님께서도 그것을 기꺼이 들으신다는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주기도문)에는 놀이(Spielen)도 포함된다고 믿으며, 나는 모차르트가 놀이하는 것을 듣습니다... 나는 모차르트의 음악에서 놀이의 극치를 듣습니다. 그것은 다른 어떤 누구에게도 들어볼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놀이란 예술을 의미합니다. 놀이와 예술은 자유롭고 자발적이며 창조적인 활동입니다. 이런 놀이의 본질은 하나님의 창조와 궤를 같이 합니다. 바르트와 그 뒤를 이은 몰트만J, Moltmann 같은 현대 신학자들은 이런 놀이의 본질에 주목했니다.
영화에서는 모차르트의 장난기를 여과 없이 보여줍니다. 언제나 크게 소리 지르며 웃고 떠들고 장난치는 모차르트의 모습은 사실 어린아이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예수께서는 어린이들을 가로막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마가복음10:14)
"하나님은 언제나 내 눈 앞에 계신다. 나는 그의 전능하심을 깨닫고 그의 분노가 두렵다. 그러나 나는 또한 그분의 사랑과 그분의 피조물들에 대한 그분의 인자하심을 발견한다." -모차르트
사실 하나님의 나라도 어린아이 같은 것입니다. 때묻지 않고 순진한 자유로운 영혼들이 머무는 곳입니다. 모차르트가 낭비가 심했고 방탕하게 놀기를 좋아했다는 평가는 그가 그만큼 세상 물정에 어두웠다는 것과 세속적 질서에 얽매이는 것을 싫어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어린아이 같은 순전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뛰어논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의례와 격식 같은 것 또한 놀이와 예술과도 같은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본질을 잊고 그 격식을 절대화합니다. 이런 것이 어린아이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장애가 되지 않는지 생각해 볼 일입니다.